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 스포 있음!
켄 로치 감독의 <나의 올드 오크> 영화를 보고 같이 본 사람들과 간단한 평을 했다. 어떤 이는 감독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을 갖고 있었으나, 현실성이 떨어지는 결말을 지적했다. 낙관적인 끝맺음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보며, 동화 같이 마무리지어 아쉽다고 했다.
동화를 교육자료로 자주 쓰는 본인에게는 ‘동화 같은 결말’이라는 부정적인 평가에 생각이 머물렀다. 나름 동화의 편에서 변호 하자면 이렇다.
<나의 올드 오크>가 다큐와 영화의 경계에서 스토리를 전개하다가 한껏 고조된 영화 속 갈등을 한번에 봉합하여, “그래서 그들은 잘 먹고 잘 살았대요.”처럼 아름답게 마무리한 것으로 보였을 수 있겠다.
현재진행형인 이 사회문제를 감독의 결말이 아름다운 마무리로 베일을 씌워버림으로써 관객을 안심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걱정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영화를 본 관객들이 해결책이 아직 완전하지 않은 이 사회 문제에 대하여 해결책을 생각할 여지를 남기지 않은 점 때문에, 동화 같은 결말이 아쉽다고 여긴 것으로 생각한다.
본인은 이 영화가 전래동화나 안데르센 동화로 대표되는 고전 동화들처럼 해피엔딩, 교훈적인 결말로 감상자들이 영화가 끝난 이후 문제 상황을 직시할 수 있지만 영화에서 해결의 키를 얻지 못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못한다.
켄로치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영화는 대중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답을 해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영화가 어떤 확실한 대안을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정치운동이 아니다. 영화가 어떤 특정한 정보나 사회 정치적 논쟁을 이슈화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제기한 이런 이슈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온전히 관객의 몫이라고 믿는다.” (참고문헌 4번 74쪽)
나는 <나의 올드 오크>가 켄 로치 감독이 사회 갈등의 해결책을 제시한 영화가 아니라 문제제기를 한 영화라고 보았다. 영화가 제기한 문제에 답변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라는 것에 동의하며 <나의 올드오크> 영화보기를 하며 답변을 생각해보았다. 글을 쓰기 전 다시 영화를 보니 영화가 전개되는 동안 동화적 상상력으로 결말을 맺은 것인지 알아차리는데 도움이 되었다. 감독의 해결방식이 낙관적으로 맺어져도, (다른 이의 표현으로는 동화적 상상력으로 결말을 지은 방식) 영화가 이슈제기, 문제제기 능력을 갖고 있었기에 이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를 보며 감독이 문제제기한 거주자와 이주자 간의 갈등과 관련하여 영국의 난민 정책 유형을 알아보고, 켄 로치 감독이 제시한 문제제기와 비슷한 그림동화의 예를 들어 동화적 상상력으로 제시한 결말이 이슈제기 능력과의 관계를 찾아 보았다. 그렇게 켄로치 감독의 이슈제기를 질문으로 받아들이고 그 답변의 사상적 근간으로 ‘이주자를 환대하는 공동체의 철학’을 생각해보려 한다.
영화의 배경은 영국 북동부의 폐광촌이다. 시리아 난민은 영국 정부의 난민 정책에 의해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은 난민촌에 수용되어 있다가 자립을 위한 집을 제공받아 거주하게 되었다.
김성진의 연구에 따르면 시리아 난민은 2011년 3월 내전 발생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2014년 세계최대 규모를 기록하였다. 영국은 2015년 11월에 2020년까지 2만 명의 시리아 난민을 수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표명에도 영국은 시리아 난민 유입에 대해 보수적이며, 2015년 난민 수용 인원은 유럽 국가 중 9위 수준이다. 영국의 난민 정책에서 시리아 난민을 대하는 인식과 태도의 특징은 노동 이주증가 가능성에 대한 경계로 난민 선별과 분산 정책을 펴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사회 경제적 혜택을 축소하고 있다. 영국의 난민정책 유형은 ‘역사책임형‘ 모델로 인도적 가치에 대한 난민 수용에 원칙적으로 긍정적이지만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동에 대해서 폐쇄적이다. 또 과거 식민지에서 유발된 난민과 같이 역사적 연관성이나 언어 문화적 동질성을 고려해 선별적인 수용을 하고 있다. 일부시기를 제외하면 이방인 수용에 소극적이며 이주의 경우 차별적이라고 평가된다. (참고문헌 8번, 116쪽)
난민들은 어려운 여정 끝에 이주에 성공하여도 거기에서 끝이 아니다.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일로, 구직이라든가 언어와 문화 등이 다른 거주민들과의 조화의 문제에 마주친다. 폐광촌을 배경으로 한 <나의 올드 오크>에서는 영국 사회의 경제적 약자들인 거주자들의 혐오의 정서가 이들을 향해 날아오며 이주 첫날부터 난관이 예상되었다. 또한 난민을 위한 영국 정부의 사회적 혜택의 축소로 이들이 정착하는 여정은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감독은 영화 속에서 구체적인 스토리로 보여주며 문제를 제기하였다. 거주자들이 이주자들을 거리두기하며 반기지 않는 상황에서 시리아 난민 야라의 카메라를 거주자인 마을 사람이 억지를 부리다가 망가뜨리며 거주자들의 지나친 반감에 시비를 거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영화가 계속 진행되면서 영화는 거주자들을 마냥 비판하지만은 않는다. 이들은 폐광으로 일자리를 잃었고 활기를 잃은 마을은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상황이다. 한 마디로 여유가 없다. 정부는 난민들을 이 마을의 빈집으로 보내며 별다른 대책 없이 마을에 자리만 잡아준다. 뒤에 벌어질 일들에 대한 조화의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거주민도 이주민도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다. 어떤 설명도 없이 우리 동네에 발붙이는 난민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인간적인 반응은 어떤 것일까를 묻는 것이다.
오래 전, 켄 로치 감독의 <빵과 장미>를 보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멕시코 합법 또는 불법 이주자들의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그들이 불법 이주자라해도 인간적인 대접까지도 포기해야하는 상황을 당연시 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영화를 본 것만으로도 타인의 삶에 접속하여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었지만 이 영화를 볼 적만 해도 이주자들이 처한 상황을 단지 먼 나라 일로 인식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시민단체가 시작되었던 즈음이었는데도 말이다. 꽤 시간이 흐른 지금, 외국인 노동자들의 수가 많아졌고, 그분들에 의해 산업이 유지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보도를 보면서 남 일 보듯 할 수는 없게 되었다. 교실, 나의 학급에도 이주배경 학생들이 있으며 그들이 나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나의 올드 오크>는 영국의 폐광된 마을로 영국 정부의 난민 정책에 의해 온 시리아 난민들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먼 나라 일 보듯 세계시민으로서 보았던 영화 <빵과 장미>와는 달랐다. 지금 이곳에서도 시작은 다를지라도 존재하는 이야기였다.
이 영화는 거주자와 이주자 사이의 갈등을 드러낸다. 시리아 난민들은 자신들이 택할 수 있는 것은 난민이 되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는 이들이다. 옷가지 몇 개만 갖고 탈출한 이들을 위해 자원활동가는 여러 가지 생필품들을 기증받아 가져다준다. 그 과정에서 한때 마을을 위해 헌신했고, 다양한 활동을 기획했던 TJ도 물건을 운반해주는 역할을 하며 이들의 자립을 위해 애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 일부는 자신들의 공간에 (정부가 지정하여 보낸) 와서 살게 된 이주자들을 향해 대놓고 불쾌함을 드러내고, 당사자 앞에서 들으라는 듯 면박을 준다. 또한 아픈 학생을 위해 집에 바래다주고 학생 보호자가 없어 자신이 먹을 것을 찾던 순간, 보호자가 마침 집에 들어오고 냉장고를 뒤지고 있는 야라를 발견한다. 학생 보호자는 놀랐겠지만,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퍼부으며 내동댕이치는 모습에서 거주자들이 이주자를 대하는 태도는 적의 그 자체임을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거주자가 이주자 즉, 죽음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난민들을 향해 보여주는 텃세 또는 차별적인 행동이 공공연히 나타나더라도 공동체는 별다른 제재가 없다. 여기서 타자를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보게 된다. 몇몇 개인으로 대변되는 TJ와 자원봉사자가 야라를 감싸준다고 해도 모든 곳에서 보호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TJ 역시 그러한 타자를 감싼 대가로 공공연한 야유를 받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윤리 차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엔 벅차보인다.
다큐와 영화 사이에 놓여있는 이종접합 장르인 켄 로치의 영화를 보면서 현실 같아서 답답해지는 순간이 온다. 음식을 함께 나누어먹는 공간이 손댈 수 없이 망가졌을 때 겨우 될 것 같았던 화합마저도 반대하는 사람들의 정체를 알고, 참담함이 느껴졌다. 현실 같았다. 해결할 수 없는 이 꼬여있는 갈등이 개인이 해결하기에는 참을 수 없게 무거웠기에 결론이 동화적 상상력으로 낙관적인 마무리되어도 이해가 되었다. 이 영화는 연대와 나눔, 누군가의 슬픔에 함께 결속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슬픔이 견딜 수 있는 무게가 되는 것을 보여준다. 연대의 힘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야라 아버지의 죽음 비보를 듣고 마을 사람들이 와서 헌화하고, 추모하는 모습에서 눈물이 흘렀다. 예술은 사람들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연대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그 힘을 기억하고 있다. 견딜 수 있는 힘을 나눠주는 것이라는 것을. 앞서 동화적인 결말이 시시했다고 했던 평이 다시 떠올랐다. 터무니없는 동화적 결말이라해도 연대의 시너지를 전달하고, 그것을 깨달은 관객에게 코끝이 찡해지는 경험을 하게 하였음에 박수를 친다. 그러나 여전히 동화적 결말에 석연찮아서 좀더 조사해보았다.
동화적 상상력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터무니없거나, 허무맹랑한 이야기 전개를 말할까? 서덕민의 선행연구에 따르면 동화적 상상력이란 동화라는 장르에서 생긴 서사성과 환상성이라고 본다. 동화가 아동을 대상으로 한다는 목적의식이 있기에 창작동화에서 공상적, 초자연적 세계를 그리는 ‘환상적 요소’를 내포한다고 보았다. 이 환상적 요소란 아동의 자기중심적 사고와 물활론적 사고가 동화의 환상적 세계와 천연성이 다분한 것으로 동화 창작의 필수요소처럼 인식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서도 환상에 근거하고 있는 서사 구조를 동화적 상상력의 핵심으로 보았다고 하며, 환상성은 아동의 심리를 기초로 한다. (참고문헌 10번. 46쪽)
동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방식 중 하나는 인간 세계를 닮은 동물들의 등장이다. 우화와 같은 이 형식을 통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전달력이 뛰어나고 생각할 여운을 남긴다. 동화적이라고 하는 것은 환상적요소나 아이들의 천진한 세계가 있어야 하는데, <나의 올드 오크>에는 해리포터나 아이들의 자기중심적 물활론적 사고는 보이지 않는다.
켄 로치 감독은 노동자 문제에 천착한 영국 출신 감독으로 그의 영화는 ‘승리에 대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승리할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그는 자신의 이념을 유지했고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섣불리 희망을 얘기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후회하지도 않았다.’라고 평가받는다. (참고문헌 4번, 66쪽) 그저 낙관적인 결말을 통해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하는 감독이다.
동화는 현실의 문제를 우화로 등장시켜 어린이들도 이해하고 철학적 기반을 내면화하기도 한다. 동화를 활용한 방법은 오히려 교육적이고, 상상의 폭을 넓혀준다.
예를 들면 이주노동자를 주제로 한 안드레스 피 안드레우 작가의 <벌집이 너무 좁아!>는 우화의 모습을 한 그림동화이다. 꿀벌들이 부쩍 좁아진 벌집에 대해 회의를 한다. 조사관 꿀벌들은 조사 결과, “우리 벌집에 벌 한 마리가 더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꿀벌들은 그 벌을 찾아내기 위해 온갖 추측을 하고 다양한 방법을 제안한다. 이렇게 ‘한 마리 더 있게 된 벌’에 대해 집중하며 벌들이 싸우고 있을 때 여왕벌이 제안한다. 시끄러운 상황을 몇 마디의 말로 종료시켰다.
“우리 벌집에 침입자가 있는 게 아니라, 방이 하나 모자란 것은 아닐까요? 침입자를 찾는 대신, 그 시간에 힘을 모아 방 하나를 더 만들자고 제안하자 벌들은 소동을 멈추고 방을 만든다.
이러한 동화적 상상력은 생각의 기본을 바꿔준다. 이주 노동자가 기존의 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하는 접근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책의 맨 마지막 페이지는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얼핏 보면 이방인을 환영하는 공동체의 모습으로의 전환이다. 그리고 하나 더 생긴 방에는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어서, 이제 벌집 속 벌들이 자신의 방이 생겼음에 독자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에 따르면 이 안에 또다른 속내가 있다고 한다. 그것을 작가는 한번 더 꼬집는다. 마지막 장에서 작가는 이렇게 마무리를 지었다. “벌집이 좁아진 것은 누군가 한 명이 침입(이주)해 들어왔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인원수 계산을 잘못해서, 방을 적게 만든 게 문제가 아닐까요?”
이주자에 대한 생각을 거주자인 우리와 똑같은 존재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는 데리다가 언급한 절대적 타자를 향한 무조건적 환대의 사유를 말한 것 아닐까. 그동안 문제시되어 왔던 외부인의 존재는 색출대상, 나와 타자의 분류대상이 아니라는 점. 함께 공존하는 마음으로 자리를 하나 더 마련하면 되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으로의 전환이다.
난민과 이주민은 거주자에게 이방인이고 낯선 ‘타자’로 볼 수 있다. 데리다는 이에 대해 균형잡기도 어렵고, 상호성 확보도 힘든 비대칭적인 관계라고 지적했다. 아무리 벌들이 방 하나를 더 만들어 ‘환영합니다’라고 하는 방식처럼 이방인에게 정부가 베푸는 시혜적 관용이 있다 하더라도, 이는 조건적 환대로서, ‘넌 참을 수 없는 정도는 아니니 내버려 두마, 그러나 이게 내 집이라는 걸 잊지 마’라는 의미가 깔려 있다. 이는 칸트가 세계시민으로서 이야기한 것으로 조건적 환대에 해당된다.
그래서 이러한 ‘환영합니다’가 무조건적인 환대가 되기 위해서는 초대되지도 않고, 기대되지도 않은 모든 자에게 방문자로서 도착한 모든 자에게 사전에 개방되어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방문의 환대라고 한다. 데리다는 무조건적인 환대에 대한 ‘사유’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여 타자에 대한 법과 정치의 조건이 정해지기를 요청했다. (7번 자료 9쪽)
결국 인식론적 전환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우리는 더 사유하지 않으면 타자에게 조건적 환대를 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 있다. 그렇지만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무조건적인 환대를 위한 분위기 조성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동화적 상상력으로 이 문제를 바라봐야 인식의 전환이 가능하지 않을까.
2015년 <벌집이 너무 좁아>에서는 이주자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인식의 전환이었다면, 2024년 난민이 늘어나는 시대에 조건부로 이주자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점차 당연한 시대가 되고 있다. 거기에 더해 이제는 조건이 붙지 않은 환대여야 한다는 논의도 생기고 있다.
그 논의를 정리한 논문이 자료 9번 ‘이주 사회에서의 환대의 권리’이다. 이 학술논문의 저자인 서윤호에 따르면 세계화의 영향으로 ‘전지구적 노마드화’를 실감하는 시대이다. 그와 더불어 탈경계의 사유와 시대가 열려서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이 흔들리고, 이주사회에서의 환대가 문제가 된다. 권리로서의 환대가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타자의 권리로서 이주자의 관점에서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환대의 권리의 가능성을 탐색한 논문이다. 그러나 이는 사회구성원의 자격과 관련된 ‘성원권’과도 관련된다. 성원권이란 사람이 사람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보편적인 권리를 가질 권리이다. 난민과 망명객에 대해서 임시 입국권을 허용하지만 이후 정회원이 되는 모든 과정을 규정할 수 있는 민주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합법적으로 입국한 모든 거주자들을 기본적으로 시민이나 잠재적인 시민으로 바라봐야 하는데, 열악한 업종의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입국 이민자에게 성원권을 전혀 부여하지 않는 것은 종처럼 취급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는 이방인의 지위에 묶어두고 억압과 착취를 지속하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주자를 향한 환대의 문제는 사회구성원의 자격을 다루는 성원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환대는 타인의 호소에 응답하여 자신의 문을 활짝 열고 타인을 나의 손님으로 맞이하고 선행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이다. 자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 딸린 권리들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또는 권리들을 주장할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환대 받음에 의해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권리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된다.
데리다의 무조건적 환대의 개념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타자를 순수하게 맞아들이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주체의 장소, 즉 ‘자기-집’이라는 경계를 허물고 열어놓을 것을 요구한다. 절대적 환대의 법은 보편적 윤리라는 점에서 특정한 공동체의 권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 조건적 환대의 법 및 권리와 구분된다. 조건적 환대 또는 ‘초대’의 환대는 타자가 우리의 규칙과 삶의 규 범, 나아가 우리의 언어, 문화, 정치체계 등을 성실하게 준수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타자에게 환대를 제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스스로를 배반하게 된다. 자신의 영역에 대한 강한 집착을 결국에 버리지 못하므로 자기 집을 보호하기 위해 명시적으로 또는 잠재적으로 이방인을 거부하는 자가 되거나 혐오하는 자가 될 수 있다.
또 이러한 조건적 환대는 공동체 내에서 권력의 불평등을 전제로 하는 관용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권력자의 양보와 자비, 시혜에 기댈 수밖에 없고, 이방인의 권리를 형식적으로 마련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자체가 이방인과의 평화로운 실질적인 공존을 가능케 하는 원리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데리다는 방문의 환대, 무조건적 환대를 주장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윤리적 이념이 필요하다. 현실 사회 속에서 실제로 실현가능한가는 의문이 제기된다.
또 타자윤리와 타자철학에 기초한 환대 개념이 오늘날 각광을 받는 것은 소수자와 약자의 지위에 놓인 타자로서의 이주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주사회에서 이주인권의 문제는 해당 국가의 주권적 시민권과 관련하여 다양한 긴장관계를 낳는다. 따라서 원주민의 공동체를 기본적으로 위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정부분 허용되는 조건적 환대개념과 타자를 그 자체로서 있는 그대로 완전한 인격체로 받아들이는 타자지향적 윤리인 무조건적 환대 개념을 환대를 둘러싼 논의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참고문헌 9번 요약)
‘굶주림은 없을 것이다’ 영화 속 봉인되었던 올드 오크 방에서 야라가 본 사진 속에서 광부들이 결기하여 정부의 탄압에 굴하지 않던 시절에 연대하며 했던 말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미 광부들의 파업 때 연대를 통해 삶을 공고하게 만들어갔던 경험이 있다. 이러한 주민들의 사진을 보면서 야라는 TJ에게 이것저것 묻는다. TJ는 파업을 했던 당시의 사진을 보며 야라에게 들려준다. “아버지는 말씀하셨지. 노동자가 자신의 힘을 자각하고, 그걸 사용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근데 그렇게 하지 못했지.” 그리고 이 말을 이주민들과 거주민들이 함께 음식을 나눠먹으며 밥을 굶는 학생들, 힘든 여건의 사람들과 이주민들이 힘을 합쳐보자고 했을 때 TJ는 거절한다. 그렇게 완강했던 TJ가 마음을 돌리게 된 계기는 자신을 살게 했던 강아지를 떠나보낸 후, 야라와 엄마가 밥을 먹어야 한다며 음식을 가져왔을 때이다. 말 대신 음식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고 했던 말. TJ는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며 음식을 먹으며 마음을 낸다. 연대를 위한 공간을 내어주기로.
데리다가 말한 무조건적인 환대가 성원권을 가진 입장에서 이주민들에게 똑같은 권리를 갖게 해주는 것이 왜 어려운가 생각한다. 절대적 타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께 음식을 해먹으며 함께 시간을 가지면서 절대적 타자가 우리가 될 수 있다. 영화 속 경제적으로 어려운 거주자들과 사회 성원으로서 자리잡고 싶은 이주민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상부상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데리다의 무조건적 환대의 타자 개념이 희미해진다고 볼 수 있다. 처음 야라와 난민들이 왔을 때는 절대적 타자였지만 함께 음식을 나눠먹으면서는 우리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데리다가 말한 무조건적 환대를 위한 공동체적 분위기 조성이 가능하지 않을까. 데리다의 타자윤리가 논의의 대상인 것은 낯선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기에 그런 것이니까.
이종도는 이렇게 말한다. “많은 켄 로치 영화들이 루저, 노동자,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의 각성을 그린다. 함께 부르는 노래는 그들이 자신이 누군인지 깨달았다는 증거이자, 스스로 변화할 뿐 아니라 세계도 변화시킬 것임을 밝히는 다짐이며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을 함께 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참고문헌 4번 74쪽) 야라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모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식사를 함께 하던 공간이 망가져 ‘우리’가 되는 것이 잠시 멈추는 것처럼 보였지만, 추모를 하며 함께 부르는 노래를 통해 연대가 어떻게 시작될 수 있는지, 그리고 연대가 어떻게 우리를 이끄는지 보여주는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나의 올드 오크> 영화를 보고 자료를 조사하여 글을 쓰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연결되고 싶었지만, 연결되지 못한 TJ였다. 세상을 바꿀 힘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활동했지만 그렇지 못함을 알게 되어 그런 나를 잊고,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가는 TJ. 사회적 인간인 나는 역시 다른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 느끼게 되는 든든함,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공동체원으로서의 의무감을 마주하고서 마음 속 울림을 듣는 것 같다. 켄 로치 감독이 아름답게 그린, 동화 같은 예술작품으로 타자윤리를 대하고서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된다. 누구나 할 수 없는 마음을 내는 일, 그것을 평범한 일상으로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예술가라는 점을.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을 함께 하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하나씩 변화시키다 보면 점점 상식적인 일상이 된다는 것을.
<참고문헌>
1. <벌집이 너무 좁아!>, 안드레우스 피 안드레우 글 킴 아마테 그림, 고래이야기, 2015
2. [숨은 명화 찾기] 빵과 장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켄 로치 감독의 <빵과 장미(2000)>, 박준용, 새가정. 2007-04:86-89
3. 블루칼라의 시인 켄 로치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켄 로치의 영화 세계, 유지나, 대한토목학회지, 2006-11 54(11):71-73
4. 켄 로치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싸우는 사회주의 영화작가, 최을영, 인물과 사상. 2013-05:63-77
5. 타인의 삶에 클릭하기 : 켄 로치의 ‘land and Freedom’, 이희승, 제3시대. 2016-07 88 :37-40
6. 영국 영화에 나타난 인권문제-켄 로치 감독의 사회파 영화들을 중심으로, 김시무, 영화평론 2004.1.31. 15:235
7. 익숙함과 낯섦: 난민과 환대에 대해, 김성민, 월간 공공정책, 2024-08 226:8-9
8. 영국의 난민정책: 시리아 난민 사례를 중심으로, 김성진, 정치 정보연구 제19권 2호, 2016 (pp.107-140)
9. 이주사회에서의 환대의 권리, 서윤호, 2019, 비교문화연구 56: 65-86
10. 백석 시에 나타난 동화적 상상력, 서덕민, 한국문예창작학회, 2010, 한국문예창작 vol.9 no.1 (43-70)
여전히 부족한 나에게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는 방향을 잡이주시는 고마운 분들 덕분에 쓸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