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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Aug 23. 2019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말아요

아르헨티나-부에노스아이레스-레콜레타 에비타 무덤에서

"Don't Cry for me Argentia."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영화 '에비타 Evita'에서 마돈나가 불렀던 이 노래는 에비타 무덤 묘비명의 한 구절이 되었다. 나는 80년대 초 뉴욕에서  뮤지컬 '에비타'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전두환 군사독재가 시퍼런 정권을 휘두르고 있을 때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이런 뮤지컬이 상영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에비타가 아르헨티나의 군부 독재자 후안 도밍고 페론을 만나 민주 세력에 의해 실각하기까지의 극적인 삶을 그린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오니 서른세 살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난 에비타의 무덤을 꼭 한 번 둘러보고 싶었다.


"여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기 전에 꼭 들려야 할 곳이 있어요."
"그곳이 어딘데요?"

"에비타의 무덤이오."

"아니, 무덤이 아니라도 갈 곳이 많을 텐데 하필이면 무덤을 가지요?"

"에비타가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묘비명을 보기 위해서요." 

"에비타의 묘비명을 보기 위해서라고요? 아이고, 전 무덤 같은 곳은 도대체 흥미가 없어요."

"아마 레콜레타 공원묘지에 도착하면 당신도 후회는 하지 않을 거요."


아르헨티나의 대통령궁이 가까운 밀하우스 호스텔에서 나온 우리는 레콜레타 묘지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에서 내려 레콜레타 공동묘지 앞에 선 아내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레콜레타 공동묘지는 묘지라기보다는 조각 박물관을 연상케 할 정도로 대리석으로 만든 예술적인 조각 납골당이 수없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게 묘지가 아니고 조각공원을 방불케 하네요!"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소? 이곳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부유층들이 사는 곳이기도 해요."

"공동묘지가 가까운 곳에 부유한 사람들이 살다니 이해가 잘 가지 않는군요."

"그게 우리나라와 서양 사람들과의 주택에 대한 정서가 다른 점이 아니겠소."

"아무리 그렇기도 하지만... 와우, 저 엄청난 대리석 조각들 좀 봐요."


조각공원을 방불케 하는 레콜레타 공동묘지(참조:레콜레타 공동묘지 홈페이지  사진) 


아내는 레콜레타 공동묘지로 들어가며 예술적으로 조각을 한 수많은 납골당을 바라보면서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콜레타 공동묘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땅값이 비싸고 고급스러운 주택가가 몰려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공동묘지에 대한 인식이 우리네 정서와 서양인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공동묘지 근처에 가까이에서 살거나 집을 짓기도 꺼려하고, 또 마을 가까운 곳에 공동묘지가 들어선다면 결사반대를 할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중요시하는 서양인들에겐 조용한 공동묘지가 시끄러운 이웃보다 좋은 모양이다.


수도원의 부속 묘지와 정원을 지금과 같은 공동묘지로 만든 사람은 아르헨티나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Bernardino Rivadavia)였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의 한 건축가에게 공원과 같은 공동묘지를 설계해 달라고 의뢰를 하여 1822년에 묘지는 완공하였다. 우리는 도둑고양이들이 활개를 치는 대부호의 저택 같은 거대한 묘원으로 들어갔다.


전혀 묘지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수려한 조각과 전통적인 장식으로 치장된 납골당은 하나하나가 예술품 그대로다. 레콜레타 묘지에는 5헥타르의 부지에 6,400여 개의 납골당이 있는데, 그중에 70개가 문화재로 등록이 되어 있다고 한다. 천국으로 떠나는 자들의 최고급 주택지랄까? 대리석 기둥이나 탑들이 마치 사자(死者)의 궁궐을 연상케 했다. 대부분 대부호나 유명인사의 가족묘가 안치되어 있으며, 13명의 역대 아르헨티나 대통령 묘소도 이곳에 있다. 


공원 풍경 같은 레콜레타 묘지 풍경


수많은 사자들의 궁궐 무덤을 지나서 마침내 우리는 에비타의 묘소에 도착했다. 레콜레타 공동묘지를 찾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에비타의 무덤을 보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긴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만. 에비타의 무덤 앞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도 줄을 서서 사람들이 빠져나가길 기다렸다. 다소 구석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에비타의 묘소는 생전에 화려함과는 달리 작고 초라했다. 레콜레타의 다른 명망가들이나 부호들의 묘에 비해 에비타의 묘소는 화려 각이나 장식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나 1년 365일 동안 에비타의 무덤에는 꽃이 시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죽은 후에도 에비타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가 듣던 에비타의 그녀의 명성에 비해서는 묘지가 너무 초라하군요."

"그러게 말이요. 에비타는  죽은 지 24년 후에야 이곳에 묻힐 수 겨우 있었다고 해요." 


에비타의 묘지를 보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관람객들


에비타의 본명은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페론(Maria Eva Duarte de Peron)다. 그녀는 1919년 5월 7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50마일 떨어진 드넓은 초원지대 팜파스에 속한 시골마을 로스 톨도스에서 부유한 농장주인 후안 두아르테와 그의 정부 농장 요리사였던 후아나 이바르구렌 사이에서 네 번째 사생아로 태어났다. 두아르테의 정식 부인은 따로 있었는데, 정부 후아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에바와 다른 딸들은 법적인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생부로부터 버림받은 에바는 모친과 다른 자매들과 함께 후닌으로 옮겨 그곳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며 지냈다. 


에바는 그녀의 아버지 두아르테가 죽자 사생아라는 이유로 그녀는 장례식 참석까지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에바는 본처 가족들과 중산층 계급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에바는 학창 시절 학교 연극과 연주회에서 재능을 발휘하며 영화배우가 될 꿈을 키워갔다. 그녀는 탱고 가수 오거스틴 마갈디를 만나 그와 함께 가방 하나만 들고 고향 팜파스의 흙먼지를 떨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무작정 향했다. 그녀의 나이 15세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옮긴 그녀의 생활은 고향에서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었다. 에바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은 바로 '아름다운 몸과 얼굴' 하나였다. 그녀는 하루하루 끼니를 해결하기 위하여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에바는 자기의 앞길을 이끌어 줄 것 같아 보이는 남자와 스스럼없이 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실속이 없으면 가차 없이 떠났다. 에바는 여러 명의 남자 품을 전전하며 삼류 극단의 배우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살기 위해 여러 남자의 품을 떠도는 비애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을 귀엽고 순진하게 꾸미고 싶어 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에비타라고 불렀다. 에비타는 꼬마 에바라는 뜻이다.     

             

25세 때의 에비타의 아름다운 미모(자료:위키피디아)


에바는 모델, 연극배우, 영화배우, 라디오 성우 등 각 방면에서 닥치는 대로 활동하며 차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먹고살기 위하여 길거리에서 몸을 파는 창녀에서부터 무명의 단역 배우에 이르기까지 별처럼 많다. 마침내 그녀는 1940년 경부터 유명 연예인이 되었고, 라디오 방송국을 소유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에비타의 나이 24세 때인 1944년, 그녀는 육군 대령인 후안 페론과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녀는 이미 미모와 야심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로 성장해 있었다. 당시 육군 대령 출신으로 노동부 장관이었던 후안 페론은 이재민 구호로 위한 기금을 마련하려고 했는데, 이때 에바를 만나 그녀의 젊은 미모에 빠져들어 사랑을 하게 되었고, 동거를 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페론은 첫 번째 부인을 잃고 독신으로 살고 있었다. 


명성에 비해 초라하게 보이는 에비타 묘지 


에바는 후안 페론이 자신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에바와 함께 이재민 구호 기금을 마련하는 등 하층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페론은 곧 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며 군부와 대중의 지지를 동시에 확보를 하면서 1946년 마침내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했다. 그런 후안 페론의 뒤에는 에바 페론이 있었다. 에바 페론은 후안 페론의 대통령 선거 유세에 동행을 하며 대중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에바의 아름다운 외모와 확신에 찬 연설은 아르헨티나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에바 페론의 인기 덕에 후안 페론은 대통령 선거에 승리를 하고  에바는 마침내 영부인의 자리에 오른다. 

       

에바는 정부 내에서 공식적인 직책에 오른 적은 없으나, 노동자 및 하층민들에게 후한 정책을 펼칠 수 있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며 사실상의 보건부 장관 자리에 있었다. 1947년에는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하였으며, 대통령인 남편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스페인에서는 가난한 아동들에게 구호 활동을 펼쳤고, 프랑스에서는 샤를 드골을 만나 식량 지원을 약속했다. 


에바 페론 재단에서 빈민층을 만나고 있는 에비타(자료:위키피디아)

                 

한편, 에바는 기업, 노동단체 등의 헌금으로 운영되는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하여 그 대표를 겸했다. 에바 페론 재단의 기금은 학교, 병원, 양로원 등을 건립하고 각종 자선사업을 하는 데 사용하며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 전역을 다니며 복지사업과 봉사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상류층 및 군부와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1950년부터 건강이 나빠진 에비타는 자궁암 진단을 받았다. 그런 상태에서 그녀는 1951년 8월 22일 남편 페론의 대통령 재선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수백만 명이 모이는 공개 까빌도(일종의 시민민주주의 행사)에서 공개적으로 부통령 후보를 사임했다.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라는 노래는 바로 사임하는 공개 까빌도 행사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해 11월 페론은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했으나, 에바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위해 자신의 병을 이를 악물고 숨겨왔다. 그러나 그의 암은 상태가 더욱 악화돼, 1952년 7월 26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나이 겨우 33세. 스페인 출신의 페드로 아라 박사는 에비타의 시신을 '영원히 부패하지 않는 미라'로 만들었다. 에비타가 죽은 후 한 달 동안 국가적 애도 기간이 선포되었고, 오락이 중지되고, 상점 등이 3일간이나 문을 닫았다. 아르헨티나 대중들은 에바 페론의 죽음을 광적으로 애도했고, 한 달 간의 장례식은 국민들이 바친 꽃으로 뒤덮였다. 


한 달동안 치러진 에비타의 장례식. 좌부터 에비타의 미라, 장례식 화환, 추모물결

                    

에비타의 미라는 그녀를 기리는 의미에서 전국 노동조합 연맹 CGT 본부 건물에 전시되었다. 그러나 1955년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페론이 실각하는 어수선한 상황에서 에비타의 시체가 사라졌다. 1972년이 되어서야 그녀의 시체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국외에 반출되어 이탈리아에 묻혀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페론주의의 부활을 염려한 아르헨티나 군부에 의해 시신이 탈취되어 이탈리아에 숨겨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발견된 시신은 당시 스페인에서 망명 중이던 남편 페론에게 반환되었다.         

                         

에바 페론이 죽은 후에도 아르헨티나의 수많은 노동자, 빈민, 소외계층, 여성들은 여전히 그녀를 그리워했다. 스페인에 망명 중이던 페론은 1972년 귀국하여 그러한 에바 페론의 후광을 등에 업고 1973년 세 번째로 대통령이 되었다. 1974년 에비타의 시신은 레콜레타 묘지로 이장되었다. 그런데 그녀의 시신은 또 한 번 유괴되는 수난을 겪게 된다. 찾은 시신은 공동묘지로 가지 못하고, 1976년까지는 올리보스에 있는 대통령 관저에 보관되었다가 레콜레타에 있는 두아르떼(Duarte) 가문의 가족묘에 안치되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던 에비타는 죽어서도 시신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시련을 겪으며 레콜레타 묘지에 안장되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귀족들의 묘역에는 꽃 한 송이도 없는데, 에비타의 묘역에만 꽃을 든 사람들이 몰리고 있군요."

“불행한 사생아로 태어난 그녀가 소외계층을 돕는 성녀의 길을 걷고자 했기 때문이 아닐까?”


에비타의 묘지에 새겨진 비명


에바 페론과 후안 페론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포퓰리즘(populism)을 적극 이용한 사람들로 평가되기도 한다. 에바 페론의 포퓰리즘은 에비타의 사망 이후, 남미의 여러 나라에서도 현실을 무시하고 포퓰리즘을 앞세워 대중의 눈을 가리고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나쁜 평가를 하기도 한다. 허지만 그녀를 포퓰리즘으로 노동자와 빈민층을 마취시킨 악녀라고 무작정 비난할 수만은 없다. 그녀가 수없이 행한 초인적인 봉사와 헌신은 거짓이 아닌 그녀의 진심을 담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엇갈린 평판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의 수많은 대중들은 아직도 에비타를 그리워하며 그녀를 '성녀'로 추앙하고 있다.  그녀가 세상을 떠진 지 반 세기기가 지났는데도 그녀의 묘지에는 추모 행렬이 끝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팜파스 시골의 초원지대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에비타는 온갖 역경을 다 겪은 후 극적으로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애석하게도 30대 초반의 나이에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한창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젊은 나이에 요절을 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그녀를 더욱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거룩한 악녀이자 천한 성녀'로 불리기도 했던 에비타의 묘지에는 아름과 같은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이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이제 내가 보이지 않고
사라진다 해도
영원히 아르헨티나인으로
남을 것이고
여러분들을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겁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레콜레타 공동묘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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