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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짜이 Dec 31. 2020

왜 나한테만 그래요

크리스마스이브, 긴급 돌봄 대상자로 하루도 빠짐없이 센터에 나오는 아이들을 위해 작은 선물을 주고, 보고 싶다던 '나 홀로 집에' 영화를 준비해서 함께 보았다. 고전이지만 요즘 애들에게도 통하는 재미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그만이다. 아이들은 집이 너무 부자다, 부럽다, 귀엽다 등등 떠들고 웃어대며 보는데 갑자기 4학년 남자아이가 동생들이 너무 시끄럽다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늘 나서서 떠드는 녀석이 그러는 게 우습기도 해서 "아이고, 네가 더 시끄러워. 오늘은 그냥 즐겁게 보자~" 한마디를 했다. 그러자 뾰족 눈이 되어선 큰소리로 하는 말.


"ㅆㅂ, ㅈㄴ 재수 없어. 뭔 상관인데!"


순간 귀여운 캐빈의 비명과 함께 정적이 찾아왔다. 아이들의 욕을 들은 것이 처음은 아니다. 아마 거의 매일 들었을 것이다. 저희들끼리 하는 이야기 속에 절반쯤은 욕이다. 주의를 주기도 하고 혼내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금세 사과한다. 돌아서면 또 그러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쁜 말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경멸을 한껏 담아 큰 소리로 욕을 한 아이는 처음이었다. 당황에 앞서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영화를 멈추고 혼을 내는데 혼을 내는 나에게 왜 나만 갖고 그러냐, 선생님이 먼저 날 기분 나쁘게 했다며 대들었다. 지면 안된다는 생각에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러다가 문득 다른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찌할 줄을 모르고 멈춰버린 영화와 나를 번갈아 보는 아이들... 가시 돋친 몇 마디를 더하고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빈 교실로 가서 홀로 앉았는데 뚝뚝 눈물이 났다. 2년 만에 처음으로 몰래 울었다. 너희는 아무리 잘해줘도 소용없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선물도 너만 안 줄 거야, 그렇게 다짐하며.

케빈이 드디어 엄마 품에 안기고 완전체가 된 가정의 행복한 크리스마스로 영화가 끝이 났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 가기 전 그 아이가 다가와 "선생님 죄송해요..." 하더니 도망치듯 사라졌다. 나누어준 선물을 손에 쥐고 가네.

그래도 내 맘 안 풀려. 절대로.


다음날부터 그 아이 괜히 내 앞에서 서성다. 괜히 큰소리로 인사를 하고 괜히 옆자리에 와서 열심히 공부하고, 괜히 간식도 가져다준다.

그래도 눈 마주치기 싫어, 안 잊을 거야. 혼자서 속으로 그랬다.

그러다가 이 책을 읽었다.


사회적 엄마의 사랑법.

오철수 시인이 지역아동청소년센터 선생님들과 시 쓰기 수업하며 엮은 책이라 한다. 아는 사람만 아는 이 상황이, 눈앞에 펼쳐진다.





나랑 똑같네, 우리 애들이랑 똑같네. 하면서 울다 웃었다. 엇나가는 아이의 존재는 정말 너무 어렵지만, 그 아이에게도 나의 존재는 어려웠을 것...


센터 아이들은 저마다의 감당하기 힘든 사연과 상처가 있고, 훈육을 넘어서는 양육이 절실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쉽게 이야기한다. 다시는 못 그러도록 혼을 내야지. 가르칠 건 가르쳐야지. 우습게 보이면 계속 호구가 되는 거야. 그러다 더 나쁜 길로 빠지게 될 걸.

그러나 이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늘 그런 이야기만 듣다가 온다. 어디 한 군데쯤은 따스하게 마음 붙일 곳이 있어야 한다. 전적으로 믿어주고 사랑해주고 편들어줄 가정의 역할을 해 줄 곳...



생활을 담은 글에는 존엄한 힘이 있다. 이 책이 바로 그랬다.

아이들을 그저 품어줘야 한다는데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조용한 위로와 함께 마음가짐을 새로이 하게 되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곧 길이다.라는 말처럼 아이들을 대하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란 생각을 해본다.


작년 내내 속 썩이다가 이제 센터 졸업하는 6학년 아이 내게 그더라.

에휴, 선생님 쟤들도 이제 철 들 거예요. 제가 봉사 와서 쌤 도와줄게요.

다음 주에 출근하면 그 아이 불러다가 이제 그러지 말자 약속하고 다시 잘해줘야지. 그날의 속좁았던 나에게 2020년의 마지막 날, 악수를 건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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