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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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구마

쩍 하고 아가리를 벌린 캐리어 옆에서 글을 쓴다. 24인치 캐리어 안엔 이미 짐이 가득하다. 캐리어 옆에 누운 여행용 배낭도 묵직하다. 챙겨야 할 짐은 모두 챙겼다. 그래도 혹시나 챙겨야 할 것이 더 생각날까 봐 캐리어를 열어둔다. 많은 것을 버리고 오려고 떠나는 여행인데, 나는 다시 가져올 짐을 더 많이 챙긴다. 무언가를 버리든, 다시 가져오든, 혹은 새로 얻어오든, 아무래도 좋다. 나, 내일 제주 간다.

내가 선택한 일이다. 어쩌면 엄청나게 후회할지도 모르는 결정이다. 한창 하반기 공채가 뜨는 시기에 떠나는 제주 한 달 살기. 정신 나간 취준생의 충동적 모험이다. 취업의 문은 턱없이 좁다. 한 달 떠난다고 해서 한 달만 미뤄지는 것이 아니기에, 전날 밤이 돼서도 초조함은 사라질 줄 모른다. 배짱 있게 결심하고 오래도록 똥줄 태우는 나의 모습이 웃프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 한 캔을 꺼낸다. 밤이 고요하다. 맥주를 꿀떡거리는 목구멍의 소리와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 낡은 냉장고가 덜덜거리는 소리 외에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폭풍이 오기 직전 한없이 고요한 폭풍 전야, 아니 출발 전야(前夜)다.


심장이 뛰었다. 오랜 고민 없이 결정했고, 곧장 실행에 옮겼다. 포털 사이트 카페를 뒤적이다가 제주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을 발견했다. 어디 어디 기업 공채가 올라왔다는 내용들 사이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민, 조회수도 얼마 되지 않는 게시글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클릭하고 곧 정신을 뺏겼다. 도망치고 싶은 찰나에 찾은 쥐구멍이었다. 볕 들 날이 있는 구멍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가 보고 싶었다. 한 이틀 정도 고민했던 것 같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그 답을 납득시킬 이유를 찾는 시간이었다. 결국 스스로 납득할 만한 세련된 이유는 찾지 못했으나 청춘, 도전, 낭만, 젊음 따위의 멋진 말들을 다 갖다 붙이며 억지로 여행의 목적을 만들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신청서는 이미 전송됐고, 확인 전화가 걸려왔다. 에라 모르겠다. 낙장불입이다.

“18일에 가겠습니다.”


여행을 앞두고 신경 써야 할 부분이 꽤 많다. 우선 부모님. 내색은 안 하시지만 내 취업 소식을 누구보다 기다리실 분들이다. 나는 아직 부모님께 붙어 있는 아픈 손가락이다. 얼른 취업하고 자립해야 떨어져 나갈 꽤 버거운 짐이기도 하다. 나는 무겁다. 내가 내 무게를 잘 안다. 철이 좀 들다 보니 이젠 부모님의 주름만 봐도 코끝이 시큰거린다. 추석 명절에 함께 시간을 보내며 슬쩍 말씀드렸다. 한 달 정도 제주에 다녀오겠다고. 조금 당황하신 기색이 보였다. 그래도 돈은 있냐고, 돈 부족하면 얘기하라고, 몸 다치지 말고 잘 다녀오라고, 흔쾌히 허락하셨다. 나보다 더 내 여행을 걱정하신다. 다시 코끝이 시큰거린다. 나는 확실히 좀 더 아픈 손가락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지인들도 신경 쓰인다. ‘나 한 달 동안 제주도 가요~’ 하며 동네방네 떠들 생각은 없다. 친구나 지인들에게도 굳이 알리진 않을 생각이다. 여행 가기 전에 만나거나 연락한 친구들에게만 슬쩍 말했다. 반응은 다양하다. ‘지금 가도 괜찮겠냐?’부터 ‘부럽다’를 거쳐 ‘이 새끼 정신 못 차렸네ㅋㅋ’라는 애정 섞인 욕설까지. 정신 못 차린 거 맞으니까 같이 웃어넘긴다. 같이 가자고 농담을 건넨다. 같이 가자는 대답은 아직 못 들어봤다. 다들 갈 생각이 없는데 나는 굳이 간다. 왜일까. 눈치가 보인다. 열심히 공부 중일 스터디원들에게도 한 달의 공백을 말한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 그래도 눈치가 보인다. 왜일까. 누구도 내게 눈치를 주지 않는데 나는 눈치를 본다. 나 혼자 내 눈치를 보며 죄책감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그래서 ‘셀프 유배’라 이름 붙이기로 한다.


유배 준비는 간단하다. 인터넷 검색으로 최저가 티켓을 예매하고, 캐리어를 열어 한동안 입을 옷과 생필품을 주워 담으면 된다. 여름과 가을의 사이에 가는 유배라 어떤 옷을 챙길지 조금의 고민은 필요하다. 작은 가방 안에 두 계절을 담는 일은 나름 어려운 일이니. 생각보다 빠르거나 혹은 너무 늦어지지 않게, 적당하고 적절하게 준비를 마친다. 왜 안 가져왔을까, 왜 가져왔을까 하는 고민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한다. 가진 모든 것을 챙겨도 모자라고, 가진 모든 것을 두고와도 충분한 것이 여행 준비다.


한 달은 나름대로 긴 여행이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더 긴 일상의 공백이 되면서도 금세 지나갈 짧은 기간이기도 하다. 처음 가는 긴 여행이자, 스스로 떠나는 유배다. 의미를 찾되 굳이 의미를 찾으려 억지 부리지 말 것. 후회를 남기지 않되 굳이 후회하지 않으려 노력하지 말 것. 돌아오되 굳이 돌아오려 애쓰지 말 것. 나, 이제 제주로 (여행, 피난, 휴가, 유배)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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