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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멜리 Oct 22. 2024

<마더> ‘마더’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되기까지

봉준호 감독의 ‘마더’ 찐하게 감상하기

나의 교양을 위해 들어갔다가
인생의 금기를 깨다

퇴근 후에 교양을 쌓고자 들은 강의. 착석하여 강의를 듣기만 했는데도 귀호강을 했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 각종 업무처리 독촉, 때론 민원, 출퇴근길 만원 버스의 시달림, 평화를 찾자고 들어간 단체에서 휘말리는 알력다툼의 소용돌이 등 거친 세상 속에서 살다보니 박물관에 온 것 같고, 미술관에 온 것 같고, 음악회에 온 것 같은 강의시간이 좋았다. 언어의 형태로 다가온 강의 시간 예술 이야기만 들어도 마음 속 갈증이 해소되고, 비워져있던 곳간이 채워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예술을 알게 됐다는 착각과 어딘가에서 그럴 듯하게 인용할 수 있을 법한 내용들을 알아가면서 교양을 쌓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어느날엔 예술로서의 영화 이야기가 들려왔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 ‘헤어질 결심’,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마더’. 영화 제목만 들었는데도 긴장이 되었다. 내가 선택하는 영화는 오락이자 즐거움이다. 평단의 찬사를 받았을지라도 어두운 현실을 다루거나, 공포심을 극한으로 몰고가거나, 잔인한 장면이 많은 영화는 기피한다. 세상의 그늘과 결합된, 알고 싶지 않은 불편한 상상력을 굳이 삶에 끌고 오고 싶지 않았다. 이미 나는 불쾌함을 겪을 만치 겪었으니 회피는 괜찮겠지.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 영화를 다루는 강의 시간 만큼은 텍스트 없이 설명만 듣기로 했다. 그러다 들린 단어 ‘구원’에 마음이 머물렀다. 영화 ‘마더’에서 구원을 다루었다고?  ‘마더’에 눈길이 갔다.

예술 분석을 위해 하나를 골라야 했을 때 가난한 삶에서 자신을 구원하는 글쓰기로서의 이청준, 구원의 세계를 다룬 ‘마더’를 놓고 고민했다. ‘마더’의 어두운 포스터에서 예측되는 음산함과 봉감독 영화 리뷰어들이 언급하는 ‘찝찝함’을 볼 용기가 없었기에 이청준으로 기울고 있었다. 보고서를 매우 늦게 내는 덕분에(!) 그로테스크까지 듣게 되었는데, 교수님의 그로테스크 설명을 들으며 계시를 듣게 되었다. ‘언제까지 고상한척, 가식적으로 살래. 이미 세상은 그로테스크였는데, 어두운 것을 직면하길!’

집으로 가면서 결심했다. “마더를 보자.”

앗, 이 순간에 내가 왜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영화 ‘프리티 우먼’에서 리처드 기어가 연기했던 에드워드가 고소공포증을 극복해냈던 그 씬 속의 주인공. 영화 내내 에드워드에게 고소공포증은 장벽이었는데, 마지막 씬에서는 높은 곳에 올라가도 건너뛸 수 있는 ‘허들’이 되었다. 사랑하는 비비안에게 프러포즈하기 위해 높은 곳에서 머뭇거리다, 심호흡 후에 한 발을 내디디고 높은 곳을 건너는 장면에서 고소공포증을 떨쳐내며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세계로 건너갔다. 에드워드처럼 나 역시 이 보고서를 쓰기 위해 내 두려움 하나를 허들처럼 뛰어넘었다. ‘구원’의 세계에 대한 ‘집착’과 이제 막 시작된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과 강의 내용에 대한 ‘신뢰’가 다른 세계로 건너가게 해준 것이다.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고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것은 이러한 계기로 오는구나.

‘마더’를 분석해보기로 하고 재생했다. 다른 세계로 건너왔다해도 초보인지라 극한의 모성, 살인사건, 이것이 구원으로서 무슨 의미가 있을지 궁금하면서도 잔인한 장면들을 눈감지 않고 감상해낼 수 있을 것인지, 초조한 마음은 있었다.  

아래부터는 마침내 내 안의 금기를 해제하고 예술로서 바라본 영화 ‘마더’가 어떤 구조에 의해 구원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지와 이러한 영화 감상 경험이 감상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신성한 모성

본인은 오랜 가톨릭 신자이다. 가톨릭 종교에서는 신인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오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예수를 잉태하고, 한평생을 지켜주고 바라본 어머니 마리아를 존경한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존경의 표시로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인사하고, 기도를 한다. 신자들은 묵주의 기도를 많이 한다. 묵주의 기도는 성모 마리아의 시점에서 기도를 하는 내용으로, 기도 내용의 주인공은 예수님이다. 가톨릭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부터 부활, 승천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예수님 어머니의 입장에서 바라본 내용을 묵상한다. 묵주의 기도를 하다보면 마치 영화를 보는 듯 눈앞에 그려진다.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시선에서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옆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묵주의 기도는 어머니의 입장에서 찢어지는 마음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기도를 하는 관점인데 가장 처절할 수밖에 없는 시점으로 가톨릭의 매우 큰 사건인 부활과 승천을 보여준다. 기도가 만들어진 의도대로라면 신자들은 이 기도를 하는 동안 어머니의 고통까지 더해져 몇 배로 신음하게 될 것이며, 몇 배로 영광스런 감격을 할 것이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종교에서는 모성을 신성하게 보았다. 평생 따뜻한 시선으로 자녀를 지켜보며 가시밭길을 걷는 선택을 행해도 함부로 조언하지 않고 묵묵히 옆을 지킨 어머니, 성모 마리아는 신성한 어머니로서 가톨릭신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김혜자 배우는 ‘국민 어머니’로 대중들의 이미지에 따뜻한 어머니로 굳어져 있다. 김혜자 배우에게 치맛바람, 헬리콥터 맘 등은 어울리지 않는다. 김혜자 어머니는 집에 가면 항상 따뜻한 된장찌개를 끓여놓고 기다려주고, 자녀에게 다정하고 항상 인자한 모습으로 자녀가 어떤 선택을 존중하고 지켜줄 것만 같다. 한국의 모성을 대표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지고지순한 육아부터 성인이 된 자녀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는 어머니상을 만들어온 김혜자 배우, 이 분은 한국 어머니 이미지의 전형일 것이다. 성모마리아의 모성처럼 신성한 모성으로 자리잡은 것도 있지만, ‘마더’에서는 모성에 ‘본능’을 붙여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마더’에서는 어머니의 시점에서 아들의 사건을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의 고통을 한평생 바라보는 어머니의 고통을 마주한다. 마치 묵주의 기도처럼 어머니의 입장에서 아들을 바라보게 된다. 어머니의 모성본능을 자연스럽게 기대하는 관객은 아들의 고통을 어머니처럼 신음하며 안타깝게 바라본다.

모성본능을 보여주는 ‘국민 어머니’ 배우

‘마더’에는 제 앞가림 못하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평생을 모성본능을 발휘하며 살아온 어머니가 등장한다. 아들은 지적장애가 있고 백수로 지낸다. 아들이 이렇게 사회적, 인지적 지능이 떨어진 원인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약재상을 하며 평생을 아들 뒤치닥거리를 해주고 있다. 어느날 마을에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현장에서 발견된 아들의 이름이 써있는 골프공이 발견되면서 아들이 구속된다. 엄마는 순진한 아들이 누명을 썼음을 확신하고, 경찰이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아들을 구하기 위해 발벗고 나선다.

영화는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끈질기고도 억척스럽게 분투하는 국민 어머니 배우의 모성본능 연기를 보여준다. 아들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사건을 맡은 형사 제문의 차에 올라타 조사를 잘 해달라고 제문이 좋아하는 약재를 검은 비닐봉투에 주며 뇌물을 써보려고 했지만, 이미 끝난 사건이라는 말에 앞이 막막했다.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형사들이 탐문수사나 과학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현장에서 발견된 ‘도준’이라는 이름이 쓰인 골프공 하나만 갖고 용의자가 된 도준이를 데리고 간다. 폭력적인 심문이 있은 뒤로 그는 곧 수감되었다. 영화 속 세상은 도대체가 믿을 수 없는 곳이었다. 엄마는 도준이에게 면회를 가서 ‘아무도 믿지마, 엄마만 믿어’라고 하면서 아들을 구하려한다. 도준에게 믿을 사람이라고는 엄마 하나뿐인 세상이다. 이제 관객에게 믿을 사람은 모성본능을 완벽히 보여주는 국민 어머니 배우뿐이었다. 누명쓴 인물들의 무고함을 밝히는 작품들 결말이 관객에게 시원한 통쾌함을 선사했듯이, 국민 어머니는 통쾌함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영화평론가 이동진(2020)이 지적하듯 봉준호 감독 작품  ‘마더’는 변곡점이 있는 영화였다. 우리가 아는 신성한 모성을 다룬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뒤틀려 있는 모성본능을 보여준다. 그러한 영화 속 장치는 그동안 김혜자 배우가 연기한 국민 어머니에게 볼 수 없었던 눈빛 연기였고, 그것은 어숙룩함과 동시에 나타나는 광기를 보여주었다.

마더(영화 속 엄마를 ‘마더’로 쓴다.)는 피해자의 장례식장에 가서 친척들이 눈을 부라리며 때릴 듯 다가올 때에도 자기 아들이 그러지 않았다고 희번덕거리는 눈빛으로 소리지르고 소란을 피운다. 따귀를 맞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우리 아들 ‘괜히 미워했단 봐’라고 큰 소리치며 그 자리를 떠난다. 곧바로 립스틱을 고쳐바르는 손거울 속의 눈빛이 국민 어머니가 맞는가 여겨졌다. 마더는 동네에서 잘나가는 변호사를 찾아가 식사대접을 하며 아들의 변호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모습이 모성본능의 신성함을 뒤틀게 되는 시작처럼 느껴졌다. 아들을 곁에서 보호해주는 친한 친구인 진태를 의심하여 그의 집에 몰래 들어가 요리용 비닐장갑을 끼고 혈흔 증거가 묻은 골프채를 찾아 간신히 나왔을 때에도 비일상적인 모성본능에 움찔하였다. 상황을 해결해나가는 마더의 어수룩하고도 광기에 가까운 모습에 어느덧 응원하기보다는 심리적 거리를 두게 되었다. 영화를 보면서 국민 어머니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더는 나의 예상에서 한걸음씩 떨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류에 의해 고착화된 ‘신성한 영역에 가까운’ 국민 어머니가 아니라 오로지 자식을 지켜야한다는 광기에 가까운 모성본능으로 가득한 마더를 보게 된다. 마더는 가까스로 용의자를 알아내고 찾아간다. 하지만 용의자로 생각했던 그를 통해 아들의 범죄 사실을 알게 된다. 마더는 충격적인 진실을 대면하자마자 목격자를 죽이고 그 집에 방화까지 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 마더가 충동적으로 저지른 잔인한 행동, 스패너를 들어 때려 죽이는 장면, 이후 사건을 덮기 위해 피를 닦는 것을 시도하다가 방화를 하며 빠져나오는 침착한 행동들이 아들을 지켜내려는 모성본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에 생각이 마비되었다. 마더의 시점에서 아들 도준이를 바라보았던 나도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마더는 그 시간 소나무숲에서 멍하니 앉아있다.

질문이 생겼다. 종교에서 신성한 영역이었던 모성을 모독하는 것인가? 자기 아이만 생각하는 협소한 모성에 대한 반성이었을까. 아니면 사회에 던지는 질문으로 인간의 모성을 신성한 것으로, 위대한 것으로 묶어두었던 시선을 거두라는 의미일까.

춤의 역할

마더가 방화를 하고 걸어나온 뒤 만나는 갈대밭은 영화의 첫 장면에서 나왔던 곳이다. 첫 장면에서 ‘국민 어머니’가 아름다운 갈대밭에서 유행에 뒤쳐진 옷을 입고 멍한 눈빛으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춤을 췄다. 너무 강렬해서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영화의 이야기가 거의 끝을 달리고 있을 무렵, 다시 갈대밭에 서 있는 그녀는 극단의 모성본능을 보여준 마더였다. 이 곳은 첫 장면의 그곳인데, 갈대 밭에 서 있는 국민 어머니를 처음 만난 그 장소였다. 감독은 마치 같은 배경의 인물을 보여주면서, 내가 알고 있는 엄마가 그러한 엄마가 아님을 알았지? 하고 한번 더 확인시켜주는 것 같았다. 타임슬립이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범죄를 저지른 후 춤을 추었던 장면을 첫 장면으로 보여준 것인가 생각하면 사이코패스처럼 느껴질 수 있다. 사람들은 첫씬과 마지막 씬의 춤 장면을 해석하면서 구원의 춤이라고 속삭이고 있지만 나는 영화 속 문법 장치를 생각하며 첫 씬은 마더의 소개 장면으로 해석해보고 싶다. 감독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면, 갈대밭의 장면을 두 개로 나누어 인지적 충격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나의 감상이 그러했다. 국민 어머니의 멍한 눈빛의 춤을 보여주며 인물 소개를 하는 것으로. 첫 장면에서 당신이 알고 있고 프레임 씌워놓은 ‘국민 어머니’는 실은 ‘마더’이고, 감독인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 갈대밭의 ‘마더’를 바라보며 당신 역시 마더일 수 있음을 알게 될 거라고 말이다. 첫 장면은 춤보다는 같은 배경의 마더를 시간차를 두고 바라보았을 때 나(관객)의 변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한다.

니체가 말하는 예술의 구원 경험

마더가 방화 현장에서 빠져나와 갈대밭에 도달했을 때,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피묻은 손을 줌인으로 보여주는데, 마치 내가 내 손을 보듯 그려진다. 영화 내내 마더의 시점으로 아들을 구하기 위해 계속 바라보고 있었으니 그 손은 내 손이기도 하다.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당신은 당신 손에 피 묻힌 적 없었나? 이 질문에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 것인가? 내 안으로만 질문한다. 나는 내 손에 피묻히지 않고 살아왔었던가? 종교적으로 말하면 나는 죄를 많이 지었다. 가벼운 것이든, 무거운 것이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가장 신성한 본능이라 믿어왔던 모성본능조차도 극단으로 비틀려 죄를 짓는다는 사실에 태어난 인간은 죄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해석이 된다. 모성본능이든 어떤 본능이든,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한 행동이 죄를 지었다. 영화는 극적인 장치를 위해 가장 극단에 있는 죄를 그려냈지만, 현실의 나 역시 죄를 짓는다. 가톨릭 신자인 나는 성당에 가서 고해소에 들어가 죄를 고백하고, 신께 죄 사함을 받고 다시 세상에 나온다. 이 경험이 나를 다시 잘 살아가게 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죄 많은 내가 죄 사함을 받지 않고 살아왔다면 죄의 무게가 덜어지지 않아 결국 될 대로 되라에 이를 것이다. 그래서 죄를 씻어내면서 다시 잘 살아보자는 이 경험이 구원이고, 갱신이다. 종교에서 하는 의식-내 종교에 따르면 미사, 기도 및 묵상-는 이 구원의 경험을 최소 일주일에 한번씩 갱신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과거에 가졌던 영향력을 더이상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시대진단이라고 한다. 니체는 그리스도교처럼 인격신을 믿는 종교가 근대 과학의 발달과 함께 설득력을 상실하여 종교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와 방향을 제시할 수 없다고 느끼고  예술에서 구원을 찾고자 했다.(박찬국, 2023;p40)” 과학의 시대에 더이상 신에게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면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니체는 종교가 힘을 쓸 수 없는 시대에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을 통해 신화의 세계를 여전히 체험해야 한다고 밝혔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도취는 자신의 개체성을 망각하고 개체가 경험하는 힘의 강화와 고양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도취 상태에서 인간은 충만해진 덕분에 자신이 바라보는 사물과 세계를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고 했다.(박찬국, 2023; p189~190)”

마지막 관광버스 속 ‘구원의 춤사위’는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이 가리키는 도취를 의미한다. 마더는 자신만이 아는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혈자리’에 침을 꽂고 춤을 추는 장면에서 미친듯이 음악에 몸을 맞춰 추는 관광버스 춤이 도취에 이르게 할 것임을 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이미 춤추고 있던 다른 여자들에 섞여든 엄마가 망각의 손을 위로 올려 흔드는 마지막 장면은 가장 속된 몸짓으로 가장 성스러운 제의를 치르는 것처럼 보인다.(이동진, 2020; p231)” 춤을 추며 종교적 체험인 구원에 이르는 길에 도달할 수 있음을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을 통해 니체는 밝혔다. 영화 마더는 누구에게나 구원에 이르는 방법인 ‘나만 아는 혈자리’가 각자에게 존재한다고 속삭인 것이 아닐까.

나약한 내 내면을 사로잡는 구원물


영화를 분석할 줄 모르는 초심자라도 알아들을 수 있게 보여주는 ‘마더’를 감상할 수 있어서 봉 감독님과 내가 듣고 있는 예술의 이해 수업에 감사했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음악과 갈대밭의 색조 속에 국민 어머니의 춤장면은 충분히 감각적이어서 처음부터 강렬했다. 이후에 나오는 장면들도 분석능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어 놀랐다.

갈대밭 춤 이후 곧바로 나온 장면은 아슬아슬한 마음을 갖게 하여 마더를 중심에 놓는다. 소중한 아들을 문밖으로 두고, 약재상에서 약재를 자르는 일을 하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아들의 조심성 없는 행동을 보며 무슨일이라도 날까, 칼날 사이로 점점 손이 가까워지며 아슬아슬한 작두질을 한다. 이윽고 찢어지는 듯한 차 바퀴 소리와 칼날에 손을 베이는 엄마의 손가락, 이 둘이 동시에 일어나며 영화는 마더의 시점으로 도준을 바라보게 하며 영화를 보는 관객이 마더 옆에 서게 했다.

영화는 어두웠고, 찜찜한 감정도 느꼈지만, 마지막 장면에선 춤의 의미나 망각의 혈자리 해석을 몰라도 아름다운 장면을 보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영화를 보며 일차적으로 감정을 느끼고, 이차적으로 자세한 분석을 통해 의미를 건져올려낼 수 있었다. 전문가의 감상 자료를 읽으며 참고는 했지만, 감상자인 나의 시선에서 사고하며 분석하다보니, 내 경험에서 뽑아올린 해석이 ‘구원’을 중심에 두고 종교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찜찜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범죄현장을 앞에 두고 대화하고 커피를 마시는 형사들의 무심함과 진태가 고등학생 애들을 대하는 폭력성이 짙은 부분, 진태 집에서 성적 장면의 관찰 등이었다. 이 부분이 없으면 마더의 마지막 감정은 (감동이라고 표현하지는 못하는데) 딸려나오지 않을 것인가. 아직 분석하지 못한 부분이다. 소거해놓고서 영화가 나온다면 개연성이 부족하거나 재미가 없는 것일까 생각하다가 이러한 디테일조차도 그냥 존재하지 않는다는 봉감독님 영화인데, 이렇게 내가 느낀 감정을 토대로 분석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초심자라 시간이 오래 걸려서 남들의 해석을 읽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온갖 사회적 문제점들이 드러난다. 장애인의 성, 학교폭력, 미성년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세상 등. 진실과 마주하자면 찜찜한 것도 불편한 것도 보아야 한다는 점을 되새긴다. 또한 세상은 그것을 견뎌낸 사람들이 깨끗하게 지켜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에 힘겨워할 때 성경에서 위로할 때 주는 말 중에 “신은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 주신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위로라기보다는 그러니 지금의 고통을 너는 넘길 수 있다는 긍정(!)의 표현이었다. 또 그 말의 의미는 고통이 클수록 네가 큰 그릇이라는 뜻이라는 표현이기에 너의 고통이 너를 큰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로서의 영화를 통해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는 경험을 했다. 내가 그동안 기피했던 영화 혹은 예술을 통해 내 자아의 깊이와 폭을 키워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영화를 볼 때 즐거움만 찾아야했던 내가 영화 의미분석을 하며 나에 대해 생각했다. 사회가 씌워놓은 프레임에 속박되어 있었던 나, 본능적으로 행동하면서 짓게 되는 죄, 고통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구원을 위한 몸부림으로 종교에 다시 의지하려고 했던 나를 생각했다. 영화에서 보았던 그 장면처럼 나도 종교에서 춤을 추며(노래하고 마음으로 춤추며) 고백하고 망각하면서(나만 아는 혈자리) 이렇게 하루하루 갱신하며 살고 있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어떤 예술이 잔인하게 표현되고 찜찜하게 그려지는 것은 그 방법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도리가 없는 그로테스크한 세상이기 때문이겠지. 인간을 이해하고, 세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예술가들을 만나야하겠지. 예술의 이해와 분석 수업에서 충만해지는 이유는 지적인 내용 축적으로 교양인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약한 인간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우리가 살아나가는 힘을 갱신시켜줄 예술을 만나 도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전에 접하지 않았던 예술가들의 작품을 만나 진작에 있었지만 들어가본 적 없는 깊은 곳에 발에 내디딜 수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고양된다.


참고자료

이동진(2020), 위즈덤하우스, 이동진이 말하는 봉준호의 세계

박찬국(2024), 21세기북스, 내 삶에 예술을 들일 때, 니체

이동진(2019), 위즈덤하우스,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교양을 쌓고자 퇴근 후에 들은 수업이 이 글을 쓰는 큰 동기였습니다. 이 수업이 나를 키워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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