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이론을 공부하며 깨닫는 역사, 추모 교육
초등학교 교실에서는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것들 중에 계기교육이 있다. 중요한 날에는 관련된 설명을 해준다. 설날과 추석, 정월대보름, 단오 등의 명절과 기념일이자 공휴일의 계기교육은 이루어지고 있다. 삼일절, 개천절, 한글날, 광복절 등 해마다 학년에 맞게 설명을 해주며 반복하되 수준이 점점 달라진다. 그러나 계기교육 중 근현대 역사적 기념일은 역사 수업을 하는 때에 하거나 교과서로만 하는 학급도 있다. 그 중 제주 4.3 사건, 4.19 혁명,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초등학교 고학년 교실에서 역사 교육 시간에 배우는 편이다. 이렇게 날짜가 있는 것도 교과서의 시간에 맞춰 다룬다.
이와 달리 4월 16일은 교과서 속에 없는 날로, 저학년이든 고학년이든 생각해보는 시간을 최소 두 차시 정도 가질 수 있다. 그 전 학교에서는 그랬다. 담임 교사의 재량에 달려 있다. 2024년 4월 16일 세월호 추모 10주기가 되었다. 그 전 학교에서는 세월호 참사 추모를 하는 학급이 많아서 게시판 여기저기 노란색 물결이었다. 이번에 새로 옮겨온 학교에서 올해 아이들과 세월호를 추모하는데, 이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아이들도 꽤 있었다. 어렴풋이 들은 아이들도 있었고, 몇 차례 부모님들에게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도 있었다. 2012년생인 이 아이들에게 세월호 참사 추모를 하는 것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했다. 그 전에는 해마다 하는 활동이었기에 아이들도 추모하는 데 따라주었지만, 이번 학생들에게는 일단 설명부터 시작해야 했다.
“얘들아, 오늘은 2014년 제주도를 향해 가던 거대한 배가 침몰하면서 그 안에 타고 있던 304명이 목숨을 잃은 날이야. 2014년 이후 이 날이 되면, 해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잊지 않겠다고 하고 있어. 나는 해마다 이날에 우리 반 학생들과 활동을 했어. 그 이유는 국가에서 구할 수 있었는데 구하지 못했던 날, 그 주변에서 우왕좌왕하면서 소중한 생명들을 구하지 못했던 날, 안전하지 못한 한국의 모습을 보여준 날, 어른들이 착하게 자라라고 해서 질문하지 않고 착하게 말 듣던 아이들이 하늘로 돌아간 날, 승객들의 대피로를 책임 지지 않고 자기 먼저 구조된 사람들이 있는 날, 희생된 대부분의 학생들이 한 학교의 수학여행 가던 학생들이었기에 한 학교와 한 동네가 같이 침몰한 날을 우리가 잊지 않아야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어른으로서 책임을 인식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교사인 나도 해마다 결심하는 날이라는 의미로 이렇게 해마다 추모를 한단다.”
그리고 이어지는 교육활동은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이 말씀하신 비판의 교육현장의 모습이다. 강의 중에 들은 그런 활동을 한 교사가 바로 나여서 얼굴이 붉어졌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의 뉴스 보여주고, 다큐멘터리 편집된 것을 보여주며 드라마틱하게 하는 것, 그런 것 하지 말아야죠.’
그러나 나는 해마다 그렇게 했다. 그 후 아이들에게 쏟아지는 눈물, 볼 때마다 나 역시 눈물이 나는 그 뉴스와 영상을 본 이후에 후속활동을 한다. 어느 해에는 ‘잊지 않겠습니다’ 등의 말로 7행시 짓기, 노란 리본 묶기, 편지쓰기 등을 했고, 올해는 세월호에 노란풍선을 달아서 희생당하신 분들을 위해 편지를 써 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 활동 아이디어는 내가 속한 모임에서 소개해주셨는데, 그동안 보았던 노란 나비, 노란 리본, 노란색 고래 이미지와 달리 올해는 새롭게 세월호를 띄우는 것이어서 의미가 있다는 생각에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보았다.
교육을 하는 동안, 그동안 우리반에서 조금 얄미운 행동을 하던 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가장 애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나중에 내게 와서 세월호 추모활동처럼 우리 반에서 특별한 날들에 관하여 알아보고 추모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건의(!)도 했다. 그것이 어떤 날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에 관심이 많은 학생으로 기억이 되었다. 우리반 24명 모두가 교사가 원하는 방향, 혹은 원하던 깊이의 추모의 시간이 되기를 바라지만, 처음인 학생, 어렴풋이 아는 학생, 몇 차례 추모를 해본 학생들이 있는 이 교실에서 큰 욕심 내지 않고 4월 16일을 보냈다.
교수님의 지적이 마음에 걸려 정동 이론과 사회적 참사, 재난의 기억과 애도를 주제로 보내주신 연구논문들을 읽고, <소년이 온다>를 분석해 보기로 하였다. <소년이 온다>를 읽고서 광주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 <택시운전사>와 비교해보기로 하고 시작하였다. 정동이론에 대한 처음 들어보는 내용이라 낯설었기에 아직도 이해가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10년 전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겨우겨우 읽으면서 강의를 들었던 경험이 강의 속, 정동 이론 논문 속에서 ‘정념’과 ‘신체적 변용’이라는 용어를 보면서 좀더 파고들어보고 싶었다. 물론 논문 속에서 스피노자 윤리학의 내용이 떠오르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원하던 길을 찾아 온 것 같아 다행이었다. 어렵기는 하다.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소년이 온다>를 정동 이론으로 분석한 논문과 마음의 사회학, 9.11 참사와 기억장소, 느낌의 구조와 정동경제론을 주되게 읽고 사유하며 현재 내가 교실에서 학생들과 했던 추모의 모습을 반성적으로 살펴보며, 교실 속에서 추모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방향을 잡는데 집중하여 탐색해보려 한다.
첫 학교에서 한 선생님을 만났다. 그 선생님은 이제부터 A 선생님이라 부른다. 첫 부임 학교라 낯설어서 만나는 모든 분들이 어색했다. A 선생님과도 역시나 거리감을 갖고 동학년에서 함께했다. 그 해 가을에 수학여행에서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뭔지 모를 정신적 이상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선생님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니 동질감을 느꼈다고 표현할 수는 없고, 진정성을 추구하는 선생님의 모습에 반했다고 해야할까. 몇 개월 뒤, 그분을 흠모만 하던 나는 뜬금없이 A 선생님께 ‘(뭔가) 좀 알려달라’고 하면서 친밀감을 표현했다. 10년 이상 된 기억이라 뭔가가 뭔지는 잘 모르지만, 진정성, 지혜와 관련된 것이다. 선생님은 ‘올 것이 왔구나’ 하면서 받아들여주셨다고 한다. 동학년 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 있다가 내가 무슨 말을 했단다 그 말 속에 내가 추구하는 것이 현실에 있지 않고, 저 어딘가에 있었는데, 그 답변이 좋았다고 하셨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나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말이다.
‘마음의 사회학’ 논문을 쓴 김홍중(2008)은 ‘진정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전근대적 도덕적 가치인 ‘신실성’과 비교한다. 자신과 타인에게 거짓되지 않은 태도로 사회의 규범적 의무가 자신이 욕망하는 바와 일치하는 도덕적 가치인 ‘신실성’은 전근대적 도덕 가치이다. 이후에 나타나는 ‘진정성’이란 도덕개념은 근대사회의 전개에 맞추어 근대적 인간이 개인주의적 가치를 긍정하면서, 공동체로부터 주어지는 역할의 모델과 자신의 진정한 이상, 욕망 사이에 괴리를 발견하면서부터 나타나는 새로운 이상이라 할 수 있다.(Berger, 1973:82, 재인용) 진정성은 ‘진정한 나’를 추구하고, ‘진정한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 결합되었을 때 현실화 될 수 있는 것이라 하였고, 이는 우리나라 386세대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김홍중, 2008)
A 선생님은 연구자가 지적했던 386세대이기도 했다. 신실하지만 학교의 부정의한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서지 않는 자들에게 독설을 하시기도 하였다. 나도 독설을 듣는 동료 중 하나였다. 그분의 진정성에 동의를 하면서도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이 아쉬워서 선생님을 따라 ‘벙커원(김어준의 파파이스), 인권위 연수를 들으러 함께 따라다니기도 했다. 프랑스 철학사,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몇 달 하다가 이해할 수 없어서 내려놓았지만, 선생님은 ‘지금 알아듣지 못해도 DNA는 기억한다고 하더라’며 웃기면서도 웃을 수 없는 말로 위로해주셨다. DNA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스피노자의 정념과 신체적 변용을 애써 떠올리며 이번 수업에서 정동이론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다양한 논문들을 읽으며 그동안 내가 추구했던 진정성이 사회학의 주제로도 존재한다는 것이 의미있는 발견이자 수확이었다.
나의 진정성을 향한 추구는 균형감 없는 내 자신에 대한 반성 때문이다. 개인주의적인 우리 세대의 대세를 따른 것인지는 몰라도, 나도 모르게 진정한 자아를 강하게 추구했다. 한편으로는 진정한 사회를 추구하는 부분이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A 선생님에게 다가가면서도 한편 죄송하기도 했다. 선생님의 학교를 향한 비판에 동의는 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야기해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분을 향한 존경심과 함께 한 삼년 여의 시간이 정동으로 내게 신체적 변용을 일으킨 것일까. 그 뒤로 학교에 새롭게 도입된 ‘토론이 있는 교직원회의’에서 내가 몇 마디 말을 얹으며 점차 학교의 본질을 찾자는 방향의 교사들 쪽으로 가 있었다. 회의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전이와 정동에 관한 세 가지 접근 : 프로이트 라캉, 마수미’ 연구논문을 쓴 서지형(2020)은 플라톤의 <향연>을 예로 든다. 아가톤의 지혜에 대한 흠모가 소크라테스를 옆에 두면 자신에게까지 올 것으로 생각했다. 이는 전이를 떠올리게 한다고 했지만, 서지형은 타자와 타자라는 두 존재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감정의 작용인 ‘정동 affect’이 관여한다고 하였다. 정동은 보이지 않으나 관계의 장을 가시화하는데, 이는 담론적 실천을 넘어 의미 있는 정치행위까지 발전할 가능성을 모색한다고 했다. 즉, 육체를 외부 세계의 감각적인 접속면으로 보고, 현시대가 요구하는 실천의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하였다. 마수미의 정동에 대해서 정동이 전염성을 지니고 타자에게 공명되는 것으로, 정동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은 타자에 있다고 하였다. 논문의 결론에서는 마수미가 영화, 정치, 다큐멘터리, 사이버네틱스에 이르는 광범위한 분야에서 무한한 영역으로서의 정동과 육체를 조명했다고 지적하면서 미디어의 발달로 어느 때보다 정동에 지배를 받고 있는 지금, 어떤 가치의 몸이 될 것인지 사유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어려운 논문이었지만, 내가 이해한 바대로 다시 이야기하자면 사람과의 관계, 혹은 미디어에서 영향을 받으며 살게 되는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행동할 것인가를 설명하였다. 따라서 지혜를 흠모한 아가톤처럼 내가 영향받고 싶은 존재인 A 선생님을 찾아가고 그분 곁에 있으려 했던 첫 학교의 내 모습이 내 스스로 어떤 가치의 몸이 될 것인가 하는 선택이었다고 느낀다. 물론 영향을 받지 않겠다고 해도 노출되어 영향을 받는 정동도 있을 것이다. 내가 A 선생님을 흠모하여 그분 곁에서 영향을 받고자 했던 것이 이러한 정동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엔 내가 어떤 사람, 어떤 몸이 될 것인지를 찾아온 것이라 보인다. 아가톤처럼 지혜를 소유한 자를 소유하지 못해 (속담에 따르면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처럼), 버거워서 놓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철학 공부의 포기 등.
연구자들이 밝혔듯이 정동이 전염성을 지니고, 타자에게 공명되는 것이라면 교실 속에서 함께 지내는 학생들과 나는 서로에게 정동적 존재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마음의 사회학에서 언급한 ‘진정성’을 추구하는 교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가게 될 사회에서 학생들이 시민으로 성장하여 잘 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좋은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을 하는 교사의 삶으로 교실 속에 존재해야 아이들에게도 전달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진정성을 추구하기만 할 뿐, 잘 실천하진 못했을 수도 있다. 연구하고 성찰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문화연구의 감정론적 전환을 위하여: 느낌의 구조와 정동경제론 검토’를 연구한 이명호(2015)는 윌리엄스가 느낌의 구조를 ‘특정한 시공간에서 삶의 질에 대한 느낌’으로 정의한다. 문화 결정성을 언급하며 한 시대의 느낌의 구조들은 단일한 것이 아니라, 잔존구조, 지배구조, 발생구조가 중층결정되어 있는 역동적 과정이라고 하였다. 이를 설명하면서 감정은 개인적으로 경험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보이기 쉽지만 사회문화 구성체가 개인을 ‘느끼는 존재’로 구성해내면서 만들어낸 것이므로 개인의 감정 경험 속에는 이미 사회적 의미와 권력이 기입되어 있고, 그 의미와 권력의 작동방식을 해석해내고 변화를 위한 단초를 마련해야하는 곳도 바로 개인이라는 공간이라고 하였다.
최근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감정과 그 기저에 있는 욕구를 지도하면서 욕구가 충족되면 긍정적 감정, 충족되지 못하면 부정적 감정이 든다라고 감정을 개인의 욕구와 관련해서만 지도했었다. 이를 토대로 ‘나 전달법’과 자신의 감정에 귀기울이기를 지도하고 있었는데, 감정을 아주 가볍게만 접근한 것만 같다. 감정 속에 들어있는 사회적 층위가 있음을 알고 외부에서 들여온 (연수를 통해서 접한 것) 내용에 대한 비판적 사유는 전혀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기도 하고, 공부할수록 더 까다로워지고 어려워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감정을 중요시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언제부터인지 그 시작을 알지는 못하지만, 사회과교육에서 개인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켜 역사 수업, 역지사지 수업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을 배워가는 아이들이 역지사지를 하기 위해서 상대의 입장이 되어 말해보는 미러링 대화(상대가 말한대로 받으면서, 그랬구나 하는 것), 00가 되어 하루를 일기로 써보기, 00이 되어 역할극 하기 등을 지도하고 있다. 인지적인 이해가 어렵기 때문에 보다 쉽게 수긍이 되는 감정을 쓴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명호의 논문을 통해서 감정을 활용하여 수업을 할 때에 주의해야할 것은 무엇인지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장애이해교육, 성평등 교육을 할 때에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입장에서만 이야기하다가 자신의 입장이라면 어떤 선택을 해주기를 바라는지 물어보면 그제서야, ‘속상할 것 같다, 화가날 것 같다’ 등의 반응을 보이며 수긍을 하기는 한다. 아니 더 즉각적으로는 아이 둘이 싸워서 불러서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를 이해 못할 경우, ‘너라면…’ 상상을 시키면 곧바로 상대가 겪었을 상황에서의 감정을 떠올리며 ‘저라도 기분 나쁠 것 같아요.’ 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이 왜 진심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연구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에서 감정 역시 ‘구성’되고, 경제적 효율성을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관리, 조작되고 있음을 이야기하며 사람들은 극심한 감정적 소외를 겪거나, 억눌린 감정을 왜곡되고 폭력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감정의 기계화를 이야기하기에 감정연구가 사회적 맥락에서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측면을 전체적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역사 수업이나 역지사지가 필요했던 순간에 했던 감정을 활용하는 수업이 의도했던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는지를 떠올려보아야겠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했던 세월호 추모 활동에서 희생자들에 대한 슬픔, 진상규명에 대한 분노, 유가족들과 관련되신 모든 분들에 대한 격려, 미안함, 감사 등의 감정을 끌어내는 것이 올바른 것이었는지도 생각해보게 된다. 잠깐 그 시간에 감정을 쓰고 활동을 위한 끌어올림이었는지 반성하게 된다.
국가 의례가 되는 순간 기억에서 사라진다. 애도가 아닌 기념이 되는 것이 유가족이 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권명수(2016)에 따르면 세월호 대책위 유경근 대변인이 신문사 인터뷰에서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이야기해주십시오. ‘한달 뒤에도 잊지 않겠습니다. 1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저희에게는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저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잊히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잊히고 우리가 잊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당사자인 유족뿐만 아니라, 이를 보고 충격 받고 일상을 정상적으로 살기 힘들어하는 이들에게도 이를 기억하며 애도하면서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해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뉴욕의 9.11 참사를 목격하고, 이후 공공미술로서 애도와 연대를 경험하며 집단적 치유를 경험한 고은실(2017)의 논문에서는 공공의 트라우마, 외상적 기억을 추모하고 애도하는 목적의 다음 세대와 인류를 위한 교육적 목적의 공동체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공공미술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에서 테러 참사가 일어난 자리에 그라운드제로라는 이름으로 전세계와 미국의 중요한 기념의 장소가 형성되어 공공의 기억, 추모, 애도, 기념의 공간이 되었다. 연구자가 인용을 통해 기억은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에 잊혀지므로 공공미술, 기념물을 통하여 세대에 걸쳐 이성적, 감성적으로 기억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라운드제로에 방문자들이 추모를 위해 두고 가는 꽃과 물건들이 기억을 현실로 만들고,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추모하고 참여하면서 기억되고 반응된다고 하였다.
위 두 논문을 통해서 세월호 참사와 아래에서 더 이야기할 광주 민주화 운동, 제주 4.3 사건 등 우리의 역사 속에서 희생된 분들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 이 ‘거대한 정동 네트워크’ 속에서 시민들의 신체적 변용이 지향해야할 방향을 따라가보려고 한다. 사회적 애도에서 진정으로 기억과 애도를 위한 방법을 찾아보려고 한다.
<소년이 온다> 책을 펼치면 5월의 광주가 눈앞에 그려지고, 국가 폭력이 저질러놓은 참상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책을 덮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믿기지 않는다. 그런 일이 정말 국가가 저지른 것이라니. 역사서 속에서 듣지 못했던 끔찍한 일들이다. 책을 펼치고 닫는 몇 번의 시간 동안 극화되어 있는 기승전결의 소설이 아니라 놀랍도록 생생한 체험 수기 같았다. 오월의 광주의 죽은 이도 되었다가, 살아남은 이도 되었다가, 유족도 되었다. 영화 <택시 운전사>나 <화려한 휴가>도 같은 날을 기록하여 대중들에게 국가폭력의 실상을 알려주고 사회적 기억과 애도를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지만, 영화가 갖고 있는 극적인 미학이 느껴지니, 실화가 극 같이 느껴졌다. 개연성을 부여하거나, 평화로움을 대비시키기 위해 웃음 코드를 넣는 점 등이 그러했다. 또 인물들 간의 관계가 복잡하다는 것, 일상에서는 쉽게 맺어지기 어려운 우연에 기댄 인물의 관계성 말이다. 또한 <화려한 휴가>의 인물 이름보다는 이요원, 김상경, 안성기 배우의 이름이 더 기억나는 것을 보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감사한 재현이자 기억이지만, 픽션 속의 실화가 설득력과 대중적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소설 <소년이 온다>는 픽션으로 출판되었지만, 김미정(2017)이 쓴 연구논문에서 말한 ‘광주의 참상을 더 정확히 재현하는 소설, 광주에서 일어난 비인간적 참상에 관한 가장 정확한 기록물’이라는 평가에 동의한다. 글 속에 적힌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광주에서 참상을 당한 그분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읽기가 미안하고 버거웠다. 이 소설은 ‘어느 광주 소설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죽음과 생존, 비인간과 인간 등의 문제에 굴착한다고 했다. 또한 유가족이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달라’고 부탁한 것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며 이 소설은 ‘문학적 진상규명’과도 같다. 소설적으로 증언 불가능성의 문제를 가능성 쪽으로 이행시키고 싶었던 작가의 저항이 죽은 이의 영혼을 서술자로 등장시키기도 했다고 지적하는데, 작가는 생존자의 구술과 증언에 의존하여 썼다.
연구자가 말한 바 시간이 지나서 생존자가 없을 때 역사적 실재를 왜곡하거나 부정하는 정동이 생긴다면 부당함을 입증할 수가 없기에 증언이 생존자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문학적 진상규명이 가능하다는 것에 동의하는 바이다. 기억이 기념이 되는 일은 공식적으로 망각하게 되는 것이라 보았다.
이는 우려했던 부분이기도 한데, 공식 기억이자 역사가 되려면 사적이거나 일상적이거나 주변적인 기억을 추방해야만 한다. 그러나 소설에서 다루는 부분은 역사에서 누락된 기억들을 이야기한다.
사회적 참사가 국가에 의해서 기념되는 것은 사적인 기억이 사라지면서 잊혀진다고 하였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생존자가 있음에도 극우 성향을 가진 집단에서 모독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그에 대한 저항으로서 문학적 진상규명인 <소년이 온다>에 감사하다. 진정성을 추구하는 시민이 있는 교실을 위해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교과서 속에 공식 기록이 되어 있는 역사를 가르칠 때, 정치적인 부분만 다룬다. 그에 대항하여 역사에서 한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 상황 속에서 그 사람이 되어보기를 지도하는 때가 있다. 특히 신분제 속에서 고통받는 일들을 경험하다보면 아이들은 신분제의 부당함을 깨닫는다. 전쟁 속에서 고통 받았던 백성들의 삶을 그려보면서 우리 선조들이 힘들게 살아온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애국 운동, 독립 운동가에 관한 내용을 읽으며 그 삶을 역할극이나 일기로 써볼 때도 있다. 그러면 아이들은 신기하게도 그 상황을 잘 재현해내기도 한다. 때로는 웃기기만 하려고 할 때도 있다.
김미정(2017)의 결말 부분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생명이 있는 한 인간은 늘 모든 존재와의 마주침 속에 놓여 있음을 기억하고, 그 마주침의 관계들 속에서 ‘어떤’ 신체를 이룰 것인지 사유하는 것이 지금 ‘기억-정동’ 전쟁의 시대에 필요한 일일지 모른다. 역사를 망각하게 하고, 인간을 인간이 아니도록 추락시키고자 하는 힘은 늘 있어왔다. 폄훼하고 모독하는 대중이 있다면 존중하고 사랑하는 대중이 있다. 그 둘은 반대가 아니다. 단지 다른 방향의 벡터를 가질 뿐이다.
교육이 고민을 한다면 적어도 어떤 벡터를 지향하게 할지 생각하는 진정성 있는 시민으로 키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정동 이론과 기억과 애도에 대한 논문들을 통해 방향은 얼핏 잡았지만, 구체적인 수업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이 덜 된 입장에서 이 보고서를 마무리하게 된 것은 아쉽다.
교사들은 혼자서는 많은 것을 해내기 어렵다. 이러한 생각들을 갖고 있는 동료들과 만나, 교육과정을 고민하고, 수업을 해보고, 이것이 교사 네트워크 자료로 공유되어 교사들 사이에 인정되면 교과서 저자로 활동하는 교사들에 의해 교과서 속 활동으로 스며들기도 한다.
몇 년 전 6학년 아이들과 근현대 역사 영상을 찍어보는 활동을 했었던 부끄러운 기억이 하나 떠오른다. 그 당시 아이들의 영상 속에는 고통은 없는 사건뿐인 5.18이 등장하였다. 나는 그것을 보고 별다른 조언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무지했다. 아이들은 5.18 영상에서 시위를 하다 군인의 총을 맞고 푹 쓰러져 연기를 잘한 아이에게 감탄을 했다. 영상 찍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데, 그때 나는 무엇을 가르친 것일까, 부끄러워진다. 반성적 성찰을 통해 역사 수업에서 필요한 교육이 무엇인지 먼저 세워야 할 것이다.
다시 세월호 추모로 정리해본다. 거대한 정동 네트워크에서 아이들과 4월 16일 세월호 추모를 하면서 글로만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활동 자료를 만드는 아이들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기억과 애도가 무엇인지 먼저 알고, 우리도 그에 맞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해마다 반복되면서도 그것을 통해 누군가는 힘을 얻고, 우리들은 함께 애도하며 공동체를 굳건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수업을 만들고 싶다. 시민들이 참여하는 공공미술과 <소년이 온다>의 문학적 진상규명이 그 방향을 알려주는 단서가 되었다.
결과물보다 함께를 경험하는 교실이 되도록 하면 4월 16일 추모의 날, 노란 풍선에 편지쓰기를 하는 공공미술작품을 시간 안에 빨리 해내라고 독촉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참고자료>
한강(2014), 소년이 온다, 창비
김홍중(2008), 마음의 사회학-진정성의 기원과 구조, 한국사회학회 사회학대회 논문집, 233-241
서지형(2020), ‘전이’와 ‘정동’에 관한 세 가지 접근 : 프로이트 라캉, 마수미, 프랑스학회 프랑스학 연구 92, 185-215
이명호(2015), 문화연구의 감정론적 전환을 위하여 : 느낌의 구조와 정동경제론 검토, 비평과 이론 제20권 1호
권명수(2016), 사회적 애도 가능성 연구 : 세월호 참사를 중심으로, 제3-1발표, 169-176
고은실(2017), 공공미술로서의 공동체 기억의 장소-9.11 참사의 보존과 재현에 관한 연구, 미술교육연구논총, 233-254
김미정(2017), ‘기억-정동’ 전쟁의 시대와 문학적 항쟁 -한강의 <소년이 온다>(2014)가 놓인 자리, 인문학연구 제54집, 249-278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논문을 소개해주시고, 글의 벡터를 지도해주신 존경하는 교수님, 덕분에 제가 성찰할 수 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