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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Aug 01. 2019

65. 내 마음을 훈훈하게 해 준
라파스의 수호천사

볼리비아-라파스

호텔 컨티넨털 프런트에는 마음씨가 좋아 보이는 여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이했다. 타원형의 얼굴에 마치 오누이 같은 다정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밀렌카라고 소개했다. 호텔 컨티넨털은 밀렌카의 아버지가 사장이고 그녀의 어머니와 딸인 밀렌카가 함께 운영하는 작은 호텔이다. 남미의 작은 호텔들이 다 그러하듯 이름만 호텔이지 사실은 우리나라 모텔보다  못한 수준이다.


“여기서 칠레의 아리카로 넘어가는 버스가 있나요?” 

“아, 잠시 만요. 시간표를 한번 체크를 해볼 게요… 음, 내일 오전 6시 30분, 7시 30분 그리고 12시 30분에 출발하는 버스가 있군요.” 

“지금이라도 터미널에 가면 버스표를 살 수 있을까요?” 

“오늘은 너무 늦었고요… 내일 아침 일찍 나가면 표가 여유가 있을 거예요.” 


밀렌카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주머니 한분이 2층에서 내려왔다. 그녀를 본 순간 나는 고향의 낯익은 아주머니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옅은 갈색 톤의 파마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다소 뚱뚱한 몸매에 웃음 띤 얼굴은 어쩐지 고구마처럼 친근하고 포근했다.


“저희 어머님이세요.” 

“아, 그래요.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온 초이라고 합니다.” 

“오, 아주 먼 나라에서 오셨군요. 마리나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네, 여기선 아주 먼 곳이지요. 밀렌카, 아침 7시 30분 차가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 시간에 늦지 않게 떠나도록 좀 깨워 주십시오.” 

“염려 마세요. 아침에 일찍 깨워드리지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어, 부인은 좀 어떠신가요?” 


밀렌카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호텔에 들어올 때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있었던 아내를 보았던 것. 


“아, 네… 괜찮아요.” 

“혹시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그게… 사실은 라파스에 도착하자 말자 강도를 만나 수중에 현금을 몽땅 털리고 말았거든요.” 

“오, 마이 갓!” 


밀렌카와 그녀의 어머니 마리나는 동시에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라파스에서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다니 유감입니다. 뭐라 말할 수 없군요.” 

“아닙니다. 할 수 없지요. 그런데… 경찰에 신고를 하고 싶은데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기꺼이 도와 드리지요. 그러나 경찰에 신고를 하더라도 그들을 잡기는 아주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도 일단은 경찰에 신고를 하고 싶어서요.” 

“제가 우선 경찰서에 전화로 신고를 해드리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근처에 현금을 찾을 수 있는 은행의 ATM이 있나요? 수중에 현금이 한 푼도 없어서요.” 

“네, 광장에 가면 있긴 있는데, 저녁이라 위험하니 내일 아침에 가서 찾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당장 저녁을 사 먹을 돈이 없어서요.” 

“걱정 마세요. 제가 현금을 좀 빌려드리지요.” 

“아이고, 너무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밀렌카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20 볼리비아노를 나에게 내밀었다. 밀렌카의 어머니 마리나는 더욱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밀렌카가 준 돈을 들고 길거리에 나가서 빵과 우유를 샀다. 돈을 강탈해 가는 강도가 있는가 하면 이렇게 돈을 빌려주는 사람도 있으니 참으로 세상은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세상은 또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모양이다. 빵과 우유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 아내에게 내밀었지만 아내는 도대체 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다. 


“인슐린 주사를 맞고 약도 복용하려면 뭘 좀 먹어야 하지 않겠소.” 


내가 우격다짐으로 다그치자 아내는 겨우 빵 한 조각을 뜯다가 그만 다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눈물방울이 빵조각으로 흘러내렸다. 눈물의 빵이란 이를 두고 한 말일까? 아내는 빵 한 조각에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돌아누워 버렸다. 


“일단 경찰에 신고를 해달라고 했어. 그러나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 

“…….” 

“내일 아침 칠레 아리카로 가는 버스가 7시 반에 있다고 하니 그 차를 타고 칠레로 넘어가자고.” 

“…….”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긴 밤이었다. 택시 강도 일당이 있는가 하면, 생면부지의 낯선 여행자에게 돈을 빌려주는 천사 같은 밀렌카 가족도 있었다. 이처럼 세상은 선과 악이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택시강도 일당이 빚을 받으러 온 저승사자라면 밀렌카 모녀는 우리들을 보호해주는 수호천사였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녘에야 가까스로 잠이 들었다.      

   

잠시 눈을 부친 것 같은데,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밀렌카의 어머니 마리나였다. 시계를 보니 아침 6시 가 좀 넘었다. 그녀는 약속대로 우리를 깨우러 왔다. 어젯밤에 우리는 배낭도 풀지 않고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세수만 하고 배낭을 멘 채 마리나를 따라나섰다. 


마리나는 호텔 문 앞에 택시를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택시만 보면 움찔하며 몸을 움츠렸다. 마리나는 겁에 질려 잔뜩 긴장된 아내를 바라보더니 우리와 함께 버스터미널까지 동행을 해주겠다고 했다. 마리나와 함께 택시를 타고 터미널에 도착을 하니 6시 30분이 조금 지나가고 있었다. 마리나가 매표소로 가서 티켓을 문의하자 7시 30분 버스는 사정상 일정이 취소가 되어 버렸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아내 표정은 다시 울상으로 변하고 있었다. 


다음 버스는 12시 30분에 있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12시 30분에 출발하는 칠레 아리카행 버스표를 샀다.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터미널에서 기다리겠다는 아내를 겨우 달래서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기다리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었다. 호텔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우리는 다시 터미널로 갔다. 이번에도 밀렌카의 어머니 마리나가 동행을 하여 우릴 도와주었다. 


그러나 12시 30분에 출발을 하기로 한 버스가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오후 1시경에 출발을 한다고 했다. 버스에 무슨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 버스도 제대로 출발을 할 수 있을는지 심히 염려가 되었다. 우리는 마리나와 함께 터미널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은 후 버스에 올랐다. 


“마리나. 정말 고마워요! 우린 결코 당신을 쉽게 잊지를 못할 거요.” 

“천만에요. 남은 여행을 무사히 끝내길 기도할게요.” 

“감사합니다!” 


마리나의 손을 잡고 아내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짧은 만남, 아쉬운 이별! 우리는 버스에 올라 마리나에게 손을 흔들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마리나도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승객이 좌석에 앉아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버스는 엔진 소리만 요란할 뿐 도대체 움직이질 않았다. 마리나는 버스가 출발하는 것을 끝까지 보려는 듯 창밖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운전수가 버스 엔진 뚜껑을 열고 뭔가 손을 보며 부산을 떨었다. 어딘가 고장이 난 모양이었다. 아내와 나는 마음이 점점 초초해져 가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태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라파스에서는 이런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버스 차장이 올라오더니 이 버스는 고장이 나서 출발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이럴 수가... 떠나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다니…” 

“여보, 어쩔 수가 없는 일 아니요. 정말 할 말이 없군.”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다. 아내는 다른 버스를 알아봐서라도 오늘 중으로 라파스를 떠나자고 했다. 마리나가 끝까지 우리 곁에 남아서 우리들을 보살펴 주었다. 마리나와 함께 아무리 터미널을 뒤져 보아도 오늘 중으로 칠레로 넘어가는 버스는 없었다. 라파스에서 칠레 아리카까지 운행하는 버는 하루에 한두 번이 고작이었다. 결국 우리는 다음날 아침 6시 30분에 출발하는 칠레 버스인 ‘터어 버스(Tur Bus)’ 티켓을 구입하고 다시 호텔 컨티넨탈로 돌아왔다. 마리나와 함께 동행을 하여 버스터미널과 호텔 사이를 두 번이나 왔다 갔다 했지만 허탕을 치고 말았다. 그녀가 너무 고맙고 미안했다. 


"마리나, 너무 고맙고 미안해요."

"천만에요. 내일 아침에는 칠레 버스니 꼭 출발을 할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네, 감사합니다."


마리나는 정말 싹싹하고 친절했다. 그리고 우리와 아주 오래전에 알고 지냈던 사이처럼 친근했다. 마리나는 웃으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아내는 피곤하다고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들어가 쉬려고 하는데 밀렌카가 불렀다. 


“미스터 초이! 이 근처에 한국음식점이 있어요.” 

“아, 그래요! 여기서 가까운가요?” 

“네, 아주 가까워요. 잉카 식당이라는 곳인데 5분 정도 걸어가면 됩니다.” 

“그래요! 그럼 오늘 저녁은 거기서 먹어야겠군요.” 

“그러세요. 아내의 마음도 달랠 겸.” 

“고마워요. 밀렌카!” 


밀렌카는 마치 우리들의 아픈 마음을 속속들이 읽고 있는 듯 한국음식점까지 안내해주는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두 모녀에게 아무리 감사하다는 말을 해도 부족할 것 같았다. 2층으로 올라가 지쳐 누워있는 아내에게 한국음식점으로 가자고 했지만 아내는 모든 게 귀찮은 모양이었다. 


“누어만 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질 않소?” 

“그냥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여보, 그러지 말고 기분도 전환할 겸 잠시 산책도 하고 한국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읍시다.” 

“무서워서 산책을 할 수 있겠어요. 제발, 날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두세요.” 

“은행에 가서 돈도 좀 더 찾아야 하는데… 그럼 나 혼자 나갔다 와?” 

“은행이요? 거긴 혼자 가면 위험해요.” 

“그러니 함께 가자는 것 아니요.” 


나는 아내를 겨우 달래서 배낭도 카메라도 메지 않고 맨손으로 밖으로 나왔다. 강도를 당하고 나니 라파스에서는 사진을 찍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우리는 구경은커녕 라파스 아무 데도 본 곳이 없었다. 저녁시간까지는 아직 해가 많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호텔을 나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걸었다. 


밖으로 나오니 오후의 강열한 태양이 라파스의 거리를 찬란하게 비추이고 있었다. 태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온 세상에 공평하게 볕을 내리쬐어주고 있었다. 겉모습은 평화스러웠다. 우리는 밀렌카가 준 지도를 들고 일람푸 거리를 따라 내려갔다.


그러나 워낙 고지대라서 평지도 숨이 찬데 오름길은 더 숨이 찼다. 거리는 이상한 물건을 파는 노점상들로 가득 차 있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한 묘한 물건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저절로 호기심을 동하게 하는 거리였다. 침울하기만 했던 아내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거리를 걸으면서 점차 마음이 누그러지는 모양이었다. 성남의 모란 시장을 구경하듯 우리는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거리를 거닐었다.


“저기 잉카 식당이 보이는군!” 

“그 한국식당 말인가요?” 

“응. 좀 더 산책을 하다가 저녁에 저기 가서 한국음식을 먹으며 기분전환을 좀 하자고.” 

“와, 정말 한국식당이네요!” 


'잉카 식당’은 일람푸 거리와 산타 크루즈 거리 교차점 2층에 있었다. 지도상에 잉카 식당의 위치를 찜해두고 우리는 마녀 시장으로 갔다. 잉카 식당에서 조금 더 걸어가자 바로 ‘마녀 시장(Mercado de Hechiceria-Witches' Market)'으로 이어졌다. 그곳에는 박제된 라마를 비롯하여 희한한 인형, 괴상한 동물의 뼈, 온갖 약초와 씨앗, 코카 잎, 알파카 털로 짠 알록달록한 스웨터, 판초, 모자, 은장식품, 뱀 껍질, 이상한 부적, 오래된 동전… 실로 별의별 물건이 다 진열되어 있었다.  


한쪽에서는 코카 차가 펄펄 끓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주술사와 마술사들이 안데스의 민간요법으로 병을 치료하는 시범을 보이는 소리가 시끌벅적했다. 주술사들 앞에는 치료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곳 아이마라 인들은 이 세상이 인자하고 선한 영혼과, 사악하고 잔인한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영혼이 어떻게 취급되느냐에 따라 선한 쪽으로도 혹은 악 한쪽으로도 갈 수 있다고 한다.  


“여보, 중절모를 쓴 저 여자를 좀 봐. 멋지지 않소!” 

“어머! 통치마도 볼만 하군요.” 


중산모자(bowler Hats)를 쓰고 볼리비아 전통치마 촐라(Chola)를 입은 아주머니가 마치 여왕 같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주술 품 가게에 앉아 있었다. 점을 보러 온 사람들이 그 앞에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마녀 시장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카메라를 호텔에 두고 와 찍을 수가 없었다. 강도를 만난 이후 사진을 찍을 엄두도 기분도 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겁을 먹었던 것 같다. 라파스에 대한 추억의 사진이 한 장도 없어 아쉽지만 마음속에는 아름다운 영상으로 담아두고 있다.


우리는 마녀 시장을 빠져나와 문제의 택시를 탔던 산 프란시스코 광장을 거쳐 플라자 뮤링요(Plaza Murillo)까지 걸어갔다. 프란시스코 광장에 멋진 성당이 있었지만 어제의 지옥 같은 일이 생각이 떠올라 재빨리 지나갔다. 지금은 주머니에 볼리비아 화폐 몇 잎만 들어 있어 빼앗길 돈도 귀중품도 없었지만 어쩐지 섬뜩하여 그곳을 피하고 싶었다. 


플라자 뮤링요에는 콜로니얼 풍의 대성당과 대통령궁 그리고 박물관이 우람하게 서 있었다. 광장에는 수많은 비둘기들이 파닥거리며 사람들이 던져준 먹이를 평화롭게 쪼아 먹고 있었다. 비둘기들만이 라파스가 ‘평화’란 뜻을 되새겨주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대성당으로 들어가 잠시 눈을 감았다. 기도도 아닌, 그렇다고 명상도 아닌, 아니 그냥 시원하고 조용한 그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높은 돔과 두꺼운 벽, 화려한 스테인 글라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대성당의 모습도 오늘따라 별 감동을 주지 못했다. 이처럼 모든 사물은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밤에 해골 속에 고인 물이 바가지에 담긴 물로 알고 맛있게 마신 원효가 다음날 해골 속에 든 물이라는 것을 알고 토해내며 크게 깨달았다는 이야기 떠올랐다. 그래 내려놓자. 그리고 잊어버리자.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대성당에서 다시 광장으로 나오니 푸른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빈둥거리며 서 있었다. 경찰들을 보니 다시 가짜 경찰 강도가 떠올랐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그들을 지우려고 애를 써야 했다. 


“여보, 저기 ATM기가 있네. 이제 배도 고프군. 돈을 좀 찾고 잉카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어요.” 

“위험하지 않을까요? 전 아직도 거리의 사람들이 다 강도로만 보여서요.” 

“너무 겁을 먹지 말고 내 뒤에 당신이 바짝 붙어 망을 봐요.” 


아내는 내가 돈을 찾는 동안 내 등 뒤에 바짝 붙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보초를 섰다. 시티은행 현금카드를 넣고, 100 볼리비아노를 누르고, 비밀번호를 치니 현금이 자르르 튀여 나왔다. 강도가 압수했다가 돌려준 현금카드였다. 현금이 흘러나오는 순간 그 우스꽝스러운 가짜 경찰의 얼굴이 떠오르자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금강경과 우리 가족사진을 바라보며 천진스러운 표정을 짓던 강도의 얼굴이 지폐에 파노라마처럼 포개져 지나갔다. 


“여보, 빨리 가요!” 

“오케이, 다 되었어.” 


돈을 찾은 우리는 왔던 길을 따라 천천히 되돌아갔다. 뮤링요 광장에서 프란시스코 광장으로, 마녀 시장을 지나 일람푸 거리에 들어서니 아까 찜해 두었던 잉카 식당 간판이 보였다. 2층 식당으로 올라가니 10대로 보이는 한국인 소년이 홀로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소년의 모습이 매우 의젓해 보였다. 


“어른들은 없니?” 

“어서 오세요. 저희 어머니가 계시는데요, 저녁에 좀 늦게 오신다고 했어요.” 

“그럼 너 혼자 이 가게를 보고 있니?” 

“네.” 

“하아! 너 참 대단하구나.” 


소년은 똘똘하게 생기기도 했지만, 행동 또한 야무졌다. 무엇보다도 소년으로부터 한국말을 들은 아내의 표정이 밝아졌다. 한국말도 고프고 배도 고픈 아내였다. 우리가 카운터에 가까운 식탁에 앉자 소년은 물병과 컵을 가져와 식탁에 놓고 메뉴판을 탁자 위에 놓았다. 아직 이른 저녁이라 식당 안에는 우리뿐이었다. 식당은 한 2백 평 정도 되어 보이는 꽤 넓은 홀이었다. 


“와, 여기 김치찌개가 있어요!” 

“그렇군! 그걸 먹을까?” 

“김치찌개를 먹은 지 얼마나 오랜만인데….” 

“좋아, 김치찌개 2인분 줘요!” 

“네, 알았습니다. 저기 있는 야채는 무료로 마음껏 드실 수가 있어요.” 

“그래! 그것 참 좋네! 여행 중에 야채를 별로 먹지 못했는데…” 


주문을 받은 소년은 요리사에게 주문 표를 넘기고는 전축의 스위치를 켰다. 순간 안데스의 전통음악이 홀을 가득 채웠다. 아름답고 구슬픈 저 곡조! 홀 안을 흘러가는 안데스의 애잔한 멜로디는 마치 우리네 마음을 얘기해주는 것 같았다. 야채를 진열해 놓은 테이블로 가서 싱싱한 야채를 가져와 입안을 가득히 넣고 있는데 한국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분이 들어왔다. 소년이 아주머니에게 우리를 소개해주었다. 


“저희 어머님이세요.” 

“아, 그래요. 반가워요! 우리는 서울에서 온 초이 부부입니다.” 

“어머! 그러세요! 정말 반갑군요! 이렇게 두 분만 오셨나요?” 

“네, 그렇답니다.” 

“우와! 그 나이에 두 분 용기가 대단하시군요!” 

“용기요? 글쎄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C여사(풀 네임은 그분이 신분 노출을 꺼려 밝히지 않겠다)라고 소개한  그녀는 둥그런 타원형에 눈동자가 매우 맑아 보였다. 그녀는 부엌으로 가서 뭔가 말을 하고 다시 우리 앞자리에 앉았다. 


“두 분처럼 부부가 배낭여행을 오신 한국인을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군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제가 두 분을 위하여 한 턱 쏘겠습니다.” 

“아하, 그래요? 저희들은 지금 단 둘이서 세계일주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어머, 그래요? 세계일주는 저의 로망인 데요!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볼리비아 여행은 어떠신가요?” 


C여사를 만난 아내가 긴장이 완전히 풀렸는지 한결 부드러워지고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아내가 그녀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볼리비아요? 말도 마세요. 전 볼리비아를 한시바삐 떠나고 싶은 마음밖에 없어요.” 

“아니, 왜요?”

“라파스에 도착하자마자 택시에서 강도를 만나 수중에 있는 현금을 몽땅 털렸거든요. 라파스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강도로 보여 무서워요! ” 

“아이고, 저런! 라파스에서 그런 일을 당하다니 얼마나 놀라셨을까? 참으로 안됐군요.” 


강도를 당한 이야기를 꺼낸 아내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소년이 김이 무럭무럭 고기 접시를 들고 와 우리들 식탁에 내려놓았다. 


"이거, 볼리비아 산 소고기 스테이크인데요. 이미 당한 일이니 다 잊어버리시고 마음껏 드세요.” 


내가 감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떻게 하든 아내가 음식을 먹도록 해야 했다. 


“아, 그래요. 정말 먹음직스럽게 보이는군요.” 

“아마존 강 근처에서 자라는 야생 소들인데요. 부드럽고 아주 맛이 좋아요.” 

“흐음. 정말 부드럽군요. 그냥 입에 살살 녹아드네요! 여보 당신도 좀 먹어봐요.”

“그래요. 사모님,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시고 좀 드세요.”


아마존 산 소고기 스테이크는 정말 부드럽고 맛이 그만이었다. C여사가 아내 앞으로 스테이크 접시를 밀며 권하자 아내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시작한 아내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정말 부드럽고 맛있네요! 고마워요!”

“네, 그러니 걱정일랑 놓아버리시고 고기나 마음껏 드세요.”


음식을 먹기 시작한 아내는 말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기를 먹기보다는 C여사와 말을 주고받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그동안 낯 선 땅에서 '슬픈 언어'에 시달리며 참아왔던 우리말이 마치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제대로 통하는 한국말에 속마음까지 알아주는 C여사가 장단을 맞추며 들어주니 얼마나 신이 났겠는가. 라파스에서 강도를 맛난 이야기에서부터 지구촌 곳곳의 여행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졌다. 역시 여자들은 수다를 떨어야 스트레스가 풀리는가 보다. 


“호호호, 사모님 그 정도 강도는 새 발의 피에요.”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새 발의 피라니요?” 

“10년이 넘게 볼리비아에서 살고 있는 저희들도 얼마 전에 남편이 은행에서 돈을 찾아 나오다가 바로 은행 현관문에서 몽땅 털리고 말았어요. 그게 불과 한 달 전 일이에요.” 

“어머! 정말이요?” 

“남편이 알파카 원단을 사기 위해 현금 5만 달러를 은행에서 찾아들고 막 은행 문을 나서다가 당한 일이지요.” 

“허어, 저런! 어찌 그런 일이….” 

“글쎄 말입니다. 무려 일곱 명이나 되는 일당들이 저희 아저씨 전후좌우에서 달려들어 꼼짝 못 하게 붙들고 현금을 몽땅 털어가고 말았답니다.” 

“에구머니나! 세상에!” 

“아저씨 몸은 다치지 않았나요?” 

“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몸은 다치지 않았답니다. 만약에 저항을 했더라면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모르지요.” 


불행 중 다행이라…. 그렇다. 몸이 성하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밖에 없다. 어제 우리가 당한 일은 정말 새 발의 피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경찰에 수사 의뢰를 했으나 조서를 한 장 꾸밀 때마다 오히려 수사비용을 청구하고 수사는 전혀 진전이 없다고 했다. 아마 이 사건은 은행원이 정보를 주고 강도와 경찰이 서로 짜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현금 5만 달러를 찾아가는 지를 알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은행원과 마피아와 경찰이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사건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는 홧김에 미국 LA로 잠깐 머리를 식히러 가버렸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에요. 며칠 전에는 저희 식당에 차떼기 도둑이 들어 텔레비전 등 값나가는 것은 몽땅 실어가 버렸어요.” 

“아이고, 맙소사!” 

“그러니 두 분께서도 몸을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 생각하시고 남은 여행이나 기분 좋게 잘하세요.” 

“듣고 보니 정말 그렇군요! 아니 그렇게 당하고서도 라파스에 살고 싶은가요?” 

"네, 그래도 전 라파스가 좋아요! 호호호.” 


그렇게 당하고도 멀쩡하게 웃고 있는 C여사를 보자 아내도 나도 마음에 큰 위안이 되었다. 우리들이 당 한 것은 정말 새발의 피라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소년은 스테이크가 떨어지면 다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 접시를 들고 우리들 테이블로 날라주었다. 아무리 먹어도 계속 들어가는 부드럽고 맛 좋은 스테이크였다. 우리는 밤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낯 선 땅을 여행하는 동안 우리가 한국음식과 한국인이 그리웠듯이 C여사도 먼 이국땅에서 살아가면서 마음 놓고 이야기를 나눌 고국에서 온 한국인이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C여사님은 앞으로도 계속 볼리비아에서 사실 건가요?” 

“그럼요. 전 볼리비아가 좋아요. 돈은 다시 벌면 되지 않겠어요.”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그녀는 허공으로 웃음을 날려 보냈다. 여행이 좋아 남미로 여행을 왔다가 볼리비아가 좋아 10년을 넘게 이곳에 머물고 있게 되었다는 C여사. 처음에는 사진 필름현상소를 경영하다가 레스토랑을 차리게 되었고, 남편은 알파카 사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C여사의 마지막 꿈은 우리들처럼 부부가 지구촌의 곳곳을 두루 여행을 다니 것이라고 했다. 아내는 C여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컨디션도 많이 회복된 것 같았다. 이틀 동안의 슬픈 표정이 함박꽃 같은 미소로 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두 분은 언제쯤 라파스를 떠나세요?” 

“사실은 그게…. 내일 아침 칠레 아리카로 떠나려고 합니다.” 

“아니, 그렇게 빨리요?” 

“아내가 거리에 보이는 사람이 모두 강도처럼 보여 무서워서 더 이상 볼리비아에는 머물지 못하겠다고 해서요.” 

“저런! 그래도 여기까지 오셨는데 좀 더 머물다 가시지 않고…” 

“여보, 당신 생각은 어때? 여사님 말씀대로 좀 더 있다 갈까?” 

“아니요. 그래도 하여간 저는 볼리비아 땅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요.” 

“호오… 그래요?” 

“어제 강도에게 하도 충격을 크게 받아서 그렇답니다." 

“그렇기도 하겠네요. 허지만 우유니 소금사막은 정말 놓치기 아쉬운 곳인 데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아내가 저렇게 싫다고 팔팔 뛰니 아무래도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내는 갑자기 어제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 표정이 어두워졌다.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우리는 잉카 식당의 문을 나섰다. C여사는 아들에게 우리들을 호텔까지 바래다주라고 했다. 밤이 늦어 위험하다고 하면서 그녀의 아들을 우리들의 호위병으로 딸려 보냈다. 아쉬운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다. 


“정말로 너무 고마워요! 한국에 오시면 꼭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지요. 남은 여행 잘하시고, 기회가 닿으시면 다음에 꼭 한 번 더 오세요.” 

“저도 정말 그러기를 바랍니다.” 


밖으로 나오니 하늘에 별이 총총 떠 있었다. 그 별 아래에는 또 다른 수많은 불빛들이 은하계의 별처럼 하늘과 땅 사이에 둥둥 떠 있었다. 엘 알토 빈민촌 언덕에서 별처럼 쏟아지는 불빛이었다. 알토(Alto)는 스페인어로 '높은'이라는 뜻인데, 해발 4,100m에 위치한 빈민촌으로 볼리비아 국제공항도 이곳 엘 알토에 위치하고 있다. 

 

혼란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라파스의 밤! 어둠이 덮어버린 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초롱초롱한 불빛만이 반짝거렸다. C여사의 아들, 아니 소년 호위병은 호텔 앞까지 우리를 바래다주고 총총히 사라져 갔다. 용감한 소년이여, 고마울 지고, 고마울 지고… 그들 모자는 낯선 이방인을 보호해주는 라파스의 수호천사였다.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열심히 노력하여 번 돈으로 멋지게 여행을 하며 사는 게 희망이라는 C여사를 우리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장사 밑천을 한입에 몽땅 털리고도 낙천적인 웃음을 보여주는 그녀의 여유 있는 모습에서 우린 다시 ‘용기’를 되찾았다. 그녀의 여유 있는 태도에서 힘을 얻은 우리들은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자신이 생겼다. 


천사는 먼 하늘나라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었다. 라파스에서 만난 수호천사들. 호텔 컨티넨털의 밀렌카 모녀와 잉카 식당의 한국인 C여사가 바로 천사들이 아니겠는가! 위험과 고통 속에서도 반드시 절실한 행복은 있다. 어제는 지옥 속의 밤을 헤매었으나, 오늘 밤은 천당에서 잠을 자는 밤을 맞이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랜만에 단잠을 자고 난 다음날 아침 우리는 일직 라파스 버스터미널로 갈 준비를 서둘렀다. 오늘 아침에는 밀렌카의 어머니 마리나가 터미널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밀렌카의 아버지까지 우리를 배웅하기 위해 로비로 나왔다.


"함께 가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네, 이젠 괜찮습니다. 저희 둘이 갈 수 있어요. 여러분께서 베풀어주신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분을 제 카메라에 담고 싶습니다."

"뭘요. 용기를 잃지 않고 다시 여행을 떠나는 두 분을 보게 되니 안심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세분의 훈훈한 마음을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강도를 당한 우리를 끝까지 돌봐주고 보호해준 밀렌카 가족. 그들은 우리들의 보호해주는 라파스의 수호천사였다.


나는 세 가족을 네 작은 카메라에 담았다. 이 한 장의 사진이 라파스에서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세 사람의 훈훈한 마음이 가슴속까지 깊이 느껴졌다. 밀렌카는 호텔 앞에 라디오 택시를 불러서 안전하게 타고 가도록 배려를 해 주었다. 그들은 우리가 택시를 타고 멀어져 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내는 눈시울을 적시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목젖이 뜨거워지며 코끝이 시큰해졌다. 


"올라!"

"올라!"

"차우!"

차우! 안녕!"


우리는 무사히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Tur Bus 출발점으로 갔다. 오늘 아침에는 버스가 제대로 출발을 할까? 라파스에서 택시 강도를 당하고 나서 아내가 하루속히 볼리비아를 떠나자고 하여 두 번이나 시도를 했으나 두 번 다 버스가 고장이 나서 출발을 하지 못하고 이번이 세 번째 출발이었다.    

  

아내와 나는 조마조마하게 마음을 졸이며 칠레의 'Tur Bus'에 올랐다. 버스는 우리들의 기우와는 달리 6시 30분 정각에 출발을 했다. 버스가 터미널을 출발하여 복잡한 라파스의 시내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치 극적으로 라파스를 탈출하는 느낌이 들었다. “Exodus La Paz!" 뭐 이런 영화 같은 제목으로 우리들의 라파스 탈출을 붙여도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택시강도를 당하기는 했지만 컨티넨털 호텔의 밀렌카 가족, 그리고 잉카 식당의 C여사 등 천사 같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원기를 회복하여 용기를 되찾고 다시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정말 우리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 준 라파스의 수호천사들이다. 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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