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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Jan 28. 2024

안 본 눈 팝니다

퇴고 없이 쓰는 글

책을 사는 두 가지 기준은 다음과 같다.

하나는 내 마음에 드는 책. 다른 하나는 남의 마음에 드는 책.


전자는 두 번 이상 들춰볼 것 같은 책이다.

대부분의 추리소설은 여기서 탈락한다. '추리소설=범인/트릭 찾기'의 공식이 많이 깨졌다고는 하지만, 한 번 결말까지 읽고 나면 김이 새는 건 어쩔 수 없다. 십 년 전에 홀린 듯이 사 들였던 히가시노 게이고 시리즈나 셜록 홈스 단편집 이후로는 도서관에서 빌려 보고만 있다.

좋아하는 작가의 시집이나 소설집은 웬만하면 사서 모으려고 한다. 그 사람의 생각을 다 알아야만 할 것 같은 약간의 강박적인 마음도 한몫을 한다. 김영하 소설가나 박판식 시인의 것이 그러하다. 한때는 필사도 했을 만큼 열정적이었지만 지금은 그 노트가 어디로 갔는지도 잊었을 만큼 열정이 식었다고 느낀다.

최근에는 스토리텔링이나 시나리오 작법서를 많이 찾고 있다. 이것들은 뭐랄까, 글을 처음부터 읽어나간다기보다는 필요할 때 사전을 뒤져본다는 마음으로 책장을 열게 된다. 오프라인 나무위키를 구매하는 것이다. 일단 사 두면 나중에 쓸모가 있겠지. 책은 아직 나에게 목적이기보다 수단이다.


후자는 한 권쯤은 갖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책이다. 다시 말해 책에 대한 마음이 어떤지와는 큰 상관이 없다.

교양 수업의 독서 토론을 위해 사 두었던 <침묵의 봄>이나 <신화의 힘> 같은 두꺼운 인문/과학 교양서적들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굳이 사지 않았어도 아쉬움은 없었겠지만, 갖고 있는 책을 굳이 팔거나 버려야 할 필요성은 못 느낀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건 대부분 좋으니까, 블루리본 서베이 맛집을 지도에 저장해 두는 마음으로, 나중에 이 책을 읽을지 안 읽을지는 모르지만 갖고는 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자와 후자에 모두 속해 금방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절대 이 책에 관한 어떤 정보도 알려고 하지 마세요.

한 독서 유튜버의 추천 문구는 짧지만 강렬했다. 도대체 얼마나 놀랍고도 서스펜스가 넘치는 책이길래 이렇게까지 자신 있게 말하는 걸까 궁금했다.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던 나는 그 주에 바로 책을 구매했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마음에도 남의 마음에도 드는 그 책의 인기는 수직 상승하여 단번에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다.


책의 홍보 문구가 너무 강렬해서였을까. 나는 아직도 이 책의 초반부에 머물러 있다.

끝까지 읽어버리면 책을 살 때 느꼈던 설렘이 식어버릴 것 같아서, 이 책의 정체와 결말을 알고 나면 더 이상 흥분되는 감정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 책장을 넘기기가 두려웠던 것도 같다.

실망감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기대감을 낮추다 못해 시도조차 하지 않는 나의 행동이 우스울 지경이다.


오늘만큼은 다 읽고 싶은 마음에 북카페로 향했지만 자리가 없어 결국 만화 카페로 향했다.

만화 카페 한구석의 아늑한 골방에 들어가니 졸음이 왔고, 감은 눈을 애써 뜨지 않았기에 그대로 잠을 잤고, 눈을 뜨니 그래도 만화 카페에 왔으니 만화책이 읽고 싶어 <원피스>를 다섯 권이나 읽었다.

물고기는 오늘도 여전히 내 가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사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물고기를 들여다보고 싶은 나의 눈이 아니었나 싶다.


빛의 유무를 감지하는 데 불과했던 물고기의 눈에서 형형색색의 빛과 색을 구분하는 고급 눈으로 거듭나기까지 억겁의 세월이 흘렀다.

사고 싶은 책과 굳이 사지 않아도 되는 책을 감별하는 눈을 기르기까지 나에게는 십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나는 완벽한 눈을, 순간적인 충동과 영원히 이어지는 호기심을 구분해 낼 수 있는 눈을 마침내 가지게 되었다고 자신했었다.

하지만 가방 속과 책장 위를 물과 뭍처럼 왔다 갔다 자맥질하는 책을 보며 여전히 나의 눈은 물고기의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마음에도 남의 마음에도 쏙 드는 휘황찬란한 저 물고기조차 잡았다 놓아주기를 반복하는 '안 본 눈'을 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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