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할머니 보러 갈까~?"
"삼촌이랑 이모랑 많이 왔다 갔다 해서 괜찮아~ 다음에 내려올 때 보게"
명절을 맞아 집에 가는 중에 외할머니가 위독했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피를 토하셨다고 한다. 대학 병원까지 갔다가 다행히 회복되어 다시 머무시던 요양병원으로 돌아왔다. 각지에 사는 자식들은 깜짝 놀라 예정보다 고향으로 일찍 내려와 할머니를 보고 갔다. 가족들이 모이는 설날이었다. "정말로 돌아가실 뻔 했다"는 말에서 서늘함과 위험이 과거로 흘러갔다는 안도감이 함께 느껴졌다.
할머니는 올해로 81세, 몇 년전 몸이 안 좋아지면서부터 요양병원에서 사셨다. '외할머니집'이라고 불렀던 한적한 시골집엔 이모부만 종종 왕래하며 취미삼아 농사를 지을 뿐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다. 할머니는 집을 잊었다. 치매기가 있으셔서 자식들은 알아봐도 손주들은 헛갈려하는 정도다. 요양병원은 집에서 걸어서 십분이면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자식들이 병원 근처에 살아 자주 왔다갔다 하지만, 자주 안 왔다고 섭섭해 할 때가 있으셨다고도 했다. 거동이 불편해 보조인이 없으면 안 된다. 폐에도 작은 암덩어리가 있었다. 쇠락해가는 육체에 생겨난 암덩어리는 아주 서서히 자라 당장의 삶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할머니가 다시 괜찮아졌기 때문에 명절이 끝날 무렵 자식들은 안심하고 다시 삶으로 돌아갔다. 나는 엄마가 준비한 묵직한 종이백을 들고 장성역에서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다. 베스킨라빈스 31이 적힌 파랗고 빨간 종이백. 친척이 어제 파인트 하나와 쿼터 하나를 담아왔던 그 종이백엔 명절에 만들어진 버섯전과 새우전, 산적, 어제 냉동실에서 꺼내 지진 잡채, 이모부가 고향에서 선물로 가져온 구운 김과 집에서 손수 만든 간장이 담겨있다. 이것도 부족한지 가는 차 안에서 먹으라고 한라봉 3개와 오예스, 쿠크다스 같은 과자가 묶인 비닐 위에 어지럽게 뿌려져 있다. 아침 먹고 바로 탄 10시 기차였다. 어쩜 이렇게 무거울까. 명절에 밥상 앞에 앉으면 끊임없이 더 먹으라고 재촉하던 외할머니 생각이 잠깐 났다.
지겨운 풍경을 4시간이나 헤치고 용산에 도착했다. 신촌 가는 버스를 타고 40분을 더 갔다. 버스에서 내려 10분을 걸어 집으로 갔다. 문을 열고 가방을 바닥에 내렸다. 내내 앉아있었으면서 장거리 이동도 고생이라고 한숨을 작게 뱉었다. 편한 바지에 다리를 꿰어넣는 중에 휴대폰이 울린다. 아빠는 매번 자식이 올라가면 잘 갔는지 확인 전화를 한다. '저녁에 잘 도착했다고 전화를 하려 했는데 일찍도 한다' 생각했다. "다시 내려와야것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대"
장성까지 바로 가는 KTX는 수요 문제로 예전에 없어졌다. 광주까지 KTX를 탔다. 좌석이 없어 입석으로 끊었다. 아까 덜 읽었던 소설책을 마저 읽었다. 버스 탔을 때 생긴 멀미가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인지, 입석이라 측면을 보고 가야해서 그런지 머리가 쿡쿡 쑤셨다. 올라가는 기차에서 핸드폰을 만지작 거린 탓에 남아있는 배터리는 얇은 빨간 선을 그렸다. 할 게 없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기차를 갈아타고 새마을호로 한 정거장을 더 가 저녁 7시에 다시 장성역에 떨어졌다.
장례식장까지는 걸어갔다. 분위기가 걱정됐다. 엄마는 어떨까. 아빠는 늘 그렇듯이 밖에서 별 다른 감정이 담기지 않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있었다. 1층 특실에 마련된 빈소에서 잠깐 기도를 하는 듯 마는 듯. 엄마 얼굴을 먼저 살폈다. 가라앉은 슬픔에 일단 안도했던 것 같다. 인사를 하고 겉옷을 벗고 다른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설이라며 엊그제 큰 외삼촌 집에서 함께 점심을 먹으며 봤던 얼굴들이다. 가라앉았지만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남겨진 가족은 바쁘다. 외삼촌과 이모들은 꾸준히 들어오는 손님을 맞았다. 당일이라 손님이 많진 않았지만, 꾸준히 왔다. 조카들은 술상을 만들고 서빙을 했다. 술안주용 과일과 마른안주, 수육, 홍어회, 전, 회무침, 몇 가지 나물. 사람이 오면 술상을 내고, 밥을 먹는다 하면 흰 밥과 된장국을 담았다. 차려진 자리에는 손님과, 이모 혹은 삼촌이 앉았다. 술을 달라면 소주와 맥주를 한 병씩 드렸고, 술은 됐다고 하면 식혜와 탄산음료를 냈다. 필요한 게 더 없는지 물어보면서 기다리다가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들이 오고간 자리에서 남은 찬을 한 데 모으고, 일회용 용기들은 겹쳐 쌓고, 바스락거리는 상보의 모서리를 모아 쓰레기 봉지처럼 만들어 치웠다. 나무젓가락과 플라스틱 숟가락, 종이컵이 비면 채웠다. 잠시 앉아서 마른안주를 주워먹으며 쉬다가, 손님이 오면 일어나 일을 했다.
어른들은 주로 빈소에 앉아있었다. 오는 손님을 맞고, 인사를 하고, 홀에서 손님과 이야기를 했다. 가끔 음식을 더 끊어와야하는지 체크했다. 고객이 슬픈 와중에 가격을 따지고 들지 않는 상황을 고려한 단가가 눈에 들어왔다. 설에 다녀간 부산 사는 이모가 울면서 도착했다. 동생도 다시 왔다. 엄마와 외숙모가 다니는 교회에서 한 번, 할머니가 생전 다녔고 막내 이모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또 한 번 왔다. 삼촌네 회사 사장이 왔고, 마을 사람들이 왔으며, 지역 정치인도 다녀갔다. 꽃과 깃발이 늘었다.
슬픔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가족을 떠나 보내며 손님을 맞았다. 죽음을 위로하기 위한 공간은 안부를 묻는 장이기도 했다. 장례식이라는 건 남겨진 가족들을 바쁘게 하고, 사람들을 붙여 슬플 틈을 한껏 줄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인을 하루 앞둔 날엔 아침부터 새벽까지 바빴다. 차리고, 치우고, 부족한 것을 묻고, 필요한 것을 날랐다. 장례식장에 있었던 조카만 15명이었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는데도 정신이 없었다. 허리는 아프고, 바닥을 자주 스친 양말에는 검은 때가 묻었다. 사촌이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은 내가 2만 6천걸음을 걸었다고 알려줬다.
밤에는 조의금 계산한다고 바빴다. 찾아온 사람의 이름을 정리하고, 노랗고 푸른 종이를 스무장, 백장씩 세어 다시 봉투에 넣었다. 갚아진 돈, 갚아야 할 돈들이 한데 섞였다. 슬픈 날에 돈 문제로 말이 안 나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첫번째가 정확한 계산이고 두번째는 계산에 기반한 서로간의 이해다. 어른들은 감사 인사를 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갈무리했다. 밤 10시까지 서빙하고, 1시간 반동안 돈을 세고, 30분간 새벽 늦게 찾아온 이웃에게 인사를 하고 새벽 두 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잤다.
가족을 잃은 슬픔은 간헐적으로 울컥 찾아온다. 입관식에 다녀온 이모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나는 입관식이 고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임을 나중에야 알게됐다. 발인예배를 보내며 작은 외삼촌이 직접 쓴 마지막 편지를 읽을 때는 눈물이 문 밖으로 흘러 나갔다. 아무렇지 않게 웅얼대던 찬송가도 '고인이 살아생전 가장 좋아하신 찬송'이라던 노래가 되면 그렇게 마음을 친다. 그 찬송가의 가사는 "주님 다시 뵈올날이 날로 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 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였다. 발인의 순간, 화장장에 들어가는 순간, 추모공원에 함을 안치하고 발길을 떠나는 순간마다 눈물이 찬다. 삼촌과 이모는 함을 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로 바로 타지 않고 한참을 바깥에 서 있었다.
비어있는 순간은 남아있는 가족이 메운다. 세상에 조카들이 이렇게 많았냐며 단체 사진을 찍었고, 오늘 고생했다며 치킨이나 과자 같은 걸 사서 나눠먹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 어떤 명절에도 이 정도 규모의 대가족이 한 번에 모인 일이 없었다. 원래는 명절마다 외할머니집에서 하루든 이틀이든 다 같이 자고 갔는데, 조카들이 고등학생이 되고 20대를 훌쩍 넘겨버리면서 같이 점심 한 끼 먹는 정도로 대폭 축소됐다. 몇 년 만에 보니 누나는 서른을 넘었고, 고등학생이었던 사촌 동생이 이십대 후반이 됐다. 가족들은 서로의 식사를 챙겨주며, 이야기를 나눈다. 이웃은 조의금이라는 물질적 도움과 앉았다 가는 시간이라는 정신적인 지지를 보내고, 교회는 힘든 순간마다 함께하며 고인이 천국에 가셨을거라는 위로를 건넸다. 이 모든 게 남의 일이었을 때는 한없이 뻔한 것들이었다. 내 일이 되니 얼마나 큰 종류의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알게됐다.
다시 장례식장에 돌아와 상복을 벗었다. 옷을 갈아입고, 정리하고 짐을 챙겼다. 어른들은 비용과 조의금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다 같이 식당에 가서 가족끼리 삽겹살을 구워 먹었다. 상실의 슬픔을 여미고 여느 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날이 다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