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을 배우니 보입니다
1월 1일, 새해 들어 결심을 하나 했다. 종교생활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것이었다. 가족 전체의 입교로 시작된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의 종교생활은 어린시절의 문화로 자리잡았고, 조금씩 신앙심을 키워가며 남부럽지 않을 신앙의 깊이와 교리의 배움으로 교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사춘기부터 20대 중반까지 이어진 자아와 세계와의 투쟁에서 번번이 질 때마다 종교를 통해 구원받았다. 어린시절, 삶의 팍팍함은 어린 나를 죄어왔지만 종교가 버틸 힘을 마련해주었다. 내게 종교가 없었으면 그 시절을 어떻게 넘겼을 지는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종교의 방식으로 기도하고 회개, 해결하며 살아왔다.
이렇게 개인사에서 중요한 종교를 갖고 있었지만 어느 때부터 점차 멀어지더니 종교는 마음속에만 아련하게 존재하고, 유럽의 여행지에서 성당을 만날 때마다 거대 문화권의 일원인 듯 반갑게 추억을 떠올리고, 새로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의 물꼬를 트다가 우연히 종교를 묻다보면 곧 이어서 세례명을 묻는 요식행위 속에서 희미하게 나타났다가 대화가 끝나면 종교에 대한 생각은 이내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면서 점차 내 의지의 힘을 넘어서는 감당할 수 없는 사건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점차 세속적인 욕망 속에서 변해가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신물이 나올 때가 있었다. 종교를 통해 구원받았던 어린시절, 신앙심을 키워가며 내 속의 성스러웠던 구역을 회복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몇 년 전부터 해오던 종교생활을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성탄절에만 발동하는 결심과 단발적인 실행능에 번번이 습관을 탓하다가, 드디어 종교생활에 다시 뿌리내리기 위해 무언가에 소속되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성가대의 문을 두드렸다. 나를 묶어놓고 싶었다. 그래서 들어간 성가대에서 주선율을 부르며 천사의 목소리를 내고 싶은 생각에 소프라노를 바랐지만, 소망은 이루지 못했다.
첫 인사를 하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토 파트로 이끌려 그곳에서 배우지도 않은 악보를 보는 것과 음을 하나씩 연구하면서 노래해야하는 노력없이는 하기 힘든 성가대 합창이 시작되었다. 그러다보니 악보를 봐야했고, 화음을 떠올리며 불러야했다. 하지만 1,2월 두 달 동안, 예전의 신앙의 마음이 어딘가에서 발현되는 듯했다. 신의 영토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고, 미사 때마다 종교적 열망을 표현하고 싶었다. 아름다운 화음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몇 시간의 노력도 신앙의 힘으로 한다고 생각하면 아깝지 않았다. 노래를 부르는 두 달 동안 주의 영토에 살고 있는 내 자신을 기특하게 여기기도 했다.
클래식을 알려주시는 덕분에…!
내 개인사와 맞물려 깊이 있는 이해를
음악 감상 위주의 편안한 이야기 듣기를 기대했지만 이는 인문사회적 접근으로서의 진정한 ‘이해’임을 알게 되었다. 교수님의 오랜 연구와 해석으로 듣는 알찬 내용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고결함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를 알고 삶에 접목하여 사색하는 시간이 되었다. 때마침 오랜 숙원이었던 종교생활로의 복귀와 성가대 활동으로 종교 음악인 성가가 만들어진 배경을 듣게 되었다. 터너 미사곡으로 키리에, 글로리아, 쌍투스, 베네딕투스, 아뉴스데이 외에도 특송곡을 날마다 두세 시간씩 들으면서 연습하던 시기라 바흐의 종교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는 나의 개인사와도 맞아떨어졌다. 4부 합창의 조화와 성스러운 합창곡에 발을 디딘 내게 라이프치히 교회에서 27년 동안 근무하면서 작곡했던 바흐라는 종교계의 중요한 작곡가의 이름을 들으면서 더욱 더 내 결심과 실행한 것을 잘했다고 속으로 외쳤다.
바흐의 시대적 숙명과 그를 위해 했던 작곡이 의도하지 않게 인류에게 오랫동안 교회의 지배에 놓이게 했던 비밀을 알게 되었다. 막연히 바흐 음악이 성가에 나올 때면 성가대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바흐의 의도대로 표현하는 것에 치중하였지만, 수업을 통해서 알게 된 내용은 바흐는 정치가의 의도에 따라 조화로운 교회 음악을 작곡하며 신의 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세종대왕이 국악의 기초를 닦은 박연을 통해 이후 음악은 백성들의 조화로운 마음을 위해 작곡되었다는 점과 다르지 않다. 음악이 통치의 수단으로써 잘 쓰였다는 점이다. 종교가 왕정과 분리되기 시작했던 때였지만, 여전히 교회는 피지배자들을 다스리기 위한 중요한 곳이었다. 바흐가 살았던 라이프치히 지역과 시대가 원했던 음악이 루터파 교회의 음악으로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음악이었다는 것, 그에 따라 신에 대한 순수한 종교적 마음과 정신을 성가를 부르며 표현될 수 있도록 하는 음악을 만들었다. 교수님께 들었던 설명을 그대로 적어보면 ‘루터파 교회는 세속의 고단한 삶을 교회에 와서 음악을 들으며 지상에 있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음성을 닮은 음악 소리를 들으며 사무치게 회한이 들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교회음악을 만들었다.’ 이러한 내용들을 들으니 흥미로웠다. 바흐가 그 시절 만들었던 음악적 목표가 천상의 소리였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지상의 힘들었던 삶을 교회에서 미사를 드리면서 듣기만 해도 눈물이 흐르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을 조화로운 선율에 담았을 것이다. 삶이 힘들수록 이러한 말과 음색에 더욱더 반응할 수밖에 없다. 경험상.
바흐의 세계를 들으면서 음악을 이해하는 깊이라는 것은 이래야하는 것임을 교육받으면서 잘못된 정보나 홍보 문구 혹은 대중적인 지식의 눈높이에서 머물러있던 사람으로써 기쁨이 느껴졌다. 클래식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바로잡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특히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수업에서 중요하게 다루던 파트가 시대사, 정치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서술이었기에 역사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훨씬 더 관심있게 들었다. 내가 갖고 있던 편협한 애정들이 부끄러워졌다. 바흐라면 우연히 집안에 먼지 쌓여있던 CD를 꺼내 들었을 때, 마음이 맑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아 자주 들었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의 작곡가, 아침에 찌푸둥한 몸을 깨워주는 산뜻한 음악으로 내겐 익숙하다. 친구 중에 바흐의 무반주첼로곡에 마음을 뺏겨 나에게 추천하면서 들어보기 시작했던 곡도 있어서 단선율로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아름다운 선율이 가능함을 알게 해주었다. 바흐의 성가는 내게 담백하면서도 과하지 않고 아름다웠다. 이후 수업 시간에 다른 시대와의 비교를 통해 음악에 격정이나, 광기 없이 이성과 절제, 조화의 미가 느껴졌다. 예술에 필요한 격정은 그 이후 시대에 베토벤과 쇼팽, 모차르트를 통해서 표현되었지만, 음악 형식을 만들어낸 음악적 질서의 아버지 바흐에게서는 질서정연한 음악의 세계를 보는 듯하여 산뜻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내가 이전에 느꼈던 음악적 감상으로만 바흐를 바라본다면 부족할 것이다. 바흐가 살았던 시대는 십자군 전쟁과 종교개혁, 페스트가 앗아간 영혼들, 남아 있는 자들의 위로와 남겨진 자들이 새롭게 살아갈 힘을 끌어내줘야했던 시기이다. 정치는 이들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교회음악이 필요했다고 한다. 바흐는 날마다 작곡하고, 지휘하면서 교회에 온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와 이웃과 가족의 죽음 앞에서도 살아내도록 하느님의 어린양을 향해 신앙 고백을 하며 구원을 비는 선율을 푸가로 이끌었다.
B단조 미사곡에서 첫 시작은 미사 예식에서 보는 자비송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kyrie eleison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말만 되풀이되지만, 10분 동안 선율이 만들어내는 천상의 소리는 듣자마자 성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바흐는 우리의 마음을 진심으로 달래주고 있는 듯하다. 성가대에서 악보를 한글 배우듯이 하나하나 익혀가면서 보았던 터라 유튜브에서 B단조 미사곡의 키리에 엘레이손 악보를 보며 음을 살펴보았다. 바흐 미사곡의 푸가 진행 분석을 해주는데, 4성으로 진행되는 푸가인데 자연스럽게 하모니를 이루어 천상계의 음처럼 아름답게 울려퍼지는 것에 감탄을 하였다. 더불어 우리 비전문가 성가대가 이것을 표현하려면 굉장히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감상으로만 가능한 영역이구나 싶었다.
성가대에서 2-3월에 내내 터너 미사곡을 연습하고 간절한 기도 섞인 합창을 했기에 B단조 미사곡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솔직히 베를린 오페라하우스에서 들었던 B단조 미사곡은 성가대 활동하기 전이었는데, 전혀 이해하지 못해 시계만 쳐다보았던 기억이 있다. 선율을 통해 세상을 위로하고자 했던 정치가와 그의 부름에 응답하여 지상에 울려퍼지는 기도의 음악을 만들어낸 그 시대엔 더 강력한 음악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종교가 없어도, 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도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이 되었고, 마음을 울리는 이 소리가 천상의 소리처럼 인간의 성스럽고 고결한 마음을 알게해주는 듯 파고들 수 있는 것 같다. 바흐 시대에 종교의 부름에 응답하여 만든 음악이 지금의 시대에도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치유의 음악으로 불리며 종교에서도 개인적으로도 사용되고 있을 것이다.
성부가 각자의 소리를 내면서 화음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바흐의 미사곡에서는 격조높게 표현되어 있었다. 이러한 음악을 아무리 듣고 감상해도 그대로 있으면 신이 해결해줄 수 없다. 종교로 회귀한 나는 종교의 위로와 방법으로 내 안에 있는 영성을 키워가려고 노력한다. 기도를 하며 영적인 힘을 키워나가 내 스스로의 힘을 믿고 스스로 해결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 내 안의 신을 –가톨릭의 신을 모시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 음악 중에서도 바흐의 종교음악이 인간 내면을 이해하고 영적인 부분을 발전시켜주는 매우 영향력 있는 음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흐의 미사곡을 듣고, 다른 작곡가들의 성가를 부르면서 내 안에 계신 신을 느끼게 된다. 신에게 모든 것을 해결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영성적인 삶, 성찰하는 삶을 살기 위해 내 안의 신과 대화하는 시간이다. 사회적 인간으로서 의미있는 삶을, 인간다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나 자신의 지향을 잊지 않게 해도록 청하고 있다.
2000년대에 사는 나는 바흐 시대의 문화적 유산의 덕을 본다. 사사로운 내 고민을 해결하거나 참다운 인간으로서 지켜내야할 것들에 대한 안이한 유혹에 빠질 때마다 고전작품을 통해 위로받고, 고양시키며 살고 있다. 성가대 활동을 하면서 내 안의 영적인 부분들이 채워졌지만 클래식의 이해 수업을 들으면서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음악의 역사를 들으며 무신론으로 빠지지 않고, 인간의 영적인 부분을 인지하고 종교에서 키워나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흐의 미사곡이 천상의 목소리를 인간이 낼 수 있음을 알게 해주었지만, 종교를 떠나서 인간은 영적인 것들을 바깥으로 표현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인간에 대한 이해도 가능해졌다.
지난 해 B단조 미사곡이 펼쳐지는 음악홀에서 꾸벅꾸벅 잠들었던 경험이, 성가대 미사곡을 통해서 음악의 기능을 깨닫게 되고, 바흐를 배우면서 바흐 시대가 남긴 유산을 통해 무엇을 채워나가야할지 알 수 있었다. 니토록 내게 영감을 주는 시간은 오랜만이다. 이래서 우리는 배움으로써, 앎으로써 더 풍요로워질 수 있구나 싶었다.
직장 근무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강의를 들었지만 내용을 들으면 늘 정신이 맑아졌다.
이 세계에 들어온 후 더 머물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