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을 때
최근 직장인 사춘기를 지나고 있다.(사춘기의 횟수로 보면 사십팔춘기 정도 되려나) 나의 사춘기는 대부분 회사나 조직이 비합리적이거나 비논리적인 상황들의 비중이 늘어나거나, 때론 걷잡을 수 없는 큰 힘으로 각 개인들을 좌지우지할 때 주로 발생한다. 경영기획관리를 하는 나이기에, 회사가 각 개인, 개별부서의 부분적 최적화나 부분적 합리적 상황이 전체최적화에 해가 되는 경우도 있음을, 이로 인해 우선순위를 조정하거나 한쪽을 강화, 약화시켜야 하는 때가 있음을 충분히 주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각각의 대상, 참여자가 합리적, 논리적, 상식적이라는 전제이다. 회사나 조직은 생각보다 그렇지 않은 힘이 강하게 작용하는 때가 있다. 좋은 게 좋다,는 말로 친분에 의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그저 개인의 취향이 회사전체를 뒤흔드는 결정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내가 열심히 준비한 회의에서 상대방은 시간 때우기로 왜 일을 벌이냐는 투로 나올 때도 있다. 이러한 일들만이 회사와 직장생활 전부를 채우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가 있다. 회사와 조직은 불합리하고 부조리함으로 넘쳐나는 것 같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만 같을 때. 지금 나에게도 사십팔 번째 그런 때가 와있다.
사실 이런 때를 잘 넘기는 방법은 아직 찾지 못했다. 아니 되려 해가 거듭될수록 어떤 의미의 좌절감이 더욱 커지는 것 같다. 연차가 쌓일수록 이러한 상황에 더욱 자주 맞닥뜨려야 하고, 더욱 강한 임팩트를 받아야 하기에 그럴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 숫자나 데이터, 논리적 분석, 보고가 주를 이루는 내 업무이기에 더욱 상반된 이러한 상황은 이해가 안 됨을 넘어, 사실 싫다. 매우 불편하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대충 넘어가, 좋은 게 좋다고. 이런 말이 제일 싫다.
지난주 최근 작고하신 서경식 교수의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이라는 책을 읽었다. 작가는 재일조선인의 삶 속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디아스포라에 대한 글로도 유명하지만, 문학,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여러 작품들을 잘 풀어서 이야기하는 분이라 가급적 그의 책이 나올 때마다 따라 읽어오고 있다. 오랜만에 읽은 이 책도 역시 예술이나 문학적 이야기가 중심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책 전반에 은퇴한 노교수가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박해, 트럼프집권(1기 집권) 등 마치 방향을 역행하는 듯한 세상 속 행태들에 대한 강한 탄식들이 담겨있었다. 그의 이전 글에도 이러한 경향은 있었으나 그 정도가 더욱 강해졌고, 이를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가 달라졌으리라. 그런데 한탄하고 좌절하는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어쩐지 힘이 빠진다기보다는 되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위로가 되었다. 아, 원래 그런 건가. 그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비해 비할 수 없이 작은 고민들이지만, 원래 세상은 부조리와 불합리들로 뒤엉켜있는데, 아쉬워하고 기운 빠져하는 건 당연한 건가. 그래도 되는 건가, 하고 말이다.
‘사람은 승리를 약속받았기에 싸우는 것이 아니다. 넘쳐나는 불의가 승리하기 때문에 정의에 대해 되묻고, 허위가 뒤덮고 있기에 진실을 위해 싸운다.(233쪽) 조직이나 직장 안에서 대단한 투쟁가가 되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부질없다는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의미가 없다는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고 말해주는 듯한 이 문장이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내가 하는 매일의 일상들이, 합리와 논리와 의미를 찾고자 하는 내 노력들이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님을. 작가의 고민대비 내가 껴안고 있는 문제나 고민들은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할지라도, 그럼에도 이에 위안받았다. 위안을 받아도 되나 싶지만 그랬다. 지금의 사십팔 번째 사춘기도 아직 지나가지 않았음은 물론, 앞으로 엄청난 수의 직장인사춘기들이 또 올 것이다. 또 실망하고 좌절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 문장을, 오늘의 이 글을 썼던 나를 떠올려보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 그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