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찰란 Feb 07. 2024

님아 그 버스를 놓치지 마오

퇴고 없이 한 번에 쓰는 글

버스를 놓치면 세 번 절망한다.


첫 번째 절망은 구애의 춤을 제대로 추지 못한 자신을 향한다.

정류장에 다른 사람이 있어서 방심을 한 게 잘못이었다. 배차 현황을 알려주는 전광판의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 차가 막히는 출근 시간이면 더더욱.

버스가 도착하기까지 3분이 남았다는 소식에 나는 다음 음악을 골랐고 가사에 심취하며 눈을 감았고 검은 모래로 뒤덮인 섬과 그곳에서의 하룻밤을 상상하다 기타 리프 소리가 절정에 치달았을 때쯤 눈을 떠 보니 파란 버스는 내 옆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개를 돌려 그 버스가 떠나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절정, 아니 정류장을 지나친 버스는 꽉 막힌 도로 탓에 걸음만큼이나 느린 속도로 굴러가고 있었지만 이미 돌아선 마음을 돌이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별은 언제나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먹기의 문제이다.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 남은 시간을 확인할 때 두 번째 절망이 찾아온다.

다음 버스는 11분 뒤에 도착한다. 정류장에 일찍 도착했을 때 들떴던 기분을 그대로 가라앉히는 숫자였다. 지각은 하지 않겠지만-요즘 세상에 5분 정도 늦는 건 지각으로 쳐 주지도 않는다-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고스란히 반납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열이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11분이면 노트북을 켜기도 전에 두꺼운 가죽 부츠에서 편안한 슬리퍼로 갈아 신고 탕비실에서 티백을 뜯어 따뜻한 물에 우려 놓고 화장실을 다녀오며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부은 얼굴은 정돈하지 못하지만 이 정도면 오늘은 괜찮네, 하며 짙은 흙빛으로 우러난 옥수수수염차를 한 잔 마셔도 남는 시간이다. 정각에 딱 맞추어 간다고 이 신성한 아침의 루틴을 거르지는 않겠지만, 집에서 늦게 출발한 것도 아닌데 버스 기사를 향해 구애의 춤을 추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조급한 마음을 먹게 되는 상황 자체가 싫었다.


그러나 가장 큰 절망은 버스가 저 멀리 떠난 뒤 마지막 순간에 찾아온다.

검은 세미 정장에 포마드로 머리를 깔끔하게 정돈한 남자는 버스가 떠나간 사실을 나보다 늦게 알아차린 듯했다. 나보다 먼저 정류장에 도착해서 조금 전까지 여유롭게 휴대폰을 보며 기다리던 그의 시선이 도로와 배차 안내판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 동지가 생겼다는 얄궂은 마음이 들었다. 학창 시절 지각을 하면 닫힌 철문 앞에서 헐떡이는 숨을 고르는 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편해졌다. 슬픔을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뜻이 이런 상황을 가리키고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저 남자와 나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구애의 춤을 제때 추지 못한 죄이리라.

갈팡질팡하는 남자를 보자 마음이 놓여 정류장 벤치에 앉으려는데 검은색 차가 이쪽으로 와서 멈춰 섰다. 남자의 눈이 가늘어지며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아침 찬바람처럼 차갑게 굳어 있던 표정이 환하게 풀리더니 차량의 뒷문을 열고는 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벤치에 나 혼자만 남겨둔 채로.

이럴 거면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이지나 말지. 그렇게 멀끔하게 차려입고 전광판을 뚫어져라 보기는 왜 또 봤던 건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빙글빙글 웃으며 차를 타고 떠나는 남자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버린 사람은 없지만 나는 정류장 벤치 위에 버려졌고, 화를 낼 일은 아니었지만 화가 났다.


다음 파란 버스는 정확히 11분 뒤에 도착했고 혹시라도 놓칠까 이번에는 멀리서부터 구애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애절한 눈빛은 분노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바뀌었고 나는 속으로 외쳤다. 네 친구가 나를 망쳐놨으니 책임져.

5분을 예상했지만 1분밖에 늦지 않았고-이 정도면 정시 도착이다-심지어 옆자리에는 아무도 없어 졸지에 제일 빨리 도착한 사람이 되었다. 그럼에도 무언가 마음속에서 가라앉지 않는 듯한 기분이었다. 평소보다 더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화장실을 다녀왔지만 어째서인지 탕비실의 옥수수수염차는 다 우러나지 않았기에 아직 그것은 옥수수수염에 더 가까웠고 짙은 흙색이기보다는 옅은 흙탕물의 색을 띠고 있었다.

나는 차가 다 우러나기까지 기다리는 대신 티백의 손잡이를 잡고 위아래로 마구 흔들었다. 물방울이 컵의 벽면 여기저기에 튀었고 컵은 불투명한 흙빛으로 변해 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약해 빠져서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