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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 May 03. 2021

끊어진 철길 위에 누워서

먹고 살 걱정, 걱정, 걱정.



정오가 다 될 무렵 개 짖는 소리에 겨우 눈을 떴다. 지난밤과 그전에 지난밤 모두 잠을 설쳤으므로 침대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간 너무 게을렀기에 새해에는 나를 조금 다그치자고 마음먹은 참이었지만, 나를 깨울 이도 깨울 일도 없는 일상에선 게으름이 늘 정답이 된다.





오늘도 부지런하기는 실패했다는 좌절감을 떨쳐내기 위해 휴대폰을 들고 ‘산뜻’이라고 이름 붙여놓은 음악 재생 목록을 눌렀다. 평소에는 종일 잠옷을 입고 있지만 오늘은 부지런히 옷도 갈아입는다. 단순한 이 동작이 실은 아주 상징적이라고 느낀 건 최근 들어서다. 이상하게 잠옷을 갈아입어야 비로소 새 일상이 시작되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커튼을 젖혀 오늘의 맑은 날씨를 확인한다. 부엌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찰스가 멍! 하고 짖는다. 찰스 굿모닝. 밥을 늦게 챙겨 미안한 마음으로 마당에 나가 찰스와 그의 이름 없는 떠돌이 친구(훗날 ‘제임스’라는 이름이 붙음, 물론 그는 자신이 제임스인지 모름.)에게 밥을 챙겨주고 밤 사이 그 제임스란 친구가 마당에 어질러 놓은 쓰레기들을 치운다. 도대체 왜 우리 집으로 물고 오는지 모를 물건들. 옆, 옆집 할머니 장화, 옆집 아저씨 장갑(추정), 쥐 대신 새가 붙어버린 쥐 끈끈이까지. 윽.


느으린 박자로 발 박자를 맞추며 마당을 정리한다. 삽으로 열심히 찰스 똥을 치우고 장갑 낀 김에 분리수거도 한다. 그리곤 잠시 돌에 걸터앉아 멍- 시간을 멈추어 둔다. 두 마리 강아지 마당 뛰노는 걸 한참 지켜보다 들어와 손을 씻었다. 커피를 내리고 창문을 모두 연다.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청소기로 여기저기 머리칼들을 쓸고 청소기 필터도 비운다. 괜히 스스로 기특한 마음이 드는 오전. 커피를 들고 청소한 러그 위에 앉아 최근 빠져있는 작가의 책을 읽는다. 그는 몇 해 전에 고인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왜 그가 당연히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왠지 그의 글이 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책장 끝을 오래 만지작거려 본다. 마음이 참 간사하지. 그의 마지막 문장은 ‘그것이 내 문학의 시작이었다.’로 끝이 났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는데 여전히 따뜻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마침 창 밖에서 환한 바람이 들어온다. 기다렸다 때를 맞춘 연출처럼 바람이 볼을 살짝 스치자 마음은 깊이를 모르는 물이 된 것 같았다. 지금 이런 기분을 잊지 않도록 잘 적어두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붙들어 두고 싶은 순간이었고, 그게 바로 이 <아껴 쓰고 싶은 날들>의 시작이 되었다.



-



최근 들어 난 뭉근하게 기분이 좀 가라 앉아 있었다. 정신없던 집수리가 거의 끝나가고 일상이 정리되니 슬슬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드는 것이었다. 내가 저질러 버린 일에 대해 스스로를 대견스레 여기면서도 내 앞날을 펼쳐두고 종종 한숨을 지었다. 빠르게 앞자리가 바뀌어 가는 통장 잔고를 보면서, 짧은 커리어마저 내팽개친 난 대체 뭘 먹고살아야 하나,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꼭 철길 위에 누워 있는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죽음도 별 것 아니란 듯 호기롭게 기찻길 위로 뛰어들었으면서 막상 누워있자니 언제 달려올지 모를 기차가 두려워 눈을 질끈 감아 버린 그런─.


그 찌질한 기분이 봄바람 좀 분다고 달래지는 게 어쩐지 우습기도 해 책을 베고 러그에 덜렁 누워 버렸다. 낮은 바람이 또 분다. 배 위에 얹은 손가락이 간지럽다. 나는 철길 위에 누운 내 모습을 상상해 봤다. 볕을 받은 쇠와 돌들이 등 뒤에서 따뜻하게 느껴지고, 이름 모르는 풀이 스치는 냄새가 난다. 여전히 눈은 질끈 감고 있네.



"겨울을 거의 다 지나는 중이야 지금. 그러니까 그 길에 뛰어들던 용기를 잃지 말고 좀 더 편히 누워있어 봐. 눈 뜨고 하늘도 좀 보고 이 사람아. 불안해하기엔 날씨가 너무 좋잖어. 사실 이 기찻길은 끊긴 지 오래돼서 기차 따윈 애초에 오지도 않는다구.”



조용한 바람이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 준다. 아니, 바람은 입이 없으니 바람을 앞장 세워 내가 나에게 괜찮다고 말한다. 미래에 대한 고민은 해도 해도 덧없으니 이만 그쯤으로 해두고 지금 주어진 순간을 모든 감각을 동원해 느끼라고, 짧은 위로를 건넨다. 그래, 부디 지금 순간에 살아있기로 집수리를 위한 그 <하찮은 계획서>에 적었었는데, 그새 까맣게 잊고 있었다.



-



오래 들어도 좋은 노래가 플레이리스트 제목처럼 산뜻하게 흐르는 방 안. 늦잠 후 부지런히 움직인 대가로 주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기한을 넘겨 며칠 연체된 책의 마지막 문장을 마침내 읽어내고, 아직 찬 겨울바람을 끼고 봄 햇살이 베란다를 통해 사다리꼴로 어질러지는 그런 일상이 다름 아닌 바로 나의 것이라고. 이런 아무렇지도 않은, 그래서 어떤 수식을 붙여도 제대로 형용할 수 없는 이 멋진 일상을 마주하기 위해 이렇게나 멀리 도망쳐 왔으면서도 한다는 게 그깟 먹고 살 걱정이라니.


게으름에 잠식당한 나는 어쩔 수 없이 변변한 벌이가 없는 채로 계속 불완전할 테니 그저 오롯이 완전한 오늘의 나를, 나의 찰나를 그냥 지지하기로 한다. 아주 소소한 순간의 입자들을 놓치지 않고 모아 가장 빛나는 날로 엮어 삶에 힘을 받는, 나만의 물리 법칙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한다.


다들 각자의 법칙을 따라 당장 행복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일의 날씨는 몰라도 오늘은 일단 날씨가 심하게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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