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우리가 녹는 온도> 밑줄
“괜찮을 땐 괜찮다는 말을, 괜찮지 않을 땐 괜찮지 않다는 말을, 여하튼 언제나 당신의 진심을 말하라고. 서로에게 관여하지 않는 ‘좋은 관계’란 어디에도 없으니 말이다.”
- 정이현, <우리가 녹는 온도 중 ‘나는’>
나의 첫 번째 식물
우리집엔 내이름으로 불리는 식물이 있다. 중학교 1학년, 학급임원이란 이유로 환경미화용 식물을 사야만 했다. 지금은 사라졌으리라 믿고 싶은, 그 당시의 관례였다. 그것을 교실로 들이며 죽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식물 입장에선 교실은 사막보다 척박한 곳, 뭐 거의 도살장이나 다름 없는 곳이니까.
겨울방학이 시작되던 날, 담임은 날 불러세워 ‘저거 살았어, 가져가’ 고 말했다. 뒤통수가 쩌릿했다. 도살장에서 살아남은 식물이었다. 가족의 대단한 환영을 받으며 집으로 입성한 그 녀석은 아직도,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다.
이 식물이 살아남은 비법은 말이다. 그렇다, 식물이 말을 한다. 그것도 온 몸으로. 물이 필요하면 잎을 아래로 축 내던진다. 누가봐도 삐진 것 같고, 무척 기력이 없어 보인다. 그러다 물이 충분해지면 잎을 하늘 방향으로 치켜 올린다. 아주 기분좋게 기지개를 켜는 양상이랄까. 물을 얼마나 자주, 얼만큼 주는지… 정량화한 설명은 어렵다. 대충 녀석을 한번 훑어 보고 물을 준다. 가벼운 마음으로, 녀석이 말하는 대로, 내가 느끼는 대로. 그렇게 살아간다.
두 번째 식물
그러던 어느 날, 미세먼지가 한국에 정기 방문을 시작했다. 온라인 커머스 딜을 둘러보던 중 ‘공기정화식물 무배 2,900원’ 상품을 보는 순간 이성이 마비된 듯… 결제를 하고 말았다. 회사에서 길러야지 하는 생각으로.
내 손으로, 내 의지로 구매한 생애 첫 식물이었다. 이윽고 회사로 도착한 택배를 열며 나는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살아 있는 것이 택배로 배송되어 오는 과정이 어떠했을지… 그 지난한 여정이 고스란히 묻어난 모습이었다. 화분 밖으로 절반쯤 흘러 나온 흙을 다시 채워우며, 얼마 못가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햇볕이라도 마음껏 보라고 창가로 가져갔다. 나는 모든 식물이 햇볕을 좋아할 줄 알았다.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는 전제였다. 며칠 후, 녀석은 직립을 포기하고 아예 가로로 누워버렸다. 초록의 잎들도 샛노랗게 변해버렸다. 대표적인 실내 식물이었던 녀석에게 직사광선은 너무 뜨거운 것이었고, 결국 잎이 탔다.
다시 내 자리로 가져와 며칠을 살펴보았다. 식물은 내 실수를 용서한다는 듯 오뚜기처럼 일어났다. 잎의 색도 다시 파랗게 물들였다. 이 녀석도 첫 번째 식물처럼, 마음에 안들면 몇 차례, 눕거나 색을 맘대로 바꿔버리다 그것이 해소되면 또 되살아 났다. 자연스럽게 녀석이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됐다.
엄지만하던 키가 무릎까지 자랐고, 기특하게 꽃이란 걸 피워 나를 뭉클하게 했다. 그렇게 4살이 되었고 여전히 살아 있다. 너무 쑥쑥 자라나 이젠 더 이상 회사에서 키우기 힘들 것 같았다. 집으로 가던 날, 또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괜찮지 않음을 말하던 식물들
두 식물의 분갈이를 위해 화원에 갔을 때, 아주머니는 내 식물들의 이름을 바로 알아 맞추지 못했다. 해를 거듭하며, 최초 분양 때와는 그 모습이 사뭇 달라졌기 때문이다. 나라는 서식 환경에 맞춰 녀석들이 변했고 이젠 무엇과도 닮지 않은 제멋대로의 모습을 갖게 됐다.
느슨하지만 다정하게
아직도 나는 내가 식물을 키우는 일에 퍽 어울린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식물 장수촌 주인이자, 척박한 사무실에서 꽃을 피운 자, 화원 주인이 비법을 물어오는 사람이 되었다. 되짚어보면 나는 대충, 가볍게 그러나 조금은 다정했던 것 같다. 정확히 언제 마지막으로 물을 줬는지는 여전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가끔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 하는지… 지금 나에게 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읽어 주려고.
어설픈 주인에게서 스스로를 지키느라 녀석들은 최선을 다해 괜찮지 않음을 피력했다. 드러눕고, 얼굴색을 울그락 부그락 바꾸고, 쓰러지고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고맙게도 바로 죽지 않았다. 내가 알아 차리고, 바로 잡을 기회를 주었다. 느슨하고 가볍게, 그러나 다정하게 서로에게 맞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