유배 시작

9/18

by 차구마

제주공항은 언제 와도 새롭다. 공항 밖으로 나오면 이곳이 제주라고 말하는 듯 바람이 세차다. 바람 속엔 바다 냄새가 섞여있다. 나는 바람과 바다를 느낄 때 제주를 실감한다. 좋은 바람이 부는 이곳, 그래, 이곳이 제주다.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이 줄을 길게 서있다. 내가 기다리던 버스가 조금 늦는다. 가야 할 곳이 있고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초조하진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바람은 자주 불었다. 그렇게 바람이 몇 차례 지나가고 나니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 몸을 싣고 공항을 빠져나갔다. 버스 안은 조용했다. 그 침묵 위에서 버스는 고요히 달렸다. 하늘이 어둑해지고 빗방울이 조금 떨어졌다. 풍경을 조금 더 보고 싶었으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숙소는 1시간 반 거리인 종점에 있었다. 갈 길이 멀고 머무를 날은 충분하니 나는 눈을 감았다. 미세한 긴장감은 몸의 시간 감각을 날카롭게 세웠다. 적당한 때에 눈이 떠졌다. 곧 버스가 멈췄고 나는 짐을 챙겨 내렸다. 바다 냄새가 더 진하게 풍겼다. 바다가 가까운 숙소라 실컷 맡을 냄새였지만 나는 크게 한번 더 숨을 들이쉬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나름 긴 여정에 지쳤는지 캐리어가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숙소는 제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기 위해 모인 청년들이 마련한 게스트하우스다. 그들은 이곳을 캠프라고 부른다. 용기 있는 개척자들의 아지트니 캠프라는 말이 꽤 적절하게 들린다. 일주일에 하루는 캠프 관리 업무, 다른 하루는 농산물 판매장에서 일하는 것으로 공짜로 숙박할 수 있다. 공짜는 참 좋은 말이라, 낡고 녹슬고 수압까지 약한 낡은 숙소가 운치 있게 보인다(실제로도 꽤 분위기 있고 전망까지 환상적인 숙소다). 배정받은 방에 짐을 풀고 화장실로 향했다. 첫날부터 찬물로 급하고 호들갑스럽게 샤워를 했다. 며칠 전에 보일러가 고장 나서 온수가 안 나온다고 했다. 쌀쌀한 저녁에 찬물 샤워는 괴로운 일이었지만 여기는 제주고, 바다가 보이고, 게다가 숙박은 공짜니, 모든 것이 괜찮았다. 아니, 아주 좋았다.

이 적당한 시간과 좋은 장소에서 나의 유배를 시작할 참이다. 나의 셀프 유배는 나를 가두는 일이자 나를 자유롭게 하는 일임을 나는 안다. 나의 유배는 나를 한없이 슬프게 하거나 생각 없이 기쁘게 하지 않을 거다. 나의 유배는 짧거나 길거고, 보람차거나 의미 없을 거고, 매일매일이 다를 거고, 그렇게 날마다 내 마음을 어르고 달래다 보면, 이 유배는 결국 끝이 날 거다. 유배가 끝나는 날엔 좋았거나 나빴거나 다시 오늘을 곱씹으며 쓸 거다. 꼭 그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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