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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 May 04. 2021

이방인이 되어 쓴 편지

한때 가장 가까웠던 친구에게



안녕. 잘 지내는지.



이 말을 하고 나니 한동안 다른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네. 아마도 습관처럼 적절한 단어를 고르고 있었나 봐.


나는 요즘 아침에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습관이 생겼어. 겨우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던 내가, 여기에 오고 나서 참 많이 바뀌었어. 아마 넌 이런 나를 상상도 못 할 거야. 책을 읽다 버릇도 생겼는데, 하나는 문장에 우리의 지난날을 겹쳐 보는 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엄마를 잠깐 기억하는 거야. 일종의 기도랄까 묵념 같은 거 있잖아. 처음에는 아침부터 이게 뭐 하는 건지, 내가 드디어 경증 우울을 넘어섰나 보다 싶었는데 이게 하루, 하루 계속되니까 기분 참 묘하대. 어쩐지 좀 시원하기도 하고 말이야. 당연히 해야 할 일과처럼 느껴져.


아마도 나는 뭔갈 잃어버리고도 울기 싫어서 모른 체하는 아이였던 거 같아. 늘 상실 앞에서 태연한 척했다는 걸 알게 됐어. 이제야 그 상실의 슬픔들을 매일 조금씩 꺼내보는 중인가 봐. 그것들을 아주 구석구석 보내 나를 훑게 한 다음 보내주는 긴 배웅을 하고 있어. 그 배웅엔 물론 당신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지.





난 요즘 박연준 시인의 글을 좋아해. 오늘 읽은 그녀의 산문집 <소란>에 이런 구절이 있더라.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나는 사람마다 각자 경험하고 지나가야 할 일정량의 고유 경험치가 존재한다고 믿거든요. 다 겪지 못하면 다음으로 못 넘어가는 거죠. 당신을 사랑하고, 또 헤어지던 순간은 꼭 필요한 경험이었어요. 나는 그 일을 긍정합니다.’



우리가 헤어진 일이, 지금 와서 생각하니 정말 시인의 말처럼 '고유 경험치' 였었나 봐. 우리를 '다음'으로 넘어가게 하기 위한. 적어도 내겐 그런 것 같아. 나는 내가 넘어온 그 '다음'이 꽤나 근사하니까.


근데 그 시절에 난 눈물이 필요 이상으로 많았었지. 아마 한때 가장 가까웠던 친구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나 봐. 오해할 걸 알면서도, 나중에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수 있겠냐고 네게 물었던 건 내 미숙한 진심이였어. 절대로 그럴 수 없단 네 표정을 보면서 관계가, 그렇게 서로를 깊게 파고들었던 그 촘촘한 시간들이 하루아침에 증발해 버린 것 같아 난 좀 허무했던 게 아닐까 싶어. 그때의 내 눈물의 의미를 그렇게 찾아냈어.





나, 서울을 떠나던 날 당신에게 보냈던 짧은 문자가 내내 마음에 걸렸어. '고마웠다'는 인사만큼은 조금 긴 호흡으로 하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어, 혹시나 당신에게 그게 여운으로 비칠까 봐서.


엄마를 보내던 날 말이야. 당신이 하필 내 삶, 그 타이밍에 나와 시간을 나눠 쓰고 있어서, 마구 휘청거리는 내 뒤에 서 있어줘서, 아기처럼 맘껏 울어버릴 수 있었다고 그래서 고마웠다고 꼭 얘기해주고 싶었어. 서툰 이별이 결국은 할 수 없는 말을 만들었네. 앞으로 내가 열심히 '우리'를 잊어가더라도 화장터에서 내 어깨를 붙들던 그때의 당신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거야, 우정이란 잔상으로 오래오래 남겨두고 싶어. 함께한 많은 날 중에 그 정도쯤은 간직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니까.





친구를 잃은 우리를 잘 위로해 주자. 우리의 인연이 ‘딱 거기까지.’라서가 아니라 그냥 그 이별이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기 위한 왕깨기 같은 거였다고, 우리의 삶을 관통할 수밖에 없는 꼭 필요했던 순간이었다고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머리가 한결 가벼워. 그러니 그저 당신도 우리가 만나고 서로를 떠나온 시간을 잊기 위해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적어 보내. 넌 결코 이 편지는 읽지 못하겠지만.





우리가 좋아했던 계절이 오고 있어.

너무,

잘 지내지는 않기를 바라.





2020년 4월

이방인이 된 옛 친구, 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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