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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Jan 30. 2024

100일 휴가

퇴고 없이 쓰는 글

오늘 샤워는 어땠어? 평소와 똑같았겠지?

물어보지 않아도 되지만 괜히 물어보고 싶어. 내가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형은 늘 반복하잖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40초 만에 머리를 말리고 화장실 바닥을 물로 쓸고 두 개의 면도기 사이에 놓인 로션을 쭉 짜서 옆구리와 발뒤꿈치에 바르겠지? 그러면 다시 화장실 바닥이 더러워지겠지만 형은 신경도 안 쓰잖아. 형은 끝났다고 생각하면 뒤도 안 돌아보잖아?


형 음식은 빼고 주문했어. 오늘 저녁도 혼자 먹을 거지? 모니터 앞에 온갖 채소와 55초 데운 닭가슴살 큐브를 깔아 두고 먹을 거잖아. 음식이랑 눈도 안 마주치고 먹으면 체할 것 같은데 형은 참 비위도 좋아.

헛기침은 그만해. 목은 하나도 아프지 않다는 걸 나는 알아. 머쓱함을 숨기려 하지 마. 마음을 우기는 버릇은 언제쯤 고칠래? 괜히 왼쪽 뺨도 맞지나 말고.

형은 나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어. 방 문은 닫혀 있지만 나는 알 수 있어. 내 방 창틀에는 화분이 많거든. 가끔 화가 나면 흙 속에 묻어버리거든. 그래서 그래.


형은 나에게 아이디를 만들어 주었어. 엄마가 형에게 그랬듯이 말이야.

형의 이름에 형이 좋아하는 숫자를 마음대로 붙여서 만들어 주었는데 아직도 그걸 쓰고 있어. 게임 속 나의 이름은 형의 14번째 버전인 걸까?

비밀번호에도 형의 냄새가 나. 한때 좋아했던 아카펠라 그룹의 이름이잖아. 그룹은 해체했고 네 명 중 한 사람은 세상에서 사라졌는데 비밀번호를 바꾸라는 알림을 볼 때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그 그룹의 노래 제목도 하나 모르는데.


근데 그거 알아? 나가봤자 형은 안으로 들어갈 거야. 흙 위에 두면 또 흙을 찾아 기어들어 갈 거 아니야. 그러니 내가 어떻게 돌아가? 형에게도 형이 있었다면 형을 찾아 들어갔을까?

오늘도 샤워하면서 별 일 없이 산다는 노래를 틀어 두었더라. 형은 그냥 그렇게 살아. 화분처럼, 화분에 담긴 흙처럼, 흙 속에 파묻힌 흙처럼.


정해진 시간에 냉장고 문이 열리고 전자레인지가 돌아가고 방 문이 열리고.


* 심보선의 시 <형>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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