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IBS Oct 20. 2019

영상러 전직 1년, 배운 것들

대학 다니면서 교지 만든다고 내내 글 쓰고, 이후로도 습관처럼 썼다. 기자가 되고 나서 2년 반 동안 거의 매일 쓰고, 퇴사하고 나서도 시간이 남다 보니 개인적으로 뉴스레터를 만들어보면서 또 많이 썼다. 작년 여름을 기점으로 영상러로 전직(?) 한 이후에는 대체로 영상제작을 위한 뼈대로서의 글만 만들었지 목적 자체가 글인 무엇은 많이 만들어내지 않았다. 글만 쓰던 애가 글은 도외시하고 대충 1년 조금 넘게 영상 작업을 한 셈인데 개인적으로 배운 것들을 정리해본다. 물론 나는 '개허접(이것 외에 적절한 단어는 더 심한 비속어만 떠오름)'이기 때문에, '어 이거 아닌데?' 싶은 부분들이 있을 수 있음은 주의.


글의 리듬, 영상의 리듬


뻔한 얘기인데, 영상이든 글이든 기본적으로 스토리의 전달이다. 스토리가 가장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만들 줄 알아야 하고, 가급적이면 독창적인 이야기를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영상과 글은 다르지 않다. 잘 짜인 스토리가 중요하고, 차별화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게 차이를 만들어 내는 콘텐츠의 알맹이다.


다만 글만 쓰던 애가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건 영 좋지 못한 태도인데, 텍스트 하나만 있는 글과 그렇지 않은 영상의 전달 방식에선 큰 차이가 나기 때문. 글의 리듬감과 영상의 리듬감은 꽤 다르게 느껴졌다. 예컨대 글로 봤을 때 나쁘지 않았다-괜찮았다 싶은 것들이 영상으로 넘어갔을 때 적절하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본다.


구글독스 너무 좋다 진짜. 이제는 HWP 뿐만 아니라 워드도 OUT!!


이건 지금 만들고 있는 작업물 스크립트의 일부. 녹음은 부분적으로 문장이 삭제된 버전으로 들어갔다. 눈으로 볼 땐 그냥저냥 볼만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걸 영상으로 옮기면 생각보다 지루하겠다 싶은 부분들이 있었다. 텍스트 하나만 있는 글과 여러가지 요소를 함께 전달하는 영상 간 스토리 전달 방식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전체 분량에서의 비율 고민도 있었다. 물론 글도 전체적인 비중 조절이 중요하지만, 전체적인 소비 속도와 습득 정도를 독자가 조절할 수 있는 글과 달리 영상은 기본적으로 제작자가 콘텐츠 소비에 적절한 템포를 먼저 제공해야 하는 게 맞다고 본다. 스킵이나 배율 재생은 여기에 실패해서 독자가 굳이 손을 대야 하는 경우가 아닌가 싶다.


쓸 수 있는 장치가 많다


콘텐츠를 통해서 전달하려는 무엇이 있고, 그 무엇을 전달하기 위해 영상은 쓸 수 있는 장치들이 많다. 예컨대 내가 요즘 재미를 붙인 BGM 같은 경우 잘 쓰면 강조점을 자연스럽게 줄 수 있고, 필요한 분위기를 깔아줄 수 있다. 보통 텍스트에서 쓰면 구리다고 여겨지는 밑줄이나 볼드랑 좀 다른 느낌. 내가 만드는 게 주로 3분에서 5분 남짓의 뉴스 영상이라는 한계가 있는데도 쓸 수 있는 것이 정말 많다고 생각했다. 화면의 포커스를 어디에 둘 것인지. 어떤 화각으로 장면을 담아낼 것인지, 시선은 어떻게 이동할 것인지, 어떤 폰트를 사용할 것이며 주색상은 무엇으로 할 것인지, 인물이 등장한다면 표정과 제스처를 어떻게 잡을지, 목소리의 톤과 속도를 어떻게 설정하는지 등등 이야기의 전달 방식을 달리 가져갈 수 있다. 톤과 매너를 조절하는 방식이 글보다 조금 더 다채롭다고 느꼈다. 글은 상대적으로 좀 더 예쁜 단어나 문장을 사용할 때 강점을 가진다. 글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데, 이런 경우는 덜 보여주는 것으로 완성되는 경우도 많아서 뭐가 더 낫고 아니고의 문제는 아니다.


홍콩시위 관련 아이템인데 이거 편집하면서 사운드의 중요성을 조금 깨달음


당일치기 여행 브이로그. 편집할 때 썼던 음악과 색감으로 기억하고 있다

 

컷은 항상 내 생각보다 부족하다


촬영 나가기 전엔 미리 스토리보드를 써 둔다. 이미 머릿속에선 이런저런 흐름에 따라 영상이 만들어져 있다. 이제 구현만 남았다! 생각하고 촬영을 나가는 데, 돌아오면 항상 컷이 빈다. 하긴 카메라 대고 찍을 때부터 느낌이 온다. '아 컷이 비겠다' 현장에서 즉석으로 뭔가 더 채워서 오긴 오지만, 그래도 사무실로 들어와서 컷을 올려보면 부족한 간격들이 눈에 들어온다.


컷은 항상 내 생각보다 부족하다. 아직 내가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 영상 기획이 업인 사람이 제작물을 잘 만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 아닐까. 머릿속의 그림을 잘 그리는 능력. 머릿속의 그림과 현실 간의 간격을 좁히는 능력. 머릿속으로 그리더라도 최대한 디테일하게 구상하는 능력.


구상과 구현을 위해선 개인의 감각이랄까,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공부를 많이 하는 게 중요하다. 예전에 '내가 잘 모르는데 레퍼런스 같은 거 보다가 따라만 하는 사람이 되면 어쩌지'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남들의 개쩌는 제작물 때문에 나의 오리지널리티를 찾을 기회가 사라지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 지금 보면 세상 쓸모없는 고민이다. 공부하기 싫어서 하는 핑계 아닌가 싶을 정도. 그림은 자기 능력만큼 그려지는 거고, 독창성은 충분한 앎과 익숙한 스킬을 바탕으로 나온다. 레퍼런스를 많이 봐 두고, 따라 해 보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했는지 공부를 해야 자기의 그림을 그릴 능력이 자란다. '아 여기서 컷을 겹쳐가지고 디졸브를 넣으면 컷의 연결성이 상당히 좋고 제법 그럴싸 하구나, 나중에 써먹어야겠다.' < 같은 경험이 반복되어야 스킬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가 구상한 걸 잘 만들어 낼 수 있는 거 아닌가 한다.


진짜 다행스럽게 생각대로 나온 컷


두 번은 없다고 생각하자


영상은 기본적으로 제작에 시간이 많이 든다. 단계 단계마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방법들을 만들어놓고 시간낭비를 가급적 최소화해야 한다. 손을 빠르게 만들거나 자잘한 시간 낭비를 없애는 것도 중요한데, 그것보다 중요한 건 두 번 일하지 않는 거다. 스토리보드를 짜는 단계에서 '아 이거 좀 애매하다. 약간 빌 수도 있겠는데' 싶으면 100% 빈다. 러프한 계획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촬영 준비도 마찬가지다. 뭐 하나 망치고 오면 회복이 안 될 때가 많다. '오디오 안 들어간 것 같아요' 같은 말이나 '연결 잭 안 챙긴 것 같아요' 같은 말이 제일 식겁하다. 이런 사고를 방지하는 게 정말 중요한 듯.


스토리보드는 나가기 전에 최대한 디테일하게 짠다

촬영 준비는 최대한 꼼꼼하게, 필요하겠다 싶으면 다 가져간다

프리셋은 시간 날 때 다듬어둔다

소스 폴더 분류를 잘해두고, 편집 전에 자료 정리를 잘해둔다


인천공항 촬영. 여기를 어떻게 두 번 오냐. 멀기도 멀고 허락도 다시 받아야 한다.



세상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괜찮은 글은 혼자 써야 한다. 그래야 전체적인 분위기 유지가 된다. 반면 괜찮은 퀄리티의 영상은 혼자 만들기 어렵다. 협업이 꼭 필요하다. 잘 쓰는 사람, 잘 찍는 사람, 잘 편집하는 사람, 감각이 좋은 사람, 디자인을 잘 짜는 사람 등등이 함께하면 더 좋은 영상이 나온다. 이때 내가 맡은 파트를 빠지지 않게 잘 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일을 잘 알고 서로 메워주는 게 중요하다. 돈 받고 하는 일, 더 규모가 큰일이 될수록 내가 맡은 부분은 줄어드는데, 이때 일이 줄었다고 놀지 말고 일과 일의 이음새를 매끄럽게 하는 데 시간을 써야 한다.


일을 하다 보면 이 일의 경계라는 게 참 애매하다는 생각을 한다. 손발을 잘 맞추는 게 중요하달까.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제작물을 발전시키는 방향을 같이 잘 잡아야 한다. 내가 아니라 동료가 책임지는 영역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이 들어도 믿고 맡긴다. 반면에 내가 잡고 가야 하는 영역이라면 확실히 이 부분은 어떠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좋은 커뮤니케이션은 할 말을 하고, 하지 않을 말을 굳이 붙이지 않는 데 있다. 그게 쓸데없는 리소스 낭비를 막는 길이다.


"아 요 정도 해 놓으면 나머지는 OO님이 할 수 있겠지"

"OO님이 저거 하는 동안 나는 이걸 해 두면 나중에 일이 편하겠다"

"아 이렇게 말을 하는 거 보니 OO님 머릿속엔 대충 이런 게 있구나"

"전체 작업 기간이 이 정도면 OO님, 나, ㅁㅁ님 사이에서 시간 분배를 요 정도 해 놓아야겠다"

"이건 OO가 더 잘 알겠지, 하자는 대로 가자"


디즈니의 콘텐츠 제작 시스템(?)
특히 디자인 작업할 때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슬란드 간 세끼'가 노리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