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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랑 Oct 06. 2019

선배가 물들인 서핑

내 사랑 부산



일 년에 한 번은 부산에 간다. 내 사랑 부산에서는 빌딩 숲을 지나 10여 분만 달리면 당장 서핑이 가능한 해변이 나타난다. 서울은 감탄할 대자연이, 제주는 세련된 스카이라인이 아쉬운 반면 부산은 모두를 가졌다. 대자연과 도시가 결합된 이상적인 공간이자 언젠가 꼭 살고 싶은 곳이다.

부산에 가면 대부분의 시간은 송정에, 가장 많은 에너지는 바다 위에 쏟는다. 아직은 파도를 혼자 잡는 확률이 낮지만 4년이 넘도록 간헐적 끈을 놓치지 않는, 서퍼는 서퍼다. (shaka-)

내게 서핑에 눈을 뜨게 한 사람은 회사 선배 J였다. 조용하고 날카로운 분위기의 사무실 속 선배를 처음 본 순간, 그냥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셔츠와 구두 속에 자아를 겨우겨우 욱여넣고 있는 것 같달까.

몇 번의 프로젝트를 지나 선배와 팀이 되었다. 회의실에 앉아 볼펜을 쥔 선배의 손을 바라본 순간, 친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손등은 까맣고 손바닥은 하얀, 태양이 새겨 놓은 경계선이 짙고 뚜렷한 손을 가졌다. 태양 아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분명했다. 그렇게 타놓고도 선크림은 대충 발라 양 볼에 살 껍질이 드러나 있는 사람.

상남자 같은 외형에 트리플 A형으로 스트레스를 속으로 받는 타입인 선배. 첫인상은 얌전한 듯 보여도 할 말은 다하고 뒤돌아 잊는 O형 후배인 나.우리는 함께 주 60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시원해하기도, 때론 답답해하기도 했다.  

보고가 1차, 2차 차수를 더 할 때마다 우리가 넘어야 하는 마감 능선도 가팔라졌다. 어느 날, 조용히 따라오라던 선배는 트렁크를 열고 스케이트 보드를 꺼냈다. 내겐 생애 첫 스케이트 보드였다.


선배는 수능이 끝나자마자 호주행 비행기를 타고 서핑을 배우러 갔다고 했다. 한국 서핑 1세대로 불리는 이들과 동질 집단을 이루며 그렇게 15년도 더 넘게 파도를 타고 있었다. 바다에 가지 못하는 평일은 스케이트 보드를 탄다고 했다. 선배가 평일 숨죽여 욱여넣고 있던 또 다른 자아를 만난 순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공터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며 마감을 넘긴 것을 자축했다.


그 후 선배를 따라다니며 서핑 세계를 만났다. 서핑이 지금처럼 대세가 아닐 때라 골목골목을 다녀야 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선배처럼 까맣게 그을린 채, 주말에 마주할 파도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나도 서핑을 시작하게 됐고, 그렇게 부산에 가기 시작했다.


선배와 나는 이제 더이상 같은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 매일 보지도, 자주 연락을 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의 어떤 조각은 여전히 그 시절 선배에게 물들여진 채 살아간다.






지금 듣는 음악 BUSTY AND THE BASS <Up 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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