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일을 떠올리니 왠지 기분이 살짝 좋아진다. 지금은 오후 4시의 한적한 어느 카페다. 창 밖엔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어제를 회상하며 피식거리기 딱 좋은 시간과, 장소와, 날씨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한낮의 요란한 거리에서 떠올렸다면 무미건조했을 기억이 예뻐지는 때다. 기억을 담당하는 내 뇌 속 해마는 확실히 기분파다.
어제는 종각에 있었다. 딱히 할 일이 있던 건 아니다. 그저 종로서적과 주변 중고서점에 들러 볼 만한 책이나 한 권 사려고 했다(구경은 종로서적에서, 구입은 중고서점에서. 그게 가난한 취준생의 책 쇼핑 방식이다). 서점에서 책을 뒤적이다 보면 시간은 금세 간다. 금세 시간을 보내고 싶어 갔던 걸지도 모른다. 종각까지는 지하철로 꽤 가까운 거리이기도 했고, 책 구매는 언제나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니, 어쨌든 손해 볼 동선은 아니었다.
어젠 비가 올 듯이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우산은 챙기지 않기로 했다. 만약 뒤늦게 비가 내렸다면 오늘의 회상은 분명 불쾌했으리라. 날씨가 습해 땀이 조금씩 흘렀지만 다행히 비는 끝까지 오지 않았다(귀가하는 저녁 무렵 비가 몇 방울씩 내렸으나 그 정도의 비는 오히려 반가웠다. 먹구름이 잔뜩 끼고도 비가 전혀 내리지 않을 때 나는 왠지 조금 섭섭하다). 중고서점에 도착해 구입할 인문 교양서 한 권을 선택하고, 단편소설집 한 권을 골라 자리를 잡고 앉았다. 흐린 조명 아래서 짧은 단편소설 한 편을 재빨리 읽었다. 시간은 금방 흘렀다. 더 꾸물거리면 비를 맞게 될 것 같았다. 소설의 여운을 남겨두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나는 걸음이 빠른 편이다. 역까지는 금방이었다.
지하도를 지나 개찰구로 향하는 길에 수상한 삼인방이 빠르게 접근해왔다. 눈을 피할 틈도 없이 그들은 내 앞을 막아섰다. 그들의 기민함은 놀라웠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바짝 삭은 찌질의 냄새를 풍기는 나에게 온갖 너스레를 떨며 말은 건다는 것이었다. 놀라운 친화력. 그 삼인방은 자신들을 대학로 극단의 홍보팀이라고 소개했다. 나보다 훨씬 어려 보여도 나보다 훨씬 열심히 살고 있는 그들의 얘기가 궁금했다. 잠시 귀한 시간을 내어주기로 했다(그들이 제시한 연극 티켓 2매에 혹한 건 아니다. 어차피 같이 보러 갈 사람도 없으니).
키 큰 남자 한 명과 키 작은 여자 두 명의 알맞은 조합. 삼인방은 질문과 리액션과 칭찬을 적절히 섞어가며 완벽한 팀플레이로 나를 공략했다. 그들은 시민참여형 연극을 제작하고 있다고 했다. 시민들의 삶을 연극 배역으로 그대로 재현해 무대 위에 세우고 싶어서 무작정 행인들을 붙잡아 묻고 있다고 했다. 세계적인 뮤지컬 '캣츠'도 그렇게 제작된 거라는, 무대에 등장하는 99마리의 고양이 캐릭터가 바로 뉴욕의 이름 모를 시민들이었다는, 감동적인 대서사시에 나는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다. 한참 후 삼인방과 헤어져 지하철을 탔다. 시간을 확인했다. 단편소설 한 편을 더 읽은 시간만큼은 지난 것 같았다.
지금의 내 모습을 표현하는 말, 가장 큰 고민, 꿈과 목표. 뻔한 질문을 묻고 답하던 그 짧은 시간이 꽤 즐거웠던 것 같다고, 오후 4시의 비 내리는 카페는 말한다. 이제야 나도 그 삼인방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떠오른다. 당신들을 움직이는 것이 뭐냐고. 행인들의 차가운 거절에도 자존심을 숨기고, 낯선 이와의 대화 속에서 어색함을 숨기는 일. 흔들리는 눈빛과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 속에 자신을 겨우 숨겨놓고 다시 거리를 헤매는 일.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젊고 가난한 너의 꿈이 뭐냐고. 사실은 그들의 용기가 미치도록 부러운 내가 언젠가 누군가에게 받고 싶은 질문들. 무대 위에 있을 그들의 대답을 언젠가 관객석에 앉아 듣고 싶다. 그땐 나도 나의 진짜 대답을 준비해 가야겠다.
오후 5시에도 카페의 창 밖에서 여전히 비가 내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