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찰라 Dec 12. 2019

이스터 섬에서 길을 잃다

한 마리 새가 되어 태평양을 날아가다!

이스터 섬에서 길을 잃다 

    

스즈키 고물차는 아나케나 해변을 떠나 비포장도로를 덜덜거리며 달려갔다. 이스터 섬에는 일본 산 중고차들이 굴러다니고 있는데, 대부분 영화 '라파누이'를 촬영할 때 쓰다가 섬에 남겨두고 간 차들이라고 한다. 그래도 사륜구동차라 힘이 좋아 울퉁불퉁한 흙길을 잘도 간다.


황량한 초원은 영락없이 제주도의 오름 길을 닮았다. 아후 아키비 석상으로 가는 길은 아나케나 해변에서 섬의 중앙부를 가로질러가다가 우회전을 하는 것으로 지도에 표시가 되어 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석상은 보이지 않는다. 파도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섬의 중심부의 상당히 높은 지대에 올라온 것 같은데, 어디를 보아도 아키비 모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꽤 높이 올라온 것 같은데 아키비가 보이지 않지?"

"지도를 다시 한번 살펴봐요?"


자동차를 세우고 숙소에서 로져가 준 요술 같은 지도를 펴 들고 보았지만 간선도로만 굵게 표시되어 있고, 세부적인 길은 표시는 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이 작은 섬에서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길을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언덕의 초원에서는 말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말들은 길을 알고 있을까? 엄마 말이 아기 말을 데리고 초원에서 유희를 하며 풀을 뜯고 있었다. 


제주도의 오름 같은 언덕에 말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다.


사랑스럽고 평화로운 정경이다.

세상의 사랑과 평화는 저 엄마 말과 아기 말에서 오는 거야. 

먹을 것을 쌓아 놓을 생각도 아니하고 

초원의 풀을 그저 뜯어먹으며 되니까 

엄마 말과 아기말은 도대체 아무런 걱정이 없이

사랑스럽고 평화롭게만 보인다. 


"저 말들에게 길을 물어볼까?"

"이런 좁은 섬에서 길을 잃은 들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요? 저 아기 말이 너무 귀여워요! "

"정말이군! 이런 게 진짜 여행의 진수가 아닐까? 진정한 여행은 길을 잃고 나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질 않소? "

"맞아요! 길을 잃은 덕분에 우리가 잔디 위에서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편히 쉬는군요."


우리는 길을 잃고 나서 비로소 한가로이 쉬고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우리는 높이 올라온 김에 산 정상까지 가보기로 했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오름 같은 둔덕이었다. 자동차의 자국만 나 있는 그런 길. 이러다가 자동차가 고장이라도 나면 꼼짝없이 걸어가야 한다. 전화도 인적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힘센 스즈키는 잘도 굴러갔다. 점점 시야가 확 트이고 보이는 건 감청색의 푸른 바다뿐이다. 길은 테레바카 정상 밑에서 끊겨 있어 자동차는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 나는 자동차의 시동을 끄고 아내와 함께 정상으로 걸어서 올라갔다. 


테레바카 정상으로 가는 언덕


"와, 정상이다!"

"오, 저 망망대해!"


길을 잃은 덕분에 우리는 이스터 섬에서 가장 높은 테레바카 분화구가 있는 정상까지 오른 것이다. 탄탄하고 봉긋한 모양이 '팹스 오브 쥐라'(Paps of Jura, 쥐라 산맥의 젖꼭지라는 뜻으로, 젖꼭지 모양으로 늘어선 둔덕)와 비슷하다. 테레바카는 섬에서 가장 높은 봉분으로 해발 506m나 된다. 정상에 올라서니 구름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삼각형 모형을 이루고 있는 이스터 섬에는 테레바카를 중심으로 세 개의 젖꼭지가 있다. 동쪽에는 410미터의 포이케, 남서쪽에는 라노 카우로 300미터 높이다. 그리고 중앙에 테레바카 젖꼭지 세 곳이다. 분화구가 터져 나와 생긴 꼭지 점이 꼭 젖꼭지처럼 생겼다. 


테레바카 정상에는 작은 분화구가 세 개나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 바람은 풋풋하고 공기는 청청하다. 짙은 감청색의 바다는 잠에서 막 깨어난 듯 태곳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딜 보아도 바다뿐이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감동은 저절로 한 줄 시로 변한다. 시란 하나의 느낌이 아닌가!


나는 푸른 바다를 날아온  

한 마리 새라네.

어디로 갈까?

모든 봉우리에는 휴식이 있다네.

여기, 이스터 섬 정상에서

지친 날개 쉬어 가세

나는 푸른 하늘을 날아온

한 마리 새라네.     


테레바카 정상에서 한마리 새가 되어...


구름이 손에 잡힐 듯 지척인데 갈 곳은 멀다. 날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사방이 바다뿐인 이곳에서 섬사람들은 새고 되고 싶었겠지. 날개를 달고 푸른 하늘을 마음껏 날고 싶었겠지. 그래서 사람들은 해마다 '새사람(bird man)'을 뽑고, 새 그림을 그리고, 새 모형의 글자를 썼겠지. 


바다, 하늘, 구름, 바람, 새, 모아이 석상……. 이스터 섬은 그런 곳이다. 섬은 이 다섯 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에 하나를 더 한다면 '수수께끼'란 단어가 아닐까? 지상 최대의 수수께끼가 아직 풀리지 않은 채 잠을 자고 있다. 

    

아무도 없는 곳에 

바람이 붑니다.

태곳적 바다에서 탄생한 바람은

파도를 일으켜 소리를 내고

하늘과 구름 사이를 오가며 

내 영혼에 불을 지핍니다.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어 

바람 따라 

이 세상 끝까지 가고 싶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

바람이 붑니다. 

    

나는 사방 천지에 불어오는 바람을 비디오 영상에 담았다. 보이지 않는 바람을 마구 찍어댔다. 바람은 바다가 되고, 하늘이 되고, 내 마음에 혼 불이 되어 영상에 감겼다. 바람은 적막한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듯 소리를 내며 영상으로 변해갔다.

 

바람을 담다가 나는 거대한 테레바카 봉분에 길게 누워 눈을 감았다. 오직 바람 소리만 들려오는 곳! 눈을 감으니 하늘도 바다도 보이지 않는다. 그곳엔 모아이의 형상도 없다. 이제 바람 소리마저 아득히 멀어져 간다. 나는 바람과 하나가 되어 가고 있었다. 바람 속에서 모아이의 영혼을 본다. 눈을 감으니 비로써 모든 것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나는 누운 채로 잠시 명상에 들었다. 윙윙 바람 속에서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 여사의 말이 들려왔다.   

  

“가장 아름다운 세상은 언제나 상상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은 정상인에게나 시각장애인에게나 마찬가지다. 지금의 내가 아닌 대단한 나. 말하자면 멋지고 고귀하고 훌륭한 내가 싶다면 눈을 감아라. 그러면 그렇게 상상하는 동안 간절히 바라는 내가 된다.”


눈을 감고 있으니 내가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늘의 무한한 공간, 태양의 온기, 모아이의 영혼, 바람의 감촉, 하늘을 떠가는 구름,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 이 모든 것들이 동시에 마음속에 흘러갔다. 정신세계는 이렇게 끝 간 데가 없이 무한하다.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어 끝없이 푸른 태평양을 날아가고 있었다.


바람이 되는 기쁨!

바람 따라 날아가는 새가 되는 기쁨!

그대가 바람이면

나도 바람!

그대가 새라면 

나도 한 마리 새라네!

아아,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어  

푸른 바다를 날아가고 있다네! 


"여보, 그만 일어나요!"

"엇, 내가 잠시 잠이 들었나 봐요. 허허허."


나는 나를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어 푸른 바다를 날아가는 달콤한 꿈에서 깨어났다. 우리는 테베바카 산에서 내려오다가 너무나 쉽게 아후 아키비 석상을 발견했다. 그렇게도 찾기 어려웠던 아키비를 이렇게 쉽게 찾다니 놀라웠다. 마음의 눈이 저절로 아키비를 찾아주었을까? 허허로운 목초지에 일곱 개의 모아이가 멀리 바다를 향해 서 있었다. 그래, 보이지 않으면 눈을 감고 마음으로 눈으로 보자!


이스터 섬에서 유일하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아후 아키비 모아이 석상


"어? 저기 모아이 석상이 있네요!"

"이렇게 쉽게 찾는 걸 그리도 헤매다니. 눈을 감고 있으니 아키비 모아이가 나타났군."

"다른 모아이들은 모두 바다를 등지고 있는데, 이 모아이들만 바다를 바라보고 있지요?"

"그건… 자 보자, 아우 아키비는 호투 마투아 왕의 전설에 나오는 일곱 명의 사자를 기리기 위해서 그렇게 세워졌다는 군."


이스터 섬에 있는 모든 모아이들이 바다를 등지고 있는데 유독 아후 아키비의 모아이들은 모두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이는 호투 마투아 일행이 자신이 떠나온 고향 폴리네시아의 히바섬을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 침묵이 감돌고 있는 모아이 석상. 그곳엔 바람만이 석상에 부딪치며 윙윙 소리를 내고 있었다. 모아이가 바라보는 곳을 향하여 시선을 던져본다. 그러나 보이는 건 어머니 같은 바다뿐이다. 


실제로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에는 폴리네시아의 파투 히바(Fatu Hiva) 섬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히바 섬은 이스터 섬으로부터 북서쪽으로 3,641km 머나먼 섬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 모아이들이 응시하고 있는 방향은 춘분과 추분 일몰 방향이어서 천문학적인 성격도 곁들여서 세워진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호투 마투아  왕의 고향인 히바 섬을 바라보고 있다는 아키비 모아이 석상


아후 아키비는 이스터 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모아이 석상이다. 전설에 따르면 호투 마투아의 신부 하우 마카(Hau Maka)는 호투 마투아가 섬을 보았을 때 그의 영혼이 바다를 가로질러 날아간 꿈을 꾸었다고 한다.  기 이후 호투 마투아는 바다를 항해하는 7 명의 탐험가를 보내 섬을 찾고, 그 조건과 해산하기 가장 좋은 지역을 연구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역사적이니 기록이나 증거는 없고 전설로 내려올 뿐이다. 


아키비! 아키비!

아키비도 어머니의 바다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모아의 석상의 귀는 왜 모두 길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