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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 Jun 14. 2021

삶에 ‘적정한 때’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모 심는 사내의 이름을 생각하다가



그의 이름은 세 자였으나 종종 그의 어머니로부터 다정히 한 자로 불리었다. 어리광도 부릴 줄 모르는 철난 아들이었고 같은 학급의 여자 동급생들에게는 숫기 없는 또래였다. 촌의 계절이 나고 자라기를 반복하며 그의 생도 소년과는 멀어져 갔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당신의 흙먼지 날리는 하루를 닮지 않기를 바랐으나 우직한 그의 성격에는 공부보다는 논농사가 더 잘 어울렸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그는 중매로 고작 세 번 만난 여자와 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고, 제대 후에는 본격적으로 모를 심고 거두어들이는 숭고한 일에 자신의 하루를 재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동이 트기 전에 나가 해가 지고 난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지만 저녁 상에 올라온 김치 몇 조각에 막걸리를 곁들이며 그는 생을 위로했다. 아내를 닮은 아들과 자신을 닮은 아들의 아이를 일 년에 서너 번 보는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몇 안 되는 낙으로 삼으며 그의 시간은 그렇게 천천히 늙어가고 있었다.



-



땅을 뒤엎고 논에 물을 들이며 초여름이 시작되었다. 해가 지는 시간이 늦어질수록 어른들은 더욱 분주해져 갔다. 개구리 울음소리 짙어질 무렵 본격적으로 모내기가 시작됐다. 투박한 농기계 왼쪽 창가로 턱 하니 걸친 그의 그을린 팔꿈치가 그간의 숙련된 노동을 가리키고 있었다. 길에는 트랙터가 떨구고 간 질퍽한 흙들이 버려진 소똥처럼 놓인다. 나는 집 앞에 나가 그 떨궈진 흙처럼 덩그러니 서서, 슬며시 나를 논 다듬는 풍경 속에 세웠다. 그리곤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생을 가늘게 짐작해보는 일로 한가로이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한 사람의 생을 감히 읽어본다. 절반은 어미의 사랑이었을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가난했던 생을 위로하는 음악이었거나 금붙이였거나 여인이었거나 뭐 그런 것이었을, 그 이름을 생각했다. 모가 세워지는 논을 바라보며 다음 절기에 성큼 자라 있을 그 깜박할 세월을 떠올린다. 아쉽고, 찬란하여 왠지 서글픈 마음마저 드는 것 같았다.





그저 자연의 허락에 따라 땅을 엎고 물을 대고 모를 심고 거두는 단순한 과정 속에 지난했던 한 인간의 생애가 복잡하게 녹아있다. 논을 다듬는 모든 손길에서 지나온 숱한 실패와 지혜가 묻어있다.



만약 물 댈 시기를 놓친다면 논은 어떻게 되는 걸까?



마치 내 삶이 벼를 기르는 일이라면, 그래서 삶에 그처럼 적정한 때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는 지금 어떤 절기에 와 있는 것일까.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그 적정한 때를 제대로 맞춰가고 있는 것일까. 모판은 잘 준비한 것인지, 물은 잘 댄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트랙터처럼 그럴듯한 농기계는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웃음). 오래도록 논농사에 생을 바친 그에게, 아버지는 지금 어떤 절기에 와 계신가요, 인생 농사가 잘 되신 것 같나요? 물어나 볼까 싶다가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동네에 이상한 여자가 왔다고 소문이 날 것 같았다. (다시 생각해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나는 텃밭에 호미나 깨작대기로 했다.



-



“뭘 그렇게 심어요?”

“앗. 이거 열무요.”

“흙을 살- 덮어야 할 건데.”



지나가다 나의 작은 텃밭에 짧은 안부를 묻는 그는 장화에 묻은 진흙을 탁탁 털어내며 오늘 그의 몫을 끝낸 듯 보였다. 나는 몰래 눈으로 그의 걸음을 저울질하며 그 고단함을 헤아려 보았다. 그에게도 농사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기 이전에 가졌던 이름이 있었겠지. 다정하게 한 자로 불리었을지도 모를 이름. 발자국을 따라 세어봤지만 아무것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뒷걸음을 보니 어쩐지 버려진 것도 아닌데 그의 젊음이, 그 지나온 자리가 한없이 아까웠다.


그러면서도 고된 일상의 해넘이 같은 그의 웃음이 지나치게 해사하여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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