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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 Jun 26. 2021

제가 좀 게을러도 될까요?

자네 어디 아픈가?



어떤 날 이장님께서 조심스럽게 내게 물으셨다.



"자네... 혹시 어디 아픈가?"



직장도 없어 보이는데 집 밖으로도 잘 나오지 않는 나를 두고 동네 어른들은 이런저런 추측을 하셨던 것 같다. 나이 어린 여자애가 덜컥 쓰러져가는 시골집에 와서 혼자 지내는데, 좀처럼 집 밖으로도 나오질 않고 일하지도 않는 것 같으니 혹시 어디가 아파서 요양차 내려온 게 아닐까 하고. 걱정과 궁금함이 섞인 그 질문을 조심스레 건네받고는 난 한참을 서서 웃었다. 내가 왠지 소설 <소나기>에 나오는 아프고 가녀린 도시 아이가 된 것 같아서. 그 상상의 여자아이와 튼실한 나의 외모가 겹쳐지니 상당히 이질적이어서 너무 웃긴 거다. 나는 한참을 껄껄대다 당찬 목소리로,



"아, 저는 그저 아주 건강한 백수입니닷!"



하고 답했다. 몸이 아프진 않은데 마음이 좀 아파서 시골에 온 거라고, 쉬고 싶어서 일도 안 하고 맨날 노는 거라고 설명을 덧붙여 말씀드렸다. 이장님은 이해하겠단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셨지만 그와 곁들인 너털웃음 사이로 역시나 특이한 아이 같단 마음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



18:58, 18:59... 19:00!


"......"


19:23...

19:34


"저녁 먹고 오실 분?"



다들 익숙한 듯 겉옷과 휴대폰을 챙겨 나갔다. 참 이상하다. 퇴근을 안 하고 저녁을 먹고 오자는 이 분위기. 퇴사를 할 때까지 나는 그 분위기에 적응을 하지 못했다. 일하는 시간에 한껏 집중해 몰아치게 일을 하고 퇴근 후의 내 시간을 온전히 지키고 싶은 성향의 나는, 야근을 해야 할 땐 주로 저녁도 먹지 않고 일을 하면서 한 시간이라도 당겨 퇴근을 하려 했다. 일이 많은 날에는 퇴근 시간을 맞추기 위해 점심도 거르고 일을 하거나 어떤 날은 새벽 일찍 출근을 해 부족한 업무를 보기도 했다. 일의 특성상 야근이 불가피했지만, 굳이 초과근무를 하지 않아도 일을 제시간에 마칠 수 있는 날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회사 사람들은 업무 시간을 비교적 느슨하게 보내고 퇴근 시간이 지나면 한두 시간씩은 당연한 듯이 계속 자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을 사무실에서 보내는 것이 어떻게 저렇게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항상 그들이 신기했다. 이미 오랜 시간 그런 회사생활이 익숙해진 그들에게도 역시, 퇴근하자마자 도망치듯 사무실을 벗어나는 나는 희한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일을 다 마치고도 "퇴근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내가 늘 죄인처럼 느껴졌다는 데에 있다. 가끔은 웃으며 모두가 함께 일찍 퇴근을 하기도 했지만 남아서 일을 하는 동료들을 두고 나올 땐 마음이 항상 불편했다. 그렇다고 숨 막힐 듯한 퇴근 눈치게임을 피하러 손을 늦게 놀리거나 일부러 자리를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업무를 끝내고 퇴근 시간이 되어 퇴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나는 왜 눈치를 보고 있는가. 그래서 나는 칼퇴라는 말이 불편하다. 그 안에 담긴 연장 근무의 당연함이, 칼- 이라는 접두사가 주는 묘한 죄책감이 싫었다.


일과 삶의 균형이 맞아야 업무도 효율이 오르는데 그러지를 못하니 머리가 물 먹은 솜이불을 이고 있는 양 무거웠다. 어느 날 퇴근 후 집에 와서 퉁퉁 부은 종아리를 살펴보다 무릎 뒤에 시퍼런 선이 죽죽 그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터질 것 같이 튀어나온 굵거나 자잘한 핏줄들을 보니 그제야 아차, 싶다. 몸이 악에 받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목디스크와 편두통은 물론이고, 야근으로 늦은 밤에 집으로 돌아와 건너뛴 끼니를 챙기니 얼굴은 항상 부어있었고, 자고 일어나면 역류성 식도염으로 목이 칼칼하고 따끔거렸다. 아무래도 난 이렇게 일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루 여덟 잔의 커피를 마신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옳고 그름의 문제 역시 아니었다.



-



나는 지금 '거의' 일하지 않는다. 귀촌을 하고부터 일을 하지 않았으니 1년 반을 백수로 지내고 있다. 프리랜서로서 일감을 갖긴 했지만 정말 아주 가끔이라 부담스럽거나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여서 무리 없이 진행했다. 일이 없는 나는 종일 잠을 잘 때도 있고 느지막이 일어나 이른 저녁을 먹으며 반주를 한 잔 하고는 노래방 가사를 띄어놓고 노래를 부르거나 좋아하는 드라마의 대사를 따라 해 보는 시시콜콜한 놀이를 즐긴다. 마당에 불을 피워 놓고 잔가지나 종이를 태우고 달이 크게 뜬 날은 집 앞 논가에 서서 밤을 구경한다. 비가 오는 날에 특별함을 새기고 어묵탕을 끓여 소주를 마신다. 몸을 움직이는 일은 기껏해야 텃밭에 풀을 뽑고 이것저것 심어 가꾸는 일이나, 이마저도 일이라기 보단 취미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미세먼지나 날씨 핑계를 대며 그마저도 자주 지나친다. 주로 누워서 빈둥거리니 집을 치울 일도 거의 만들지 않는다. 그야말로 한량 중에 한량. 풀피리까지 불었으면 완벽했을 텐데(?). 처음 겨울과 봄을 보내면서 그간 바쁘게 살아온 내게 주는 보답이라고 생각하며 마음껏 나를 내버려 두었고, 그다음 계절은 나를 돌보는 일에 집중한다는 핑계였지만 사실 너무 더워서 주로 눕거나 앉아 맥주나 마시자 하였다. 또 그다음 계절은 재밌는 일을 찾아 이것저것 시도해보면서 부지런함을 가장한 게으름을 부렸다. 1년이 지나고 나서야 이제 조금씩 나의 이 게으른 생활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 말이야, 이렇게 게을러도 괜찮은 걸까?"

"네가 뭐가 게을러."

"아니, 밥 해 먹고 텃밭 가꾸고 그런 거 말고 말이야. 돈 안 벌고 이렇게 노는 거. 아무래도 이제 슬슬 서울에 다시 돈 벌러 가야 할까 봐. 나이 서른에 돈 오백이 수중에 없다는 게 왜 이렇게 불안하냐 난."



말은 저렇게 하고 있었지만 다시금 퇴근을 향한 눈치게임에 뛰어들 자신이 없어 사실은 강력한 거부감이 들었다. 온몸의 세포가 절대 그럴 수 없다며 뉴런을 타고 찌르르 신호를 보내는 것 같은 만화적 상상까지 더했다. 어느 누가 고즈넉한 시골 일상 대신 비 오는 월요일 출근길의 버스를 타고 싶겠나.



"돈도 많이 주면서 효율적으로 일하는 회사도 있지 않을까?"

"뭐 어디 구글 들어가시게?"

"야이 씨"

"아, 있겠네."

"그래, 잘 찾으면 있을지도 몰라!"

"근데 그 회사가 너를 왜 받아줘."

"...에라이."



나는 적게 일하고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이 생활이 꽤나 체질인 듯싶다. 물론 적게 일하고 많이 벌면 더 좋겠지만, 이 생은 능력면에서 이미 틀렸으니 나는 적게 일하고 적게 버는 쪽도 만족하기로 했다. 그런데 요즘은 의문이 든다. 내 게으름 이대로 정말로 괜찮은지, 이러다 나이만 먹어 집도 없이 거리에 나 앉게 되는 건 아닌지. 여든이 넘은 어르신들도 저렇게 매일 부지런히 일하시는데, 하다 못해 굽은 허리로 도로가에 꽃을 심고 계시는데. 젊고 건강한 나이에 이렇게 집에 박혀서 영화나 보고 술이나 마시며 노는 게 어쩐지 죄스럽다. 언제부터 나는 게으르면 불안한 청춘이 된 것일까. '젊어서 노세'라는 노랫말도 있는데, 어쩐지 젊어서 놀면 안 될 것 같단 말이지- 아마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청춘들이 게으르면 불안한 병에 걸린 것이 틀림없다. 특히나 태어나면서 쇠수저 같은 것도 물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더 부지런히 일해서 집을 사고, 차를 사고, 경쟁처럼 또래와 속도를 견주며 미션을 완수하듯 삶을 대해야 할 것만 같다. 가진 것이 없을수록 가지려고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니겠냐고 자신을 몰아세우면서.


물론 나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으로 나만이 가질 수 있는 것들을 마구 놓쳐 오면서 살았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어서 이렇게 불안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이렇게 난 조금은 변했고, 삶은 고유하니까 모두 같은 무늬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자위하기는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문득 나 이대로 괜찮은지, 하고 묻게 된다.



제가 지금 일을 하지 않고 게으르게 놀고 있는 것이 괜찮은 걸까요. 아무리 봐도 확실히 어딘가 좀 아파 보이는 일이긴 한 거겠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괜찮다고 답할지도 모르겠다. 쿨하고 멋지게 인생을 즐기라고 조언할 것만 같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그와 반하는 삶의 패턴을 학습해서 후회가 남았거나, 그런 삶을 동경하지만 그러기엔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어서 다른 이의 용기를 응원하며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물론 미리 자신이 경험해 본 바, 괜찮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저런 대답을 떠올려보지만 어쨌거나 이 질문은 나만의 것이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결국은 내가 선례가 되어야 할 답. 그러니 스스로 온전히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에 이리도 마구 휘청대는 것이겠지. 성공적인 사례로 남고 싶어서, 이토록 깊게 고민하는 것이겠지.



서툰 글로 마음을 풀어쓰고도 역시 답을 정리하지 못했다. 다만, 잠시 눈꺼풀을 내려 기도하는 것으로 오늘의 고민을 마음에서 조금은 덜어내 보기로 했다.


게으름이 불안한 청춘인 나와 당신 모두, 부디 짧게 고민하고 오래도록 즐겁기를. 종교는 없지만 오늘만큼은 안녕 대신 아멘이라 갈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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