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눈에 띄지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 이겨낼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지금은 전쟁도 평화도, 삶도 죽음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 눈에 보이지 않는 적에게 눈에 보이는 위협을 당하는 상태. 모두가 앓게 될지도, 아프지 않을지도 모르는 상태. 글쎄. 이렇게 난감한 상황이 오면 우린 대체로 가장 가까운 것부터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연애를 시작하면 희미해지고, 그러다 가정을 꾸리면 보고 싶어지는 엄마의 얼굴처럼. 평상시엔 사소하다가 이제 새삼 다시 그리워지는. 그래, 우린 지금 일상을 잃어버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질병이 다시 덮쳐왔다. 신종플루, 사스, 메르스 따위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요란하게 등장하고 조용히 사라져갔던 공포가 다시금 되살아난 거다. 의학이니 기술이니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온 세상이지만 인류의 질기고 오래된 적을 다시 맞닥뜨리는 고통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코로나19. 마지막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숫자의 애매함이 끝을 기약할 수 없는 오늘의 생존투쟁을 더욱 불안하게 한다. 20, 21, 22, 혹은 그 이상. 인류는 통제할 수 없을 숫자를 기억하며 많은 이들이 병들고 죽어간 오늘을 다시 역사에 새긴다. 그리고 역시나 죽은 자들은 무고하다.
전염병. 동물이 사람에게, 혹은 사람이 사람에게. 살아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에게 죽음을 넘기는 이 질병의 형태는 그 자체로 무서운 괴물이다. 전염이란 단어 앞에서 그것이 가져올 고통의 크기와 생존의 확률은 부차적인 문제다. 마스크 대란, 생필품 사재기, 사회적 거리. 아픈 이의 손을 잡을 수도, 안고 입을 맞출 수도 없다. 마스크 뒤에 코와 입과 마음을 숨겨야 한다. 나를 드러내선 안 되고, 남을 들여다보아도 안 된다. 타인의 존재가 불편함이 되고 나의 존재가 타인에게 피해가 될까 걱정하는 여리고 선한 마음들. 사람의 사람을 향한 반강제적 불신.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지금 이 보이지 않는 위협의 가장 치명적인 증상이다. 믿지 못 할 때 사람은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다. 이 무서운 바이러스가 눈에 보일 만큼 자라게 된다면 그 모습은 인간의 형상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인류의 목숨을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이 이 난세의 구세주다. 의료진, 담당 공무원, 봉사자들. 우리는 온전히 그들의 손과 발과 두뇌를 믿는다. 그들이 시간과 육체를 갈아 넣는 만큼 사람이 살아난다. 의무감, 애국심, 인류애. 그런 성스럽고 무거운 말들을 짊어지고 그들은 위험한 곳으로, 더 위험한 곳으로 자꾸만 향한다. 그들이 품격 있는 선한 마음의 소유자든, 그저 어쩔 수 없는 직업정신으로 움직이는 월급쟁이든 아무런 상관없다. 우린 그들에게 목숨을 빚졌다. 그래서 몸을 무겁게 무장하고 바삐 움직이는 그들의 걸음 위로 간절한 바람을 얹는다. 사람을 살려라, 살리는 자도 살아라. 사람이니까, 우린 살리고 살아야 한다.
멈추거나 늦춰진 시간들 속에서도 변함없이 가는 시간들이 있다. 1분을 1분으로, 한 시간을 한 시간으로, 그렇게 여전히 등속도로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 시간의 물리적 흐름을 좀처럼 거스를 수 없는 사람들. 출퇴근 여전히 붐비는 지하철에도, 차마 문을 닫지 못 하는 상가에도, 무거운 공기가 가득 찬 학원가와 독서실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변한 건 얼굴을 깊숙이 가린 마스크 뿐. 질병보다 두려운 일상을 일상처럼, 그렇게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건물 유리문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궁서체 문구.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휴교-휴업-연기)합니다.’ 도저히 멈출 수 없는 사람들. 어쩌면 잠시 멈출 핑계가 필요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절망은 희망보다 우리와 가깝다. 우리가 무너지는 모든 순간 눈길 닿는 곳마다 절망은 흔하게 보인다. 희망은 대체로 보이지 않는 마음의 가장 먼 곳에 있다. 애타게 찾아도 희망은 도무지 눈에 띄지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 이겨낼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우린 가까운 것부터 놓친다. 가까운 것부터 잃는 우리는 가까운 절망을 먼저 잃고, 희망은 가장 나중에 잃게 된다는 얘기다. 끝까지 희망을 품고 버티는 동안 우리는 계속 싸우고 이기면서 앞서 잃어버렸던 것들을 하나 둘 찾을 수 있을 거다.
언젠가 뿌옇던 날이 개고 좋은 바람이 부는 날엔 그래도 봄이었다. 맑은 바람을 쐬려 한 호수를 찾았다. 평일 낮에도 주차장엔 차들이 빼곡했다. 출렁다리가 좀 더 묵직하게 흔들릴 정도로 많은 이들이 모여 호수를 가로질러 건넜다. 호수 둘레를 따라 이어진 산책로 위에 마스크를 낀 여러 가족들은 여전히 단란했고, 간간이 혀를 내밀고 봄의 향을 핥는 목줄 멘 개들이 그들에 앞장서서 걸었다. 멈춰버린 일상의 답답함이 결국 전염병의 공포를 넘어 봄을 찾게 한 거다. 물론 질병은 아직이고, 사회적 거리두기도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손 놓고 보내기엔 이번 봄이 너무 소중하다는, 일상을 되찾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들이 눈에 밟힌다. 비판할 순 있지만 차마 비난할 순 없는 마음들. 찰랑거리는 호수의 물결 위에 그런 마음들이 비치고 있었다. 봄을 따라서, 호숫가를 따라서, 우린 그렇게 조심스레 일상을 찾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