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 나오는 로봇 만화를 자주 봤다. 다간, 선가드, 골드런 이런 것들. 자연스럽게 그것이 실물화된 장난감에도 관심을 많이 가졌다. 자연스럽진 않나? 하여간 엄마 말에 따르면 나는 '교회 가는 길에 발견한 문방구에서 지 몸뚱이만한 소방차'를 사 줄 때까지 우는 종류의 꼬마였으며, 그보다 살짝 더 나이가 먹고 나서는 길에 다니는 차종을 외울 정도로 메카닉한 무언가를 좋아했었던 부류였다. 보통 어린 시절에 로봇을 좋아했다고 하면 공대에 진학에 직접 로봇을 만드는 아름다운 스토리도 많던데, 사회 > 과학이라는 이유만으로 문과생이 돼 버렸고 호기심은 취미에서 멈춰버렸다.
아이들의 완구는 손오공에서 DX라고 불리는 등급으로 많이 나왔다. 아까 말한 다간, 선가드 같은 것들은 90년대 기준 4~5만원 정도면 30cm가 조금 안되는 장난감을 살 수 있었다. 우리 집에도 하나 있었다. K캅스에 나오는 제이데커라는 로봇이었는데, 커다란 트럭과 로봇으로 변신하는 경찰차가 합체해서 큰 로봇이 된다. 그 당시 막내는 너무 어려서 분배에 끼지 못했고, 나랑 둘째가 합의 하에 하나씩 나눠 가졌다. 나는 부피가 크고, 큰 로봇이 될 때 몸체의 상당부를 차지하는 트럭을 갖겠다고 했었던 것 같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DX 로봇이다. 잘 사는 집은 아니어서 그랬으려나, 기억을 할 수 있는 시점의 나이가 되고서는 굳이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른적이 없기도 했다. 어린시절에 DX의 빈 칸을 차지했던 건 식품완구라고 불리는 장난감이었다. 동네 슈퍼에 가면 500원에 살 수 있었다. 껌이나 사탕을 넣어서 장난감 주제에 슈퍼에서 유통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상품이었다. 저작권 이런게 희미한 때였고, 국내 업체가 일본 제작업체의 그것을 대충 베껴서 싸구려 연질 플라스틱으로 뽑아낸 장난감을 팔았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도 많이 팔았지만, 나는 주로 집 근처 '할아버지 슈퍼'라고 불렀던 곳에서 샀다. 게이트에서 부품을 뜯어내 조립했다. 잘 안 뜯어지는 건 이빨로 끊었다. 싸고, 로봇이고, 만드는 재미도 있었다. 비슷한 종류가 많이 나와서 나중엔 설명서를 보지 않고도 만들 수 있을 정도가 됐다.
500원이라는 과자 한 봉지 가격에 변신과 합체가 가능한 조립 로봇 장난감이라는 건 말이 안 되는거다. 이렇게 풍성할 수 없다. 500원짜리만 생기면 저걸 샀다. 박스에 난 조그만 구멍으로 상품 번호 확인하고 가지고 와서 싸구려 껌 씹으면서, 조잡한 설명서를 보고 만든다. 빨갛고 파래야 할 로봇이 보라색이고 하늘색이었다든가 하는 문제가 좀 있었지만 가지고 노는데는 상관없었다.
이것도 잠깐이었다. 타의에 의해 로봇을 못 가지고 놀게 됐다. 4학년 쯤 되니까 미니카가 유행이었고, 5학년쯤 되니 탑블레이드가 유행이었다. 그거 말고는 고전적으로 내려오는 구슬치기나 딱지치기 같은 게 있었다. 생각해보면 미니카-탑블레이드나 로봇이 뭐가 다른가 싶은데 다르게 느껴졌다. 중학교에 올라가니 아예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죄다 게임하거나 - 축구하거나 - 만화/판타지 소설을 보는 부류만이 존재했다. 나도 친구들의 취미에 맞춰 놀던 와중에 한 친구가 사이버 포뮬러에 나오는 레이싱카를 종이로 만들어서 가지고 온 걸 봤다. 엄청난 충격이었는데, '아니 대체 이것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물어보다가 종이모형에 대해 알게 됐다.
종이모형은 이쪽에서도 좀 더 마이너한 취급을 받는 취미다. 파고들자면 종이 그램 수 따져가는 수준으로 파고들 수 있지만 가볍게 생각하자면 인터넷에 널린 도면 PDF 파일 다운 받아서 뽑고, 자르고 풀칠해 접으면 되는거다. 돈도 거의 안 들면서 프라모델 비슷한 느낌으로 내가 좋아하는 모형을 만들 수 있다. 게임의 폐해를 우려한 가정환경으로 집의 컴퓨터에는 인터넷이 연결돼 있지 않았었기에 이웃집이나 친척집에 가 도면 파일을 디스크나 CD에 구워왔다.
처음 만든 건 건담이다. 퍼스트 건담 로봇을 종이로 만들었다. 건담이야 잘 모르고, 내가 좋아하는 건 슈퍼로봇 계열이긴 했지만, 올라온 로봇 도면 중 만만해 보이는 게 그거였다. 뽑아만 뒀는데도 로봇을 산 것 마냥 맘이 그득 찼다.
A4용지는 약해서 딱풀로 A4용지를 한 장 더 겹치고 무거운 책으로 눌러두어 풀이 마르면서 종이가 우그러지는 걸 방지했다. 완벽하게 마르면 굵은 선 따라 자르고, 접는 선은 칼금을 살짝 낸다. 목공용 풀을 조금 짜고, 이쑤시개로 접착면에 펴바른다. 맞게 붙이고 살짝 기다리면 부품이 하나 만들어진다. 부품 몇 개를 이으면 로봇의 허리 혹은 다리 혹은 몸통이 만들어졌다. 조금씩 완성돼가는 모습에 부품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뿌듯해했다. 입체적인 선을 따라 매끄럽게 손 끝을 긁는 종이 질감도 좋았다. 다 만들고 나서는 행여나 찌그러질 까봐 딱딱한 종이로 만들어진 박스에 넣었다. 그게 뭐라고 친구들한테 가져가서 보여주기도 했었다.
나름 만족하면서 만들다보니 커뮤니티에 사진을 올리기까지 했다. 이 시점에서 포인트는 종이모형에서 커뮤니티로 옮겨갔는데, 그 쪼끄만 커뮤니티에서 친목질을 서슴지 않으면서 온라인 친구들을 만들어냈다. 집에 카메라가 없어서 집 근처 도서관에 공부하러 갈 때에 도서관 컴퓨터 캠으로 사진을 찍어서 업로드했다. 캠으로 모형 사진을 찍으려면 배경이고 뭐고 손으로 모형을 들어서 캠에 가져다 대야한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조회수나 댓글에 신경을 엄청 쓰면서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 내가 조회수나 댓글수에 민감했던 최초의 시점이 그때인듯. 뷰가 1천-2천은 나왔는지, 댓글이 열댓개는 달렸는지 공부하다 쉬는 시간마다 도서관 컴퓨터실에 내려가서 확인했다.
종이모형이 손에 익은 다음에는 좀 어려운 로봇류도 만들었다. 고정형이 아니라 가동형 모델들이었다. 하나는 가오가이가를 따라 만든 커뮤니티 회원의 자작 로봇이다. 서른장 가까이 되는 내 기준 대형 모델이었는데, 중3 여름방학 최대의 성과물이다. 그랑죠 시리즈로 잘 알려진 변신로봇도 만들었었다. 사실 이런 모형 제작은 문제가 좀 있다. 나이 먹고서야 깨달았는데, 종이모형들은 대부분 저작권 무단 도용으로 만들어진다. 이걸 판매하해서 수익 내는 사람도 있는데...마이너하고 시장성도 없어 보여서 안 잡나? 싶다.
대학가서도 남는 시간엔 뭐 할 게 없어서 잠시 종이모형을 만들었다. '고아라폰'으로 찍은거라 화질구지이긴 마찬가지다. 만들어서 동기들 선물로 주고 그랬음. 그래서 귀여운 캐릭터들이 있다.
종이로 만든건데 십몇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잔해가 남아있다. 엄청 많았는데, 고등학생 때 시험 못 보면 '내가 이걸 만드느라 공부 안 해서 지금 성적이 이 모양이다'라며 찢어버려서 별로 안 남아있다. 시험을 여러번 못 봤나보다. 이렇게 방치하다 언젠가 없어지겠다 싶어서 남은 것들을 사진으로 찍어뒀다. 대학 갈 때까지만 해도 서랍 한 칸 차지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위치가 바뀌다보니 어렸을 때 모았던 책 위에서 먼지를 맞고 있다. 괜스레 맘에 걸려 더 까먹기 전에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