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된다고 말하기

by 모구차

연이은 야근 후에 겨우 짬을 내어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이미 퇴근시간 이후였는데 지금 무언가를 확인해 줄 수 있냐는 임원의 연락이었다. 대답을 안 했더니 임원의 직속부하이자 나의 직속상사인 리더가 나에게 연락이 왔다.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며칠간의 그간의 야근들이나 격무들이 생각나 하고 싶지도 않았다. 화가 불쑥 났지만 오죽 급하랴는 생각이 들어서 화는 참고(상사에게 화를 낼 수는 없으니 그래서도 참고) 병원이라 팔로우업이 어려울 것 같다고만 짧게 답했다.


그 이전엔 너무 많은 일들이 우선순위도 정리되지 않은 채 쏟아진 적이 있다. 물리적으로 가능한 캐파,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두 손은 물론 양발을 같이 써도 안될 판이었다. 게다가 모두 우선순위는 일 순위. 불평을 할 짬조차 나지 않아 나름의 순서를 정해가며 좀비 무찌르듯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리더가 A는 언제 되냐 B는 언제 되냐고 물었다. 사실 그냥 단순한 질문이었다. 언제 가능하냐 정도의. 질문에 대답만 하면 되는데 그간의 억하심정이 살짝, 아니 티 나게 튀어나왔다. 지금 C도 D도 E도 동시에 진행 중인데 제가 뭐부터 먼저 하면 좋을까요. 도저히 동시에 모두 다 진행하기는 어려운데 다 데드라인이 이번 주라고 합니다.


두 사례 모두 리더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첫 번째는 내일 하는 것으로, 두 번째는 본인선에서 커트가 가능한 건 일이나 일정을 조정해 주었다.(물론 결국 나중에는 다 했다만)


다만 두 가지 상황 모두 가만히 있었다면 이게 이슈인지 아닌지조차 타인은 몰랐다는 거다. 때리는 사람 맞는 사람 입장이 다르다고, 일을 지시하는 사람 맡아서 하는 사람 입장도 천지차이다. 된다 안된다, 어렵다 힘들다 말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모른다. 내가 말을 하지 않으면.


한국회사를 오랫동안 다니면서는 이런 말을 하는 건 미덕이 아닌 줄 알았다. 가끔 이런 말을 꺼내면 OO 이는 역시 솔직하다 같은 얕은 핀잔부터, 너만 힘드냐 여기 있는 사람 다 힘들다는 센 지적까지 받았다. MZ세대 운운하며 라떼를 논하는 이도 있었다. 꿋꿋이 꾸역꾸역 잘 참으며 그냥 일하는 게 겸손이고 책임감인 것처럼 여겨지는 문화가 태반이기 때문이리라.


외국계로 옮겨오고 위와 같은 일들이 있을 때 오히려 말을 하지 않으면 핀잔을 듣는다. 적극적으로 상황을 타개하고 공유해야지 혼자서 끙끙 앓는 건 스마트하지 못한 일처리방식으로 여겨진다. 늘 더 발언할 것을 요구받고, 요청사항을 물었을 때 없다고 하면 생각이 없는 이처럼 여겨진다. 참으면 바보처럼 여겨진다. 어쩜 이리도 다른지.


못하겠어요, 안 될 것 같아요, 다 못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힘듭니다. 이런 말에 익숙해지자. 정당한 상황에 대한 근거와 사실을 가지고 찡찡대지 않고 말한다면 한국, 외국이건 못할 말이 아니다. 해야 하는 말이다. 자신 있게 말하자. 안됩니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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