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 없이 단번에 쓰는 글
탄내가 강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사람들은 둔치에 모여 있었다. 등불을 환하게 켜고 오와 열을 맞춘 채 나란히 서 있는 듯했다.
다리 위의 사람들은 걸음을 멈춘 채 난간 틈새로 혹은 너머로 그 광경을 한동안 살폈다. 멈추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나도 궁금했다. 하지만 달리는 도중에 멈춰 설 수는 없었다. 궁금하지 않으려 했다.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그 난간 앞을 지날 때는 정말 궁금하지 않았고 어쩐지 저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보나 마나 뻔하지 뭐. 춤 연습이나 사물놀이 연습, 혹은 러닝 크루들이 모여 스트레칭을 하고 있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사람을 태우고 있든지.
나는 갠지스 강에 간 적이 없다.
그러나 그곳의 풍경은 눈에 선하며 여러 번 다녀온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다.
강물의 색은 멀리서 보면 흐릿하고 뿌옇지만 가까이서 내려다보면 꽤나 맑고 투명하다. 주부들은 집 현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강물에 빨래를 한다. 아이들은 그와 멀지 않은 곳에서 웃통을 벗고 뛰어논다. 이따금 강물 속을 들어갔다 나오고 물장구도 친다. 갈비뼈가 도드라지는 몸통과 가느다란 팔다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강아지는 옆에서 물 위로 고개만 내민 채 헤엄을 친다.
경사진 강줄기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타는 냄새가 난다. 주변 공기가 따뜻해진다. 성인 남성들이 둘셋씩 모여 있고 그 가운데에는 나무 기둥이 격자로 쌓여 탑을 이루고 있다. 탑은 강변 곳곳에 널려 있고 어떤 것은 타고 있고 어떤 것은 타기를 기다리고 있고 또 어떤 것은 이미 다 타서 까맣게 변해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사람이 누워 있다. 탑과 달리 사람은 죽어 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죽지 않으면 탑에 올라갈 수 없다. 탑은 불을 기다리고 사람은 탑의 죽음을 기다린다.
인도를 다녀온 지인들의 목격담과 각종 매체에서 보고 들은 것이 합쳐져 갠지스 강의 풍경은 더 이상 내게 생경하지 않다. 오히려 익숙하다. 그곳에서는 정말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태워. 그 말조차 너무 많이 들었고 그 말을 꺼내는 사람마저도, 그 정도는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하는 식의 스탠스를 취하고 있어 정말 아무렇지 않게 들린다. 까맣게 다 타고나면 긴 막대기로 그걸 끌어내려서 강물에 넣고 다음 사람을 집어넣고 또 불에 태우고를 반복한다고 했다.
불에 타고 남는 것은 재다. 재를 보고 슬퍼하는 사람은 없다. 재는 원래 아무렇지 않은 것이고 사람은 불에 타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기에 사람은 결국 아무렇지 않은 존재가 된다. 갠지스 강의 개들은 옛 주인의 정강이 뼈를 물고 돌아다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도 같다. 내가 방금 지어낸 말이면 어떠한가. 어차피 난 인도에 가본 적도 없고 앞으로 갈 일도 없을 것이다. 나에게 이미 인도는 아무렇지 않은 재와 같은 곳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출판사 면접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 이 기억이 불현듯 머리를 스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름 이름 있는 출판사의 면접을 보러 파주로 가던 아침, 나는 이유 모를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자신감은 면접 대기 장소에 들어서자 한층 더 강해졌다. 하나같이 정장을 쫙 빼 입고 와서는 긴장한 듯 휴대전화만 바라보는 다른 면접자와는 달리 나는 여유를 부렸다. 나는 여유로운 사람이니까. 나는 남들과 달리 이것도 해 봤고 저것도 해 봤는데 책까지 좋아하고 또 잘 알고 있으니까.
자신감이 자만이 되고 그 자만이 깨지는 데는 채 세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준비해 온 사전 과제를 발표하고 자기소개서를 바탕으로 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아주 없는 일을 쓰지는 않았고 아주 없는 말을 지어내지도 않았기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아주 분명한 것만 허락되는 세계였다.
출판사의 최신작을 쓴 작가의 이름도 틀렸고 심지어 그 책을 읽어보지도 않았으며, 좋아한다고 적어 냈던 장르의 하위 계열사는 아예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 '나만의 이것과 저것'을 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나는 나 자신을 면접장에 던진 것이다. 답답한 침묵과 멋쩍은 한숨이 이어졌다. 면접은 오후 세 시쯤에 끝이 났고 면접비가 담긴 봉투와 다 먹지도 못한 샌드위치를 들고 나와 버스를 기다렸다. 그날따라 유독 강렬했던 햇빛에 나는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그날 죽었다. 아니, 죽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불에 탄 건 그날이다.
그동안 모른 척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흔히 필독서라고 불리는 책을 완독 한 건 한 손에 꼽는다는 사실도, 취미가 독서라는 고리타분한 허세도, 어쩌면 책 없이도 살 수 있겠다는 마음속의 말도.
그동안 알은척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좋아하는 작가가 쓴, 그러나 읽지 않은 다른 책의 내용도, 고전 작품의 고리타분한 면모와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도, 모 문학상의 권위가 추락하고 있는 것이 참으로 씁쓸하다는 말조차도.
책을 좋아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나는, 매일같이 글을 쓰며 사색에 잠기는 나는, 독서의 힘을 믿고 그것을 다른 이에게 권하는 나는, 그날을 기점으로 재가 되었다.
여행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며 늘 드는 생각이 있다.
여긴 뭐 서울이네.
바다 옆에 있는 서울, 한글 대신 한자가 가득한 서울, 조금 더 덥고 조금 더 습한 서울 등등.......
서울에 살면 세계를 살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서울 속의 센트럴 파크, 서울 속의 개선문, 서울 속의 도쿄 타워. 서울은 거대한 책이다. 미세먼지가 많고 날씨가 오락가락하는 책.
그런데 내가 이 책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있던가? 물음에는 항상 쉽게 답할 수가 없다. 매일 지나다니는 거리에 있던 가게가 돌연 폐업을 해도 원래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무렇지 않게 새 가게가 들어서고 화환을 내걸고 시끄러운 음악을 틀고 낯선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가고... 개 한 마리가 부러진 철근을 물고 돌아다녀도 사람들은 눈길도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과연 궁금한가? 궁금하다면 무엇이?
궁금하다는 건 알고 싶다는 것이고 알고 싶다는 건 들여다볼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나는 갠지스 강은커녕 두 발로 달리고 있는 서울의 강조차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서울에는 댄스 소모임도 사물놀이 동아리도 러닝 크루도 있지만 한 번도 그들을 가까이서 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탑 꼭대기에 있었고 탑은 높았고 나는 그것들이 결국 불에 타고 재가 되어 강물에 떠내려 갈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사람은 모두 아무렇지 않게 재가 되고 그건 서울에 사는 나도 갠지스 강의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탑 위에 올라갈 운명에 놓여 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렇지 않게 옆을 지나치는 것과 잠시 멈춰 서서 나무 기둥을 밟고 올라가 그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은 다르다.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는 이제 조금 궁금하다. 어떤 삶을 살았고 어느 도시에 살았으며 누구와 같이 어울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강변을 달렸으며, 어떤 사람을 사랑했고 또 떠나보냈는지, 이제는 알고 싶다. 네가 비록 재에서 태어나 잠시 사람의 모습을 한 채 수십 년 간 불에 타다 다시 재로 돌아간다고 한들 나는 그 불 속에서, 이제는 조금 헤매고 싶다.
타는 내가 강 주위를 맴돌고 있다.
타는 줄도 모르고 타고 있는 사람은 재가 되는 순간까지 아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