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바다는 잔잔하다, 그날도 그랬다

차구마 일기

by 차구마

바다는 이제 잔잔하다.
그날의 바다도 이렇게 잔잔했다고, 여전히 아픈 이들은 똑똑히 기억한다.


미안하다.


뉴스를 안 본 지 꽤 오래된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뉴스를 찾아서 보는 일이 없었다고 해야겠다. 예전엔 신문부터 인터넷 뉴스까지 섭렵했는데. 정치니 사회니 하면서 정의를 찾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으니까. 컴퓨터 앞 처리해야 할 업무들. 작은 한숨, 그리고 나는 이제 무(기)력하다.

매일 스치는 뉴스의 제목들이 오늘은 유난히 눈에 띈다. 집값, 오세훈, 윤석열, 코로나, 확진자 ― 매일 익숙한 단어들 사이에 살포시 떠오르는 묵직한 단어들의 대비는 선명하다. 바다, 차가운―, 세월호, 아이들 ― 아, 오늘은 아직도 가라앉아 있는 것들이 떠오르는 날, 아니 떠올려야 하는 날이구나. 재빨리 노트북을 켠다. 12시가 지나기 전에 써야 한다, 무엇이라도. 이건 잊어가던 내가 ‘잊지 않겠습니다’ 던 내게 쓰는 반성문일지도 모른다.


부랴부랴 인터넷을 검색해본다. 올해가 몇 주기였지...? 기사 몇 개를 훑는다. 7주기. 멈칫했다. 벌써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다. 매년 조금씩 희미해졌겠지만, 우리는 아직 잊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무엇이 잊지 못하게 했을까. 왜 우리는 7년 동안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해야 했을까. 잔잔한 4월의 바다는 왜 자꾸 슬퍼야만, 그래서 누군가는 매년 이맘때면 목놓아 울어야 할까. 바다는 대답이 없다. 바다는 죄가 없으니까.

지치지도 않냐, 질리지도 않냐, 하는 일갈들이 다시 쏟아진다. 그런 말들 뒤엔 물음표가 아니라 느낌표가 따라오므로 그것은 질문이 아니다. 대체 왜 그런 걸 묻는 걸까. 당연히 누구보다 지쳤겠지, 무려 7년을 울었는걸. 당연히 아연하고 질렸겠지, 대꾸도 없고 변화도 없는, 차디찬 바다 같은 세상인걸. 그렇게 묻는 이들이야말로 그따위 질문을 삼가고, 삼가 명복을 빌고 빌어도 모자란 자들일 테다.


그리고 미안하다.


미안하다 ― 라는 말들이 새롭게 와 닿는다. 7년을 미안하다고 속삭였건만 (크게 소리쳐 말하진 못했으니), 오늘 다시금 느끼는 미안함은 나의 어떤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건 아닌 듯하다. 나는 애초에 지켜줄 힘도 능력도 없었으니까. 도저히 해줄 수 없는 능력 밖의 일에 대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은 미안함보다 안타까움에 가깝다. 차라리 내 미안함의 정체는 기억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라고 말해야 하겠다. 나(우리)의 기억이 어렴풋하고 섬세하지 못했으므로 진실은 아직 잠겨있고, 많은 이들이 여전히 억울하게 울며 죽어가니까.

짧게 끝나 금세 다시 잊어버릴 나의 반성은 이제 뒤늦은 감사로 이어진다. 그날을 기억해주는 이에 대한 감사.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감사. 일상에 녹아버린 나의 하루를 문득 깨워주려 매일 밤낮을 깨어있는 이들에 대한 감사를 전한다. 이 슬픔이 끝나는 날, 슬펐던 이들을 기억해준 자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겠다. 세상은 언제나 잃어버린 자와, 잃어버린 자를 기억하는 자의 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오직 그것만으로 세상은 간신히 아름다울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나(우리)라도 그들의 편으로 남아있어야 하지 않을까, 잠시 잊고 있었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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