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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 May 20. 2021

오래 준비해온 대답

여행지에서의 사색



시골에 온 지 7개월쯤 되었나. 나는 여전히 여행지에 와 있는 기분이다. 낯선 곳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흘러가는 시간들. 이색적인 음식이나 알아듣기 어려운 외국어 대신, 젓갈이 많이 들어간 김치를 먹거나 종종 알아들을 수 없는 전라도 사투리에 어물쩡 웃음으로 대답을 회피하는 일이 정말 꼭 여행지에 온 기분이다. 아니지, 여행지가 맞는구나. 좀 오래 머무르고 있을 뿐!


분명 서울에서 같은 계절들을 보냈는데, 이상하게 계절이 훨씬 짙어진 느낌이다. 초록은 더욱 진한 초록이고, 빗줄기는 마치 눈에 보일 듯이 굵다. 갑자기 귀가 밝아진 것처럼 논에 우는 개구리 울음소리며 새벽을 우는 닭의 목청이 아주 선명하게 들린다. 내 목소리조차도 내 안에서 아주 크게 울린다. 여행을 떠났을 때만 느껴지는 확장된 감각의 느낌들.





탁한 일상을 환기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멀거나 가까운 곳을 여행했고, 가방 하나에 필요한 생의 도구만을 챙겨 캠핑을 떠났다. 언어도 생김새도 다른 사람들 틈에서 철저히 타인이 된 그 특별한 기분이 좋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옷을 가볍게 입고 비틀거리며 걷는 작은 일탈이 숨을 트이게 했다. 덥고 지쳐서 이제 그만 깨끗하게 씻고 포근한 내 침대로 뛰어들고 싶어 질 때쯤 집으로 돌아오는 그 회귀 본능도 즐겼다. 숨 막힐 듯 코 앞에 가까이 붙어 있다가도 이렇게 떠나버리면 삶도, 잠갔는지 열어뒀는지 모르는 가스밸브처럼 가물가물거렸다. 그런 단순함이 좋아서 나는 돈과 시간을 모아 자주 훌쩍 떠나곤 했다. 멀리 떠날 여력이 없을 때도 서울 근교로 가방을 싸고 나갔다. 강줄기가 작게 울거나 숲이 파도를 일으키는 그런 곳들. 주로 나의 여행은 친구들 혹은 연인과 함께 였다. 혼자 해 본 여행들도 아주 좋았지만 난 항상 여행지에서 곧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고 맛있는 걸 먹을 때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에 넣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당시에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구나, 나도.) 그러다 보니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여행지에서 보내는 시간을 더욱 애틋하게 느낀 듯하다.


지금에야 덜컥 떠나 여행지에 일상을 뿌리내린 탓에 매일을 여행지에 와 있는 셈이지만, 그 이전 몇 년은 멀리 떠나보질 못했었다. 월세나 공과금을 내는 일이 빠듯했고, 내 시간이지만 내 마음대로 일상을 쉬어가는 것이 불가능했으니 마음먹고 떠나는 일이 참 어려웠다. 아쉬운 대로 하루 이틀 짬을 내 국내 여기저기 다니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는, 기내의 건조한 공기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들뜬 설렘을 이코노미석의 불편한 등받이에 기대고 싶었다. 그즈음 이탈리아를 여행지 목록에 넣었다. 언제나 그랬듯 두 가지 재화만 확보된다면 가장 먼저 떠날 곳이었다.





어느 유명한 소설가가 아내와 함께한 10년 전의 시칠리아 여행기를 읽으며 누군가를 떠올리는 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와 나에게도 이탈리아는 오래 준비해온 대답 같았다. 나는 이탈리아 대신 글자들 속을 오래 머물렀다. 그 여행기의 주인이 되고 싶었을까. 나와 그 사람은 역할을 바꿔가며 그 작가가 되기도, 그의 아내가 되기도 한다. 지중해 햇살을 받으며 발코니에서 글을 쓰고, 아침 산책길 시장에서 산 오징어로 파스타를 만들어 먹기도 하면서. 스쿠터로 해안가를 산책하다 귤빛 풍경에 멈춰 서 사진을 찍고 나는 그런 이의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책을 덮으며 절대 그런 여행을 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을 하니 괜히 스스로가 미워졌다.


그래서 나는 그와 내가 오래 준비해온 그 대답을 반짝거리는 조각으로 남겨두기 위해 적어두기로 했다. 어딜 여행하고 싶냐고 물어올 때 우리는 설레는 낯으로, “이탈리아, 함께.”라고 말하고 있었다고. 우리가 서로의 시간을 엮는 동안 나의 대답은 한동안 그랬음을, 붉어진 얼굴을 하고 글로 새기기로 한다. 조개껍데기 줍듯, 마치 맞은 단어를 찾아 맨발로 지중해 해변을 거닌 그때 나의 순수를, 그 사람도 미웁게 기억하지는 않길 바라면서. 이게 나의 이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그 사람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우리를 남겨둘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서로가 부는 방향으로 따라 누웠으니 아마 분명히 그리 할 것이다.





여전히 이탈리아는 내게 떠나고 싶은 여행지이지만 이젠 그 여행지의 의미가 너무 퇴색해버렸고, 더는 일상을 환기할 목적으로 갈 수 있는 장소는 아니게 되었다. 누군가와 함께 떠나기로 했던 여행지를 혼자 갈 수도, 다른 이와 떠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럴 것이었다. 넓은 세계지도에서 Italy라는 글자가 지워진다. 이별은 이렇게 나라 하나를 사라지게도 만드는구나. 그래, 실로 엄청난 거구나.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오래 걷다가 마침내 뒤집어 놓은 하늘에 닿으면 그 자리에서 티셔츠를 벗고 뛰어들고 싶었다. 중세의 역사가 차곡 쌓인 성곽을 걸으며 어설픈 포즈를 잡고는 이상하게 찍지 말고 예쁘게 좀 찍어달라며 투정을 부릴 것이었다. 숙소에서 작은 말다툼을 하고 토라져 종일 각자 다니다 돌아와 맛집에서 포장해 온 피자에 맥주를 마시며 서로의 그 날 하루를 경쟁하듯 허풍을 섞어 자랑을 늘어놓을 것이었다. 플랫폼의 안내와는 달리 오지 않는 열차를 오래 기다리며 짜증을 내다가 몰려오는 잠 기운에 어깨를 내주고 손으로 얼굴에 작은 그늘을 만들어 줄 것이었다.


한동안 같았던 우리의 대답을 직접 여행하는 것 대신 이렇게 추억하기로 한다. 참, 멋진 여행이었다고 생각되게끔. 그래서 비로소 언젠가 나는 좋은 기억을 가진 채 이탈리아를 가벼이 여행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새로운 여행지에 와서 생각한다. 그때 그와 나의 대답이, 파도 아래 남겨진 끝이 뭉툭한 유리 조각 같은 그 무엇처럼 한참을 작게 반짝거리다가 자연스럽게 어딘가로 휩쓸려 가버려도 그대로 참 괜찮을 것 같다고. 그래서 어떤 의미도 추억도 남아있지 않은 이탈리아를 설레는 기분으로 여행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2020년 6월의 여름, 일상이 교차된 여행지에 머무르면서 여행지에 대한 사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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