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는 어릴적 한 번쯤은 읽어봤거나읽지 않아도 대충 내용을 아는체할 수 있는 책일 것이다. 마치 어린 왕자,걸리버 여행기, 로빈슨 표류기처럼. 분명 어릴 적에읽은 것 같은데 어른이 되어 제대로 찬찬히 읽어보면 어머, 이게 이런 얘기였어? 싶기도 하고.
나에게 이 책은 특별하다.
열 살 때였나.알고 지내는 어른들 중 가장 대단한 대학교를 나와서 동경의 대상이었던 막내 고모에게 놀러 갔다. 고모의 작은 방에는지나치게 큰 책장이 있었는데 빼곡한 책들 사이에서 마침 만화잡지에 연재되고 있던 만화와 똑같은 제목을 발견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만화로 본 그 이야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표지도 난해했고 어린이가 읽기에는 상당히 작은 활자였다. 하지만본인이 상당히 조숙하다고 여겼던지라 그 책을 빌려달라고 했고,고모는 네가 읽기엔 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고하며선뜻 빌려주었다.집에 와서 읽어보는데 어린이의 눈으로는 미처 다 이해하지 못할 내용도 많았고 잔인할 만큼 불행한 이야기에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들춰보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한 번씩 생각날 때마다 꺼내어 읽어 보곤 했는데 당시의 성장과 이해의 폭에 비례해서제제의 가난과 불행, 놀라운 상상력과 비참한 현실을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다.
제제는 읽을 때마다 다른 얼굴로 내 인생에 존재했다. 나는 쓸데없이 열심히 쓰던 일기장마다 밍기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는청소년기의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쏟아내곤 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이희재 작가님의 만화로 재출간된 책을 구했고, 2010년 동녘 주니어에서 완역본으로 출간된'초등학생을 위한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도 반가운 마음에 구입했다.
나에게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는아름답고 순수한 동심을 그려낸 동화가 아니라 인생에서 최초로 경험한문제작이었다.그래서일까. 지금도 어른들이 이 책을 초등학교 필독도서로 정하는 바람에 이미 필독이라는 단어에 기겁하는 아이들이 줄거리 요약본으로 찾아 읽고는 '불우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제제를 본받아야겠다'라는 영혼도 뭣도 없는 독후감을 쓴다거나, 독서골든벨 문제랍시고 '제제가 라임 오렌지 나무의이름으로 붙여준 것은?'를 내서 정답으로해맑게'밍기뉴'라는 이름을 흔드는 것을 보면 막막하고 서글퍼진다.
제제는 브라질에 사는 다섯 살짜리 아이다. 아버지는 실직자, 어머니는 방직 공장에 다닌다. 누나 둘에 형도 하나 있고 막내 동생도 있다. 이 집은 얼마나 가난한지 크리스마스 때조차 먹을 것이 없다. 제대로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누릴 것도 없는데 사랑도 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사고뭉치인 제제.제제는 놀라울 정도로 영리하고, 무한한 상상력을 가졌으며 그래서인지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제제는 이사 간 집 마당에 가장 볼품없어서 제 차지가 된라임 오렌지 나무에게밍기뉴_슈르르까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마음을 나누기 시작한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제제가 아버지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는 장면을 잊지 못할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아무 선물도 받지 못한 제제가 가난한 아버지를 둔 것은 불행하다는 말을 무심코 해버리는데 아버지가 그 말을 듣게 된다. 죄책감에 괴로운 아이는 종일 구두닦이를 해서 번 돈으로 담배를 사서 선물하고 마침내 아버지가 담배에 불을 붙이기를 기다린다.
86년. 동녘출판사 버전의 바로 이 장면...
만화에서 같은 장면이다. 참고로 원작에서 제제는 금발머리로 표현되지만 만화에서는 검은머리로 구현됨
2010년 동녘주니어 버전의 같은 장면
제제가 동생 루이스에게 공짜 장난감을 얻어주기 위해 먼 길을 걸어가는 장면도 가슴을 후벼 판다. 어린 동생은 힘이 들어 점점 발걸음이 느려지고 제제는 조바심과 불안함에 동생을 채근해보지만 정작 도착해보니 장난감은 이미 다 떨어져 버린 후였다. 실망하며 눈물이 고이는 동생을 보며 제제는 가슴아파한다. 이다음에 크면 꼭 멋진 차를 사줄 거라고 멩세한다. 사람을 죽이거나 훔치지 않고...(2005년 동녘 주니어 완역본에서는 죽이거나 훔치기라도 해서 라고 번역됨)
물질의 가난은 정신도 가난하게 하는 것인지 이 가엾은 가족은 서로에게 주로 가혹하다. 어린아이의장난에도 온몸에피 멍이 들도록 주먹을 휘두르고 저주를 퍼붓는 아버지와 누나. 지금 보면 참혹한 폭행이자신고해서 처벌받아야 할 아동학대다. 아무에게도 기댈 곳이 없었던 제제가 끊임없이 나무와 이야기하는 모습도 지금 보면 심리치료센터에 데려갈 일인 것 같다.그러던 제제가 진짜 어른의 역할을 해주는 뽀르뚜까 아저씨를 만나며가족에게서는 받을 수 없었던 사랑과 이해를 받게 되는데 이제야 좀 행복이 찾아오나 했는데 더 큰 비극이 일어나고야만다.
이 책의최초 번역가였던 박동원 님은 대학시절 조카들에게 읽어주고 싶어서 번역을 시작했다가 생각지 못하게 큰 사랑을 받게 되었고, 브라질로 유학을 가게 되는데 그때서야 작품 속에 나오는 배경과 문화와 실제로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그리고 2010년,현직 유일의 파롸과이 여성대사가 되심) 동녘 주니어에서재출간할 때도 직접 번역했고 에필로그를 읽으니한국에서 이 책이 이렇게많은 사랑을 받을 줄 몰랐다고 한다. 아마동녘의 전신인 광민사에서 출판해서 민주화 운동을 한 젊은이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한국인 특유의 예민한 감수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고. 번역을 하고 작품을 수없이 읽으면서 작가에게 이토록 감성적으로 쓸 필요가 있었는지 묻고싶다고도 했다. (저, 저도요...)
얼마전 열두 살 아들이 잠이 안 온다며(웬일로) 오밤중에 이 낡은 책을 꺼내 읽더니 연신 눈물을 훔친다. 왜 우느냐 했더니 제제가 동생에게 장난감 구해주려고 가는 길에 다리가 얼마나 아팠을지 눈물이 난단다.결국 동생이 장난감을 받지 못했으니 동생도 너무 가엾다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한다.
저러다 다음날이면 제 동생하고 살벌하게 싸워대겠지. 하지만 너는이제 제제라는 이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랬듯,제제의 세계는 그렇게 시작되니까.
고모에게 빌려온지 대략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돌려주지 못한, 이제는 손 때와 세월의 흔적에 너덜너덜 해진 이 책의 가장 뒷 장에는 '원시인에게 이 책을-고도로 진화된 원시인이. 86.6.6'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누구였을까, 86년고모에게 제제를 선물한 고도로 진화된 원시인님은.
늘 궁금했지만 물어본 적은 없다. 어쨌거나 그분 덕분에 열 살 때나 마흔이 넘은 지금이나 이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리우데자네이루 방구시의 작은 라임 오렌지 나무의 세계에 들어선다.
낡은 주머니 속이 불룩해지도록 구슬과 딱지를 가득 넣고서, 어딘가 한 두군데쯤은 짙은 멍으로 얼룩진 채,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작은 그 아이, 제제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