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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Jan 29. 2024

밀도 없는 말

퇴고 없이 쓰는 글

기다리십시오.

내가 너를 들여다볼 때까지 아무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너의 말에는 아직 줄기가 부족합니다. 뿌리는 아래로 계속 뻗어나가는데 위로는 아직입니다.

줄기 없는 말을 밀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밀은 물 없이도 오래 살 수 있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견디십시오. 이것은 당신이 택한 밭입니다.

너는 겁을 먹고 자랍니다. 기다림의 끝에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너의 뿌리가 가지를 치게 만듭니다. 발 없는 밀은 땅 속으로 들어가 버릴지도 모릅니다.

아직 나는 고개를 돌릴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너와 달리 나는 고개를 마음대로 돌릴 수 있기에 그것이 언제가 될지 나도 모릅니다. 준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기다리지 마십시오.

내가 고개 돌리지 않아도 빛을 찾는 건 줄기를 뽑아내는 건 너의 몫입니다. 모든 말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밀이 말이 될 필요는 없지만 나오는 말을 참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렇게나 넓은 땅에 혼자 지내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인 걸 알지 못하나요.

너를 들여다볼 나의 눈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위를 향하는 줄기를 막지 마십시오. 껍질 없는 밀은 없습니다. 뚫고 나오는 것만이 비로소 말이 됩니다.

나는 너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는 그저 나이 먹은 나입니다.

뿌리 많은 너를 다치지 않게 들어 올려줄 거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너를 쳐다보는 일은 앞으로 없을지도 모릅니다. 너의 뿌리를 자르고 나를 지나쳐 가십시오.

나는 모른 척하겠지만 마침내 나의 고개를 돌릴 준비를 할 것입니다. 물 없이 뿌리 없이 위로 솟구치는 너를 곁눈질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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