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신 변호하자면
한심한 ENFP
라고 포털 검색을 해보았다. 평상시 내 자신에게 가끔씩 드는 생각이었다. 이것이 ENFP 의 특징 중 하나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오늘 내 자신을 생각하면서 검색어로 넣어 보았다. 세상 사람들은 이 단어를 쓰기는 했을까? 그런데 우습게도 주르륵 뜨는 연관 검색 결과에 놀랐다. ENFP 스스로가 하는 말보다는 ENFP 를 만나거나 사귀었던 사람들이 쓴 글로써 ENFP 에게 학을 떼듯한 사람들의 고민들이 담겨 있었다.
내가 ENFP라 눈을 번쩍 뜨고 살펴보게 된다. 도대체 ‘나’들이 무슨 한심한 짓을 그들에게 했기에 사람들이 블로그 등에 ‘손절한다’고 쓰게 하는 건지, 그들이 얼마나 분하면 ENFP에 대한 화를 이곳에 배설하는 건지, 무슨 일 때문에 다신 ENFP랑 안 사귄다는 건지 궁금했다.
사람들이 ‘나’들한테 하는 말을 차근차근 읽어보았다. 그 글에 달린 댓글들까지. 많이 언급되는 말이 ‘ENFP들이 자기 중심적’이라는 거다. 패턴화해본다면 이렇다.
지 기분좋을 때
나한테 잘해주다가
지 화나거나 그러면
감정대로 행동한다.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지 고집을 부린다.
그런 모습 이기적이다.
그래 ENFP 손절한다.
감정적이다. 이 말이 확 와닿았다. 내가 작년에 시민 연극을 하면서 이런 감정적인 캐릭터의 배역을 받아 연기한 적 있다.
잠시 연극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어릴 때부터 연극에 대한 관심이 있었지만, 연극은 남들에게 보여지는 공연예술이라 외모가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릴 적엔 외모가 출중해야 연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쁜 배우들, 잘생긴 배우들을 워낙 편애하던 매체가 만들어낸 사회적 기준도 한몫한 듯하다. 그러다보니 연극에 관심은 있어도 감히 도전하지 못하는 분야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몇년 전 아는 선생님과 연극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그분이 내게 연극을 해보라고 권해주셨다.
차이브 씨, 시민들이 연극을 하는 곳이 있는데, 한번 가보지 않겠어요?
차이브 씨 성격이 유니끄한 것이
연극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 말을 듣자마자 마음 속에 연극! 두 글자가 일렁일렁 거리더니, 놓칠세라 인터넷 수소문으로 찾아냈다. 곧 운명에 이끌리듯이 양재동에 위치한 생활연극 네트워크의 작은연극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이년 뒤 졸업공연을 하면서 조연 캐릭터를 맡게 되었다. 우리 연극학교 기수의 졸업공연을 연출하는 선배는 내 모습을 보면서 점점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캐릭터를 만들어주었다. ‘만든다’는 표현이 맞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이, 연습 시간 때마다 내 연기를 하면 연출님은 이 부분에서는 이렇게 감정을 표현해보는 것이 어떨까, 하고 조언을 해주었다. 우리의 졸업 작품이라는 큰 그림 안에서 내가 가진 캐릭터의 색깔을 찾아주고 있었다. 연출님은 나에게 감정대로 행동하는 캐릭터로 방향을 맞추고, 나에게 맞는 디테일을 챙겨 주었지만, 실은 나는 그 연기를 하기 두려워했다. 어느 날 나는 연출 님에게 물었다.
화가 나면
상대 배역에게 소리지르고
마구 화를 표출하고 그러라고요?
기분 좋을 때는 친절하게 새침하게 그렇게 행동하고요?
어…, 그러면 미친 사람 아닌가요?
이상하지 않나요?
나는 감정 표현의 세기는 다르지만, 어릴 때는 이렇게 표현하며 살았다. 내 감정대로. 그러나 그 모습 때문에 나중에 사람들이 보여주는 반응 (쟤, 왜 저래!)에 나도 모르게 후회를 했다. 우아하지 못했고, 어른스럽지 못했다. 스스로를 한심하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세상 사람들은 화가 나는 순간에도 감정을 절제하고 어쩜 그렇게 차분하게 화를 표현하고, 이성적으로 반응하지? 내 주변 사람들이 그랬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 신기하고 놀랍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가 닮아야 할 성격 모델, 지향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향대로는 되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휘몰아칠 때 이성적으로 반응하기 어려웠다. 감정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억지로 눌러본 적 있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약한 부위에서 터져 나오곤 했었다. 다행히 점점 나이가 들어갈수록 감정이 약화 되다보니, 화가 무뎌지는 걸 느낀다.
연출부 선배들에게 내 캐릭터의 요상한 느낌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내가 이런 캐릭터를 표현하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고 싶었다.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을 표현하려는 것인가. 내가 보기에 그런 모습은 미친 사람(사.이.코),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에 내 스스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이라고 규정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이 연극하는 사람들이 그랬다.
아니요. 사랑스러운데요.
그럴 수 있겠다 싶어요.
자기를 힘들게 하는 상황이니까.
감정을 표출하고 화를 내며 허공에 발길질, 주먹질 하는 모습이… 근데 사랑스러운걸요.
(사진 설명: 졸업 공연 <분장실> 중에서. 감정적인 내 캐릭터가 친절할 때와 달리,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상대 배우에게 화를 분출하는 장면. 절대 봐 주지 않는 모습. 이렇게 화를 내다가 자신의 분이 끝까지 차서,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니며 허공에 주먹질을 한다. 그러면 상대 배우는 평정을 되찾고, 내 인물의 감정을 맞받아주기보다, 감정의 불균형으로 이 상황을 해소한다. 평정한 사람과 화를 내는 사람과의 싸움이 어떻게 끝이 나겠는가… 하하하)
사랑스럽다니, 이해된다니, 연출부 선배들, 그리고 같이 공연을 하는 사람들에게 들은 답변에 나는 흠칫 놀랐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 나는 내가 연기할 캐릭터에게 무슨 짓-왜 이렇게 관객에게 얄미운, 꼴불견의 모습의 캐릭터로 설정-하려는 거야 라고 생각했었는데, 사랑스럽다니, 내게 놀라운 일이었다.
이게 가능한 답변이란 말인가? 나는 집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내가 보는 한심한 ENFP의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나와 다른 해석, 처음 연결되는 말에 어지러웠다. 부연설명이 필요했다.
브런치를 검색해보았다. ENFP를 넣어서. 브런치에 특정 MBTI들도 ISTJ나 INFP 등 검색해보면 글의 양이 꽤 된다. ENFP로서 살아가는 직업인 이야기도 있고, 나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삶 이야기와, 결과 해석글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 중 한 가지 글이 눈에 띄었다. 브런치 신서희 작가님의 매거진 <내 마음은 오늘도 공사> 중에서 “우리나라에는 정말 ENFP가 가장 많을까- MBTI에 대한 오해와 진실” 글이었다.
글에 따르면 김영하의 북클럽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자신이 ENFP라고 답한 사람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많을까 하는 물음을 던져 전문가로서 이에 대한 답변을 하였다. 작가는 MBTI는 자기보고식 검사라는 것이 맹점이라고 한다. 이 검사는 내가 나를 평가하다보니 주관적이어서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나에게 편한 것이 아닌, ‘내가 되고 싶은 것’ 쪽으로 자꾸 체크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근 젊은 세대에게 ENFP는 트렌트에 딱 맞는 유형이라고 한다. 잘나가는 인싸 유형의 대표격이어서 사람들의 내면에 ENFP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이다.
인터넷에서 내 검사 결과 ENFP 라고 나오면 그 때마다 내가 하던 고민이 이거였다. ‘내가 과연 제대로 체크한 거 맞나?’
나는 어릴 때부터 내가 아싸라고 생각해왔고, 감정적인 표현 때문에 후회나 한심한 결과를 낸 적이 종종 있어서 멋진 성격에서 벗어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작가님 설명을 들어보니 ENFP가 자존감 높고, 자기애 강하고, 열정적이고, 아이디어가 많고, 사람을 잘 다루고, 분위기를 잘 띄우는 인싸 스타일의 각광받는 유형이라고 한다. 사랑스러운 유형이라고 한다.
사.랑.스.럽.다.
내 성격에 대해 한번 더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이고 감정적인 ‘나’들을 위한 얼렁뚱땅 변호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본 글들 속의 한심한 ENFP 와의 관계에서 손절하겠다는 사람들의 마음은 무엇일까. 사람과의 관계는 그 안으로 들어가야 알 수 있는데, 글쓴이와 그의 친구인 ENFP사이에 대화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아주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뜻인데, 사람과 만나다보면 완벽하게 만족하는 관계는 없다. 때로는 실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동안 상대가 내게 했던 것을 생각해서 단점이나 부족한 점을 이해해주기로 하는 것이 관계를 지속시키는 힘일 것이다. 한마디로 정으로 만난다는 표현과 비슷하달까. 그러나 그 옛정을 떠올려도 절대로 내가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그 관계는 정말 정리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서로 이해가 안 되는 사이라면 말이다. 그래요. 우리 사이 여기까지가 끝인가봐요. 그러나 ‘나’들은 한심한 건 아니에요.
ENFP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샘솟고, 감정이 풍부하여 그것을 일상에서 칙칙 뿌리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그 감정을 무척 많이 표현한다. 거기엔 부정적인 감정도 포함이 된다. ENFP가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표현을 했다면 사과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도 자신의 감정으로 상처 받은 상대에게 죄를 뉘우치면 사과를 할 때도 진심을 다한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스럽게 봐주지 않고, 사과해도 처음의 상처는 없어지지 않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는 상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의 경우는 ENFP여서 손절한 것이 아니고, 자신과 맞지 않는 어떤 유형의 친구라도 손절했을 것이라 본다.
그러니 ENFP 당신 탓이 아니다. 사랑스러운 ENFP임을 알자. 사랑스럽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여 좋을 때는 좋다고, 화날 때는 화난다고 표현하는 그것도 사랑스럽다. 완벽한 사람보다 빈틈이 보이고 실수하는 사람에게 인간미를 느끼는 것처럼, 감정을 표현하는 ENFP 모습이 사랑스럽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감정을 감추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는 교육을 받아왔다. 이성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받았고, 내 감정대로 행동하며 사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내 것에 대해 항상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람들이 타고난 본연의 모습을 존중해주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의 본연의 모습 속에는 스스로 수양해야 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러한 부분은 추후에 ‘애니어그램’을 정리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이것을 통해서 나는 수양해야할 부분(=단점과 비슷함)을 인지했다.
모든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개성과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을 인식하고 나의 본연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살아가자.
나는 내 감정을 소중하게 여기기로 했다. 남들이 사랑스럽게 본다는 그 부분, 그것이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