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워홀] 나는 무계획의 아름다움을 믿어 왔었다.

일본/도쿄 워홀 1주차

by 찰란


나는 무계획의 아름다움을 믿어 왔었다.


우연히 들어선 동네의 허름한 술집, 평소에 다닐 일 없던 거리를 걸으며 만나는 풍경, 그리고 뜻밖의 경험으로 가까워지는 사람들까지.

무계획적인 일상은, 계획을 한 후 실행에 옮겼던 대부분의 일상보다 만족스러웠고, 나는 점점 무계획과 즉흥성이라는 덕목에 심취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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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계획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나의 엉뚱한 신념은 여행에서 가장 소담하게 꽃을 피웠다.

여행은 무조건 배낭 여행, 일정도 식사도 여행지에 도착한 후 직접 걸어다니며 그때그때 정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여행 규칙이었다. 무계획이 곧 계획이라는 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만약 주변의 누군가가 패키지 여행을 가거나 한국 블로그 리뷰를 보고 식당을 고르려 할 때면, 나는 마치 무계획의 수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상대에게 "그건 진짜 여행이 아니야." 라며 꼰대질을 일삼기도 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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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홀리데이를 하나의 긴 여행으로 생각한 나는 당연하게도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워홀 제출 서류인 이유서와 계획서를 쓸 때도, 솔직히 말하자면 80프로 정도는 소설이었다. (자소서는 원래 이렇게 쓰는 거 아닌가?)

은근한 불안감에 다른 워홀러 블로그를 찾아보니 맛집 투어, 연예인 덕질, 하다못해 돈이라도 많이 벌어오자는 사람들까지. 다들 계획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일본 정서가 맞고 말이 통한다는 이유만으로 워홀을 결심하고, 덜컥 1년간의 긴 여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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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집 계약을 마치고 짐을 푸는 둥 마는 둥 대충 이불만 사서 누웠다. 냉장고도 전자레인지도, 서랍장도 옷걸이도, 심지어 어둠을 밝힐 형광등 하나 없는 텅 빈 집에서의 첫날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외롭고 무서웠다.

그리고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더 슬픈 것은, 수중에 하나뿐인 휴지가 부족해 마음껏 울지도 못한다는 지독한 현실이었다.


일본에 온지 이제 일주일이 넘어가는 지금, 집은 중고 가전제품들과 가구들로 채워졌고 첫날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덕분에 첫날의 쓸쓸한 마음도 많이 누그러들기는 했지만, 무얼 해야 좋을지에 대한 고민은 여전하다.


무작정 거리를 돌아다니고는 있지만, 배낭 여행에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교통비와 식비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조금씩 어깨를 툭툭 치고 들어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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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주일 간 수많은 감정 변화를 겪으면서 깨달은 것 중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워킹홀리데이는 달콤한 여행이 아닌 지독한 여정이다.


짧은 여행에는 무계획이 얼마든지 허용될 지라도, 긴 여정에는 확실한 이정표가 필요해 보인다.

나의 첫번째 "계획"은, 그 이정표를 하루라도 빨리 발견하는 것이다. 없으면 만들기라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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