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숫자가 변했는데 나는 왜 무덤덤하지?
24년 1월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연말연시 들뜬 분위기에 나도 실컷 흥에 취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사회생활도 안 하고 회사를 관둔 지 어느덧 만 4년을 향한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회사 다닐 때는 연말에 주로 경영계획 보고서를 쓰곤 했다.
사무실 분위기에 빠져 있으면 분주하게 한 해를 보내고, 활기찬 새 해를 맞이한다.
23년에 나는 육아에 전념했다. 애를 낳으면 인생이 바뀐다는데, 인생이 많이 바뀌더라.
인생 통으로 놓고 봐도 가장 큰 변화를 준다.
먹여 살릴 가족을 위해 돈을 더 열심히 벌어야 하는데, 이 부분은 다소 아쉽다.
나는 누군가에게 퇴사 후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회사를 박차고 나오지 않았다.
그냥 모든 상황과 생각이 퇴사를 향했다.
당시에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퇴사 이유를 설명하는데 애를 먹곤 했다.
이해를 못 하겠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여전히 나는 물 흐르듯 흘러가는 인생을 자꾸 거꾸로 거스르는 기분이 든다.
나는 여전히 내적 방황 중이고, 불안하다. 회사 다닐 때도 불안했지만, 지금 보다 덜 불안했다.
연말에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코로나 시작과 동시에 나는 퇴사를 했고 한동안 사람을 안 만났다.
사람 만나는 시간이 아까웠고 나는 먹고 살 준비를 해야 했다. 초조함을 드러 내고 싶지 않았고 어떤 미세한
감정적인 영향을 받고 싶지 않았다.
12월 29일 신당역 중앙시장 앞에서 2년 6개월 만에 친구를 만났다. 이 친구는 그동안 싱가포르에 주재원을 했다. 그리고 11월에 한국으로 다시 복귀했다.
우리는 서로 할 말이 참 많았다. 친구보단 오히려 내가 말을 더 많이 했다. 얼마나 말이 많았으면 오후 1시 30분에 만나서 집에 오니 밤 11시가 되었다.
친구의 아내도, 나의 아내도 나와 내 친구의 술 모임을 이해를 못 했다. 둘이 무슨 할 말이 그리 많냐?
나도 놀랬다.
싱싱한 회 한 접시에 소주잔을 기울였다. 싱가포르에는 이런 저렴한 횟집이 없다면서 벌써부터 들떠 있었다.
올해 나는 술 한 잔 제대로 마시지 않았다. 술 모임 나갈 일이 없었고 어쩌다 술을 마실 기회가 있어도 조금 마시는 시늉만 하곤 했다.
연말이고 친구와 할 말도 많고 천천히 소주를 마셨다.
사는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 20대, 30대 시절 추억을 소환하기 시작하니 슬슬 웃음꽃이 폈다.
주재원 생활 이야기도 들어보니 나도 모르게 그런 생활이 부러웠다. 물론 내가 회사 있을 때 주재원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불가능했다.
그렇게 회사 이야기도 어떻게 쭉 하다 보니 서로 할 이야기는 다 했다.
이 친구는 회사생활을 참 좋아한다. 회사 가는 게 마치 고등학교 때 학교 가는 기분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좋고 직장에서 인정받는 기분이 좋다고 했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쭉 봐서 그런지, 사회생활을 잘할 친구라 느꼈는데 정말 잘한다고 느꼈다.
친구가 참 대단하고 멋져 보였다.
이런저런 고충이 많은 곳이 사회생활이고 회사생활인데 즐겁게 즐기는 그 기운이 나에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알게 되고 친구의 좋은 점을 배우고 싶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참 많은 것을 놓쳤고, 내 마음 대로 하고 싶어 했다. 이 친구와 성격에서 서로 다른 면이 명확해서 그런지 사회생활에서 드러나는 모습 또한 차이가 많았다.
인간관계를 잘하는 이 친구 모습을 어려서 잘 봐왔다. 어느덧 그 어렵다는 인간관계 노하우를 많이 쌓았다. 심지어 그게 장점이라는 것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회사에 있으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지내다 보니 세상을 대하는 시야가 좁아지고 성장 속도가 더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친구를 보니 여느 회사원에게서 느끼는 그런 분위기와 다르게 오히려 많이 성장했고, 에너지 넘치는 기운을 받았다.
반대로 사람과 상호작용 없이 근 4년 가까이 혼자서 뭔가를 해보겠다고 동굴 속에 지낸 나는 그냥 혼자만의 세상에 살았다.
인간관계가 어렵고 힘들고 때론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좋은 기운을 얻고 보람도 느끼고 성장을 시켜주는 게 또 인간관계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좋은 기회를 얻기도 한다.
어쩌면 난 불필요한 에너지를 줄여보겠다고 인간관계를 회피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나이대에 어느 정도 갖춰야 할 인적 자본이나 인간관계 스킬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만, 그 목표 달성은 험난하고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무엇을 위해 내가 이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솔직한 내 마음은 그냥 회사생활이 싫었다.
친구와 술 한잔 하며 나눈 대화에서 그리고 친구의 얼굴표정에서 내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느끼는 부분도 많았고 기분 좋은 대화도 있었고 그렇게 10시간 동안 이 식당 저 식당 옮겨 다니며 술을 마셨는데, 다음날 숙취가 없고 몸과 기분이 참 깔끔했다.
술 모임을 즐기지 않는데, 이 친구랑 술 한잔 하면 술 마시는 내내 재밌고 다음날 숙취도 없더라.
그렇게 23년을 마무리했다.
눈도 오고 날씨는 흐리고 겨울이지만 그렇게 춥지는 않고 새해가 밝았다.
올 해는 퇴사 만 4년을 지나 5년 차에 접어든다.
모두가 그러듯이 내가 하는 일이 좀 더 잘 되고, 또 한 번 성장하고 도약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랄 뿐이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