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 한참 어렸을 때 종종 나이를 먹고 서른이 된다는 걸 상상하곤 했다. 막상 닥쳐보니 시시하기 짝이없고 별로 슬프지도 않다. 생각해보면 스물셋, 넷의 내가 생각했던 '서른'보다 스물여덟, 아홉, 서른의 내가 생각하는 '서른'은 훨씬 시시하다. 이십 대 후반, 그리고 지금 와서 서른을 생각한다는 건 과자를 한참 먹다가 문득 '아 이 과자 맛이 어땠었나' 돌이켜보는 거랑 비슷하다. 맛있지, 혹은 뭐 그냥 그렇지. 근데 뭐 그게 중요한가? 먹던 거나 마저 먹자.
이십 대 초반의 나에게 어른의 기준은 서른이었다. 서른이 되는 해의 카운트다운이 끝나는 순간 '짜잔! 넌 이제 빼도박도 못하는 어른이 됐다! 이건 민증과 차원이 다른거라구!!' 같은 거라 그렇게 정한 건 아니었다. 서른이면 인생의 어떤 단계들을 거쳐 내 삶의 양식과, 방향과, 상황이 어느 정도 잔잔해졌을 때이지 않았을까 싶어서 생각하게 된 기준점이다. 아직 자식도 없고, 당분간 자식을 만들 생각도 없는 내가 보기엔 통장에 정기적인 노동의 결과물로 세 자릿수의 만원짜리가 꽂히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일단계 정도 되는 어른이 된다. 서른은 그러면서 한창 뿌리를 뻗어가는 중의 시점일 뿐이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물결에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게 지긋지긋했던 이십 대 초반은 안정을 희망했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어른들이 다들 젊은 게 좋다고 하는 것처럼, 어린애들은 하나같이 빨리 나이를 먹고 싶어 했다.
너는 옛날로 다시 돌아갈 수 있으면 갈 거야? 흘러간 시절로 시간을 돌리는 게 불가능하단 걸 이미 알지만, 이런 질문에는 꼭 진지하게 생각하고 답하곤 했다. 추억은 있었지만 아니야, 그때의 나는 더 커다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그래도 아닌 것 같아. 지금의 나는 그때의 불안함까지도 추억거리로 삼으면서 그 시기를 사랑할 수 있지만, 그래도 어렸을 때로 돌아가고 싶진 않아. 서른이 된 나라고 불안함을 떨쳐버린 건 아니다. 그래도 그 때와 비교가 되진 않는다.
신촌의 그 많은 술집 중에서 유난히 이 집에서만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 집이 기억에 뚜렷하게 남는 건 순전히 이름 때문이다. 그 이름 때문에 여느 술집이면 있는 흐릿한 주황빛 조명이 눈에 어른거리고, 쩌든 테이블의 감각이 손 끝에 묻어있는 거다. 서른 즈음에라는 이름엔 내 이십 대 초반의 불안함이 끼워져 있다. 순전히 그 이름 하나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