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펜을 쓰는 이유
큰 꾸지람보다, 작은 칭찬이 필요하다
회사 자리 곳곳에 초록 펜을 두고 쓴다. 회사에서 연차가 쌓이고 한 명 두 명 후임들이 생긴 이후부터, 이들의 업무 보고서에 대해 사전 검토라는 이름을 단 훈수 두기를 하게 된 이후로부터 생긴 습관이다. 검은색, 파란색 펜은 이미 보고서에 있는 색이라 잘 보이지 않는다. 빨간색 펜은 어쩐지 잘못만을 지적하는 것 같다.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으면서 포인트가 잘 보이는 색, 그래서 찾은 색이 초록색이다.
사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수준의 보잘것없는 이 생각은 나의 신입사원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호랑이 같은 엄한 팀장님 밑에서 들고 가는 보고서마다 빨간 줄을 죽죽 그이며 호되게 배웠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물론 분명 칭찬도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한참의 보고 타임이 지나고는 빨간색으로 너덜너덜해진 종이와 너덜너덜해진 마음만 남았다. 그 즈음 자주 울었던 것 같다. 이유 없이 서럽고 일이라는 건 뭐가 이렇게 어렵나 싶었다. 내가 하는 일중에 오답이 아니라 정답도 있긴 할까. 너무나도 완벽한 이들의 리그에 내가 들어갈 틈이 있나, 들어갈 수는 있나 싶었다.
그런가 하면 빨간 표시로 너덜너덜한 보고서만큼 잊을 수 없는 표정이 있다. 매일같이 자신감보다 자괴감을 더 많이 쌓아가던 그 시기였다. 당시 회사는 일본어를 하는 사람이 필요했고, 마침 그게 내가 자신 있는 딱 하나라, 회사는 신입이 들어가도 되나 하는 온갖 회의에 나를 참석 시켰다. 내 통역에는 빨간색도 초록색도 체크해 줄 사람이 없던 지라 근거 없이 자신 있게 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통역을 할 때마다 빨간펜 팀장님은 ‘요놈 봐라’하는, 대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화내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시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놈이 뭘 믿고 저렇게 자신이 넘치지’와 ‘아이구 내 새끼 장하다’ 중에 하나일 것 같은데, 난 아무 이유 없이 후자라고 생각했었다. 인정이 고픈 내게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요상한 표정은 칭찬으로 보였고, 항상 비워져 있는 자신감을 잠시나마 채우고 다음날도 출근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다.
사회 초년생에게 일터는 평생을 학생으로만 살아온 사람들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異) 세계다. 아기들이 뒤집기만 해도, 밥만 잘 먹어도, 잠만 잘 자도 아이구 잘하네 칭찬을 받는 것처럼, 매일같이 처음 해보는 미션에 부딪혀 나가는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칭찬을 받아야 한다. 메일 한 줄만 잘 써도, 어려운 선배들 사이에서 점심 메뉴만 골라도, 아니 그저 이 어려운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잘 숨 쉬고 버티기만 해도, 충분히 칭찬받아야 한다. ‘아이구 잘하네’
하지만 이상하게 유독 회사는 칭찬에 인색하다.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어른스럽지 못한, 과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잘한 것은 당연한듯 슬쩍 넘어가고, 조금의 잘못은 세상 가장 엄격한 잣대로 평가된다. 이제 막 이 세계에 뛰어든 이들은 이 이상한 어른들의 룰에 맞춰, 우리 사회 대부분의 장면에서 그러하듯 가장 약자임에도 아무런 관심과 보호장치 없이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어려운 허들을 넘기 위해 매일매일 싸워야 한다.
보고서에 초록색 펜을 쓰는 건 이 정도 수준의 사회 부조리에 대한 한탄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건 목적 달성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잘못된 행동일 것이다) 아마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그들에 대한 측은지심, 나의 신입사원 시절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시작한 것일 테다. 하지만 한 끗 차이의 힘을 믿는다. 아 다르고 어 다르기를 바란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소소한 생각과 소심한 마음이,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 어딘가 내가 약자인 그곳에서 다시 한 끗 차이로 돌아올 것임을 믿는다. 그래서 난 오늘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사소한 마음을 담아, 주저하지 않고 과감하게 초록색 동그라미를 연거푸 그린다. ‘아이구 잘하네’
+작년에 쓴 글인데 이 글을 지금보니, 초록색 펜 사용빈도가 많이 줄어 반성하게 된다. 지금은 책상에 있는 펜중 가장 가까이에 있는 펜이다. 검정은 최소한 거르되, 파랑, 빨강, 초록 삼원색중 집히는 색이다. 빨강이 집히는 타이밍에 보고하는 팀원에게 괜스레 미안해진다. 초록색펜을 가까이 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