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나의 방법들
독립하고 첫겨울을 맞는다. 겨울이 지나면 모든 계절을 오롯이 혼자 살아낸 독립 1년 차가 된다.
가족들의 소리가 사라지고 적막을 마주한 독립 첫날 밤. 본능적으로 몸을 침대 끝 벽으로 붙였다. 아주 작은 소리도 경계하며 고양이처럼 옹송그리고 잠이 들었다.
내내 추웠다. 3월, 겨울과 봄의 경계선에 선 계절이었다. 벽에 붙은 난방 조절기를 한참 바라보았다. 분명 잠들기 전 켜 두었는데 온기가 돌지 않았다. 똑같이 생긴 흰 버튼 몇 개가 전부인 기계 앞에서 이 버튼 저 버튼을 짧게 한 번, 연달아 두 번 등 다양한 경우의 수로 눌러봤다. 이내 신경질이 나서 힘을 잔득 실어 마구잡이로 찔로 보기도했다.
방을 적절히 따스하게 만드는 온도는 얼마인지. 지금 이 상황이 정상인지 오류인지 가늠할 척도가 내겐 없었다. 모두 생에 처음인 영역의 일들이었다.
혼자 살며 누릴 수 있는 맛있는 맛만 골라먹을 순 없었다. 이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난방, 냉장고, 세탁기, 인덕션, 도어락, 비데, 전기밥솥과 오쿠 모두 내 관할이 되었다. 이제부터 이 도구들의 힘을 빌어 나를 먹이고, 입히고, 재워야 했다. 신경질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바닥에 온갖 것의 매뉴얼을 펼쳤다. 작동 방법, 유지관리 팁 그리고 숨겨진 기능들을 읽어 내려갔다. 예를 들면,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러야 하는데 타인이 인근에 있어 보안 유지가 필요할 때 실제 비밀번호와 다르게 눌러도 들어갈 수 있는 기능 같은 것 말이다.
유튜브 시대에 매뉴얼 읽기는 의외의 묘미가 있었다. 어떤 제품을 상품화하기까지 세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이 제품을 고민했을 사람들이 써내려 간 글이다. 그 속엔 한 제품을 통해 세상을 바라봤을 이들의 세계관이 녹아져 있었다. 특히 식품 건조기 매뉴얼의 첫 문장은 카뮈의 <이방인>급이었다. “건조식품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건조는 고대로부터 이어진 섭취법으로… “ 이 제품을 사용하는 자들만 알 수 있는 세계로 초대받은 것 같기도 했다.
내게 매뉴얼은 작은 글씨로 적힌 지름길이었다. 나름대로 새로운 세상으로 건너는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그 끝에 나를 발견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난방 온도는 28.5도, 내가 아끼는 원피스들은 30도의 물에서 세탁해 주어야 한다. 전자레인지는 한 달에 한 번 스팀세척을 눌러주고, 세탁기는 통건조를, 설거지처럼 싫어하는 일은 되도록 빨리하고 잊어버리는 걸 좋아한다 등등.
물리적으로 작아졌지만 역설적으로 더 넓어진 세상이다. 그렇게 한걸음씩 겨울로 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