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주 퍼스-프리맨틀-록킹햄-만두라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만날 사람은 꼭 만나게 되고, 헤어질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가고 싶은 곳은 언젠가는 가게 되고, 그리고 어디론가 다시 떠나게 되니 말이다. 서호주의 끝 퍼스가 바로 그런 곳이다. 퍼스는 내가 일찍이 내 여행의 버킷 리스트로 방점을 점을 찍어 놓은 곳이었는데 이번 세계일주 여행 중 그 꿈이 드디어 실현되었다. 퍼스는 호주 대륙에서 가장 외딴 대도시다. 가까운 도시로는 2,140킬로미터 떨어진 호주 남부 애들레이드 정도다. 퍼스에서 시드니까지는 무려 3,934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져 있어 같은 나라 시드니보다 인도네시아 발라가 더 가까운 정도로 고립된 도시다.
몇 달 동안 제대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던 남미 스페인어 권역에 있다가 서투른 영어지만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호주에 도착하니 고향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했다. 호주 대륙은 남한의 100배나 큰 땅이다. 그중에서도 서호주는 남한의 33배나 되는 넓은 땅인데 인구는 고작 190만 명이다. 이 가운데 대부분인 150만 명이 서호주의 수도 퍼스에 살고 있다.
12월 24일 남미대륙의 끝 푼타아레나스에서 출발한 우리는 하늘에서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오클랜드와 시드니를 경유하여 12월 26일 호주 대륙의 최서단에 위치한 퍼스에 도착했다. 지구 상에서 가장 고립된 도시라는 별명을 가진 퍼스에 도착하니 이곳이 세상의 끝처럼 느껴졌다.
우리나라와 절기가 정 반대인 12월의 퍼스는 섭씨 40도를 웃도는 불볕더위가 지속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연휴와 신년 연휴를 맞아 공항은 여행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렌터카를 이용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동이 나버려 며칠을 기다려야 차례가 온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오는데 고층빌딩 스카이라인이 신기루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북적대는 공항과는 달리 다운타운은 너무나 조용했다. 모두가 해변이나 휴양지로 여행을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다운타운에서 숙소로 가는 67번 버스로 갈아탔다. 버스엔 동양인 여성이 세 딸과 함께 딸랑 앉아 있었다. 같은 동양인을 본 그녀는 반가운지 먼저 인사를 먼저 건넸다. 베트남에서 이민을 왔다는 그녀는 우리가 머물 숙소를 친절히 가르쳐 주며 퍼스의 이곳저곳에 대한 안내까지 해주었다. 그녀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백조의 강(Swan River) 건너편에 위치한 노쓰 로지 백패커스(North Lodge Backpackers)에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풀다가 놀랍게도 우리는 한 한국인 유학생을 만났다. 그녀는 부산에서 온 미스 염이라고 했다. 그녀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 먼데까지 와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영어공부를 하다니 참으로 용기 있는 한국인이다. 나는 미스 염을 바라보며 하늘 길을 통해 무역을 하는 칠레의 그 한국 여인을 상기시켰다. 용감한 한국의 여인들이다! 이제 세계 어디를 가나 한국인을 만날 수 있게 된다.
12월 27일 아침 우리는 무료 셔틀버스인 ‘블루 캐츠’를 타고 다운타운으로 갔다. 텅 빈 버스에 아내와 단 둘이만 타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운타운에서 내려 도심 산책을 하는데 거리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머레이 스트리트와 헤이 스트리트의 고급 백화점과 패션매장은 문이 모두 닫혀 있었다. 런던코트와 킹스트리지의 고급 부티크에도 문이 닫힌 채 고급 물품이 박제된 인형처럼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을 뿐 사람을 구경하기는 힘들었다.
"이거야 정말, 어디 사람 사는 곳이 맞는가? 도대체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없으니 말이야."
"그러게 말에요. 정말 유령의 도시처럼 조용하기만 하군요."
런던의 어느 거리를 빼다 닮은 것 같은 매인 스트리트는 수족관처럼 투명하고 깨끗했다. 그러나 거리는 사람도 자동차도 구경하기 어려운 진공상태였다. 모두가 어디론가 연말연시 휴가를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도시도 휴가철에는 결국 주변의 관광지로 가는 거점도시에 지나지 않는다. 퍼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퍼스에 도착한 여행자들은 아름답고 청청하게 펼쳐진 비치에서 윈드서핑 등 각종 해양레포츠를 즐기거나 주변 휴양지로 여행을 떠난다.
어쨌든 사람이 없는 퍼스 거리는 김 빠진 맥주와 같았다. 우리는 갈증도 풀고 다리도 쉴 겸 프리맨틀 해이스트리트의 어느 골목에서 문이 열려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우선 맥주를 한잔을 시켜 마른 목을 축였다. 황금색 맥주가 목 줄기를 타고 넘어가자 속까지 시원했다. 퍼스는 맥주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톡 쏘는 맛의 패일 애일(Pale Ale)이나, 프리맨틀 필스너(Fremantle Pilsner)를 마시기 위해 호주의 부자들은 퍼스로 맥주 여행을 떠나오기도 한다.
150년 전통의 맥주집 프리맨틀 세일 앵커
서호주의 매력을 한껏 진하게 느끼고 싶으면 맥주 맛이 좋은 항구도시 프리맨틀로 가야 한다. 맥주와 피자 맛이 좋고 먹 거리가 풍부한 곳이기 때문이다. 때마침 서호주는 맥주의 소비가 가장 많은 계절인 여름철이었다. 퍼스에서 불과 20km 정도 떨어진 프리맨틀은 호주 철도의 서쪽 종점이다.
19세기 금광이 많은 서호주까지 대륙횡단철도가 이어진 프리맨틀은 퍼스와는 달리 19세기에 건설된 중세풍의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역에서 내리자 곧바로 마켓거리로 이어졌다. 빅토리아풍의 고풍스러운 건물이 시장이라고 히니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관광객들이 북적거려 사람 냄새가 났다. 역시 아무리 아름다운 도시라도 사람이 없으면 김 빠진 맥주다. 그래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을까?
"여긴 사람 냄새가 풍겨서 좋군요."
"저 시장 건물이 마치 궁전 같은 분위기네요."
“그러게, 마치 중세기의 어느 시장을 방문한 기분이 드네!”
시장을 발견한 아내는 기운이 나는 모양이었다. 꼭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아내는 아이쇼핑을 즐거워한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시장 안에는 수많은 상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수백 개에 이르는 가게는 각종 기념품을 비롯해서 보석, 야채, 장신구, 카우보이 모자 등이 진열되어 있고, 풍부한 먹 거리가 여행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시장 안은 여행자들로 가득 치 있었다. 퍼스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이 곳으로 왔을까?
여행은 보고, 먹고, 쇼핑을 하는 데서 묘미가 있다. 프리맨틀 시장은 그런 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시장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아내는 기념으로 티셔츠 한 벌을 골랐다. 시장 뒷문으로 빠져나오니 진한 카푸치노 향기기 코를 찔렀다. 사우스 테라스 거리는 '카푸치노 스트립'이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노천 테이블을 죽 펼쳐 놓은 카페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우리는 잠시 노천카페에 앉아 카푸치노를 한잔을 마시며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여행이란 이렇게 거리에 앉아 카푸치노 한잔을 하면서 노닥거리며 오가는 사람 구경을 하는 것도 별미 중의 별미다.
"나의 왕비님, 오늘 점심은 세일 앵커로 모시겠습니다."
"세일 앵커라니요?"
"가보면 알아요."
프리맨틀에서 유명한 맥주집의 하나가 '세일 앵커(Sail Anchor)'다. 1854년에 세워진 이 술집은 원래 여관이었다고 한다. 항해를 하다가 닻을 내리고 상륙을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맥주가 아니었을까? 현지인들과 여행자들로 북적거리는 세일 앵커에는 모두가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무슨 수다들을 그렇게들 떠는지 맥주를 마시면서 호들갑스럽게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이 퍽 여유롭게 보였다. 이렇게 맥주 한잔을 마시며 그동안 쌓였던 대화를 나누는 것이 오스트랄리언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가볍게 맥주를 마시며 조그마한 화젯거리도 서로 재미있어라 하며 들어주는 매너가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고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고 있다는 것.
대화란 상대방의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술술 풀리는 것이다. 너는 이야기하고 나는 딴생각을 하고. 그러다가 보면 대화는 단절되고 더 이상 진전이 안 된다. 이게 코리언 스타일이 아닐까? 그러나 둘만 떠나는 여행은 자연스럽게 대화가 진행된다. 이야기 상대가 단 두 사람뿐이니 억지로라도 대화를 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대화가 없는 부부라면 단 둘이서만 여행을 한 번 떠나는 것을 시도해 보는 것이 좋다. 물론 싸우고도 돌아오는 수도 있겠지만 싸우는 것도 서로 대화를 한 결과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우리도 세일 앵커 테이블에 앉아 우선 프리맨틀 맥주의 대명사처럼 여기는 인디언 패일 애일(Indian Pale Ale)과 피시 칩을 시켰다. '앵커(닻)'가 그려진 맥주잔이 퍽 인상적이었다. '닻을 내리고 맥주를 마시자' 19세기 이곳을 항해하는 선원들은 이 항구에 닿으면 아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 맥주는 프리맨틀에 있는 '리틀 크리에이쳐 브루어리'에서 생산되는 호주의 일품 맥주다.
"흠, 역시 톡 쏘는 맛이 일품이군!"
"난, 그 맛이 그 맛 같은 데요."
술맛을 전혀 모르는 아내는 모든 맥주 맛이 쓰기만 하단다. 패일애일은 거칠고 톡 쏘는 터프한 맛을 내는 맥주다. 높은 온도에서 발효시켜 만든 맥주에서 나는 특별한 맛이라는 것. 톡 쏘는 맥주를 마시며 나른한 오후를 즐기는 호주인 들의 기분을 조금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맥주를 본격적으로 마시고 싶은 젊은이들은 '리틀 크리에이쳐 브루어리'양조장으로 간다. 두 동의 유리 건물은 엄청난 크기의 맥주 통(저장고)과 피자화덕이 있다. 바를 가득 채운 젊은이들은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피자에다 맥주를 마셔댔다. 뮌헨에 있는 유명한 맥주 집 '호프브로이하우스'만큼 호화롭지는 않지만 항구 도시의 자유로움이 낭만을 느끼기에 좋은 곳이다.
세일 앵커에서 맥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다가 우린 '라운드 하우스'와 프리맨틀 감옥을 돌아보았다. 라운드 하우스는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1831년에 지어진 감옥이다. 퍼스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 박물관도 아니고 감옥이라고 하니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호주 대륙에서도 가장 고립된 이 지역은 금광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죄수들이 일구어낸 도시다. 그러나 여느 도시가 그러하듯 이제 이 감옥 건물들도 관광지로 탈바꿈하였다. 운동장 벽에 죄수들이 그린 나무와 풀, 수용소 내부의 방에 그려진 애보리지니 문양 모양을 한 벽화는 당시 죄수들이 자유를 갈망하며 감옥을 나가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프리맨틀 항구의 매력은 밤에 있다. 석양 노을이 질 무렵 피싱 보트 하버를 서성거리다 보면 항구를 둘러싸고 있는 레스토랑과 퍼브에 불이 켜지기 시작하며 바닷물에 아름다운 수채화를 그려 낸다. 정박해 놓은 요트 안에서 서호주의 부자들은 맥주와 피시 앤 칩스(Fish and Chips, 생선을 버무린 감자튀김)를 느긋하게 즐긴다.
우리는 원조이면서도 오랜 전통을 가진 ‘시세렐로스’로 들어갔다. 1903년부터 오랜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시세렐로스’는 서호주에서 가장 맛있는 피시 앤 칩스를 서비스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레스토랑에는 역시 젊은 기운이 가득 차 있었다. 종이에 아무렇게나 돌돌 말아주는 피시 앤 칩스 맛은 고소하고 싱싱하다. 바삭거리며 입에 살살 녹았다. 거기에 프리맨틀 필스너 맥주 한잔을 곁들이니 세상 부러운 것이 없었다.
"여행은 바로 이 맛이야!"
"맥주 한 잔 맛이란 이야기죠?"
"값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재미도 빼놓을 수없어요. 하하."
그렇다! 때로는 여행은 한 잔의 맥주 맛과도 같은 것이다!
서호주는 퍼스를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휴양을 할 수 있는 해변이 길게 늘어서 있다. 우리는 내친김에 1일권 버스를 타고 록킹햄(Rockingham)과 만두라까지 드라이브를 가기로 했다. 프리맨틀에서 920번 버스를 탔다. 쪽빛 바다가 끝없이 이어져 있다. 해변에는 고급 리조트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록킹햄에 도착하여 202번 도로를 따라갔다. 록킹햄에 가면 202번 도로를 반드시 가야 한다. 록킹햄에서는 돌고래와 함께 수영을 할 수도 있다는 데 시간도 없고, 당초에 스노클링을 할 계획도 없었기에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또한 페리로 5분 정도만 가면 펭귄 섬으로 가서 펭귄과 바다사자, 물개 등을 관찰할 수 있다는 데 당일날 퍼스로 돌아가야 하므로 시간상 갈 수가 없었다.
대신 우리는 168번 버스를 타고 만두라(Mandurah)까지 갔다. 만두라는 서호주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부촌이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아름다운 인공 호수와 그 주변에 들어선 고급 주택가들이다. 집앞마다 비싼 요트들이 정박해 있다. 우리는 만두라 해변에서 카푸치노 한 잔을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호수 속에서는 검은 개가 갈매기를 열심히 쫒고 있었다. 허지만 닭 쫓는 개다. 아물 발버둥을 쳐 보아야 날아다니는 갈매기를 잡을 수는 없다. 그런데 녀석을 그냥 재미로 갈매기를 쫒는 것 같았다. 잔디밭에서는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아기가 갈매기를 쫓아다녔다. 갈매기를 좇는 개나, 아기들이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169번 버스를 타고 퍼스에 돌아오니 저녁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내리며 서호주의 해변을 돌아보았다. 버스도 한가롭고 해변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서인지 별로 피곤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