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탈라궁 동서남북 코라 수행기
라싸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포탈라궁에 오르는 것을 서두르지 않았다. 아내의 숨이 아직 고원에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매일 아침, 궁을 에워싼 길로 나섰다. 포탈라궁 코라를 돌기 전에 조캉사원 바코르를 돌았다.
조캉의 가장 대표적인 코라 바코르는 1km 안팎의 거리다. 조캉 코라는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수행’이다. 여기서는 깨달음이 높은 데 있지 않다. 낮은 곳에서 서로의 어깨를 스치며 자비가 현실이 되는 순례의 현장이다. 조캉사원 바코르를 돈 후 우리는 1.5km 정도 되는 포탈라궁 코라를 돌았다. 코라는 오르지 않고도 다다르는 길이다. 정복하지 않고도 만나는 길이다.
포탈라궁 코라는 시계방향으로 돈다. 원은 하나지만, 방향은 네 개의 얼굴을 가진다. 남쪽에서 태어나 서쪽에서 비우고, 북쪽에서 견디며, 동쪽에서 다시 밝아진다. 이 네 구간을 모두 통과할 때, 한 바퀴는 삶의 축약판이 된다.
남쪽은 넓다. 하늘이 먼저 열리고, 사람도 많다. 포탈라궁의 흰 벽이 햇살을 받아 가장 먼저 숨을 튼다. 여기서 순례는 시작된다. 오체투지의 이마가 돌에 닿고, 마니주의 금속음이 박자를 만든다.
남쪽 코라는 가장 공적인 공간이다.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하여 전국에서 모여든 수많은 순례자들이 마니주를 돌리며 순례를 하고, 포탈라궁을 향하여 오체투지를 하며 기도를 하고 있다. 출발은 늘 낮춤으로 시작된다. 말은 적고 침묵 속에 몸이 앞선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날. 코라의 원은 이미 그려져 있고,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 몸을 맡겼다. 먼저 마니주를 돌리며 걷는 순례자들 틈에 섞였다. 그들의 손목 각도는 조금씩 다르다. 빠른 회전도 느린 회전도 없다. 소리는 제각각인데 방향은 하나다. 금속의 둔탁한 울림이 발걸음과 맞물린다. 기도는 입술에서 나오지 않고 손과 발, 관절의 반복에서 나온다. 여기서 기도는 바람의 기술이다. 부딪히지 않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마니주를 돌리며 걷는 순례자들 앞에는 오체투지의 물결이 이어진다. 서서 합장하고, 허리를 굽히고, 온몸을 펴서 땅에 대고, 무릎, 이마를 대고, 다시 반대로 일어선다. 돌바닥은 거칠다. 그러나 그 거침이 몸을 깨운다. 한 번의 굽힘과 낙하에 하루가 들어있고, 한 번의 일어섬에 한 생이 담긴다. 누군가는 모자를 벗어 놓고, 누군가는 작은 매트를 깐다. 준비의 차이는 있어도 결론은 같다. 간절함, 간절할수록 기도는 깊어진다. 낮아짐, 낮이질수록 길은 넓어진다.
장애를 안은 소년을 만난다. 소년은 하반신 마비인지 배를 땅에 대고 팔로 겨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순례자들이 소년이 나가는 길을 비껴준다. 소년도 순례자도 말은 없지만 마음은 서로 통한다. 누더기를 걸친 소년의 왼손에 지폐가 한 장 한 장 쌓인다. 아내도 지폐 한 장을 소년의 손에 쥐어준다. 소년이 있는 곳의 속도는 다르다. 그러나 밀리지 않는다.
원안에서는 모두가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누군가는 앞을 비켜주고, 누군가는 뒤를 받친다. 이곳의 장애는 이유가 아니라 조건이다, 숨이 이어지는 한 자리는 있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백발의 노파를 만난다. 노파는 궁을 향해 천천히 오체투지로 기도를 올린다, 한 번, 두 번, 그렇지만 그치지를 않는다. 간절함이 느껴진다. 아직 시간이 몸에 남아 있다. 손등 주름은 지도처럼 갈라져 있다. 이마가 땅에 닿을 때마다 두 손은 하늘로 합장을 한다. 오래 살아온 노인이 기도는 길고 느리다. 길다는 것은 많이 말한다는 뜻이 아니라, 많이 견뎠다는 뜻이다. 댕기 끝에 푸른 색깔, 빨간 분홍신, 온몸을 땅에 접지한 모습이 진지하고 간절하다.
할머니와 함께 순례를 도는 예쁜 소녀를 만난다. 소녀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합장을 한다. 아내는 배낭에서 한국에서 가져간 볼펜 하나를 꺼내서 소녀의 목에 걸어준다. 볼펜을 목에 건 소녀는 하늘을 본다. 웃음이 먼저 하늘로 올라간다. 계산이 없는 순진한 웃음이다. 그 웃음이 원의 중심처럼 느껴진다. 오늘의 기도가 잠시 그 웃음으로 모인다. 주는 일은 짧고, 받는 기쁨은 길다,
또다시 장애를 안은 소녀를 만난다. 걸음은 느리다. 그러나 눈은 곧다. 눈은 늘 앞을 본다. 순례는 목적지를 향한 경쟁이 아니다. 방향을 유지하는 연습이다. 방향이 맞으면, 속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속도를 늦추고 길을 내준다, 걷는 모습은 다르지만 마음은 같다.
법복을 입고 고요히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스님을 만난다. 붉은 법복은 햇살을 머금는다. 몸은 낮아지고, 그림자는 길어진다. 그림자가 길어질수록 마음은 가벼워진다. 수행은 고독하지만, 여기서는 외롭지 않다. 원안의 모든 몸이 스승이다.
하얀 초르텐이 먼저 시선에 들어오고 그 뒤로 궁이 선다. 초르텐은 축약된 우주이고, 궁은 쌓아 올린 시간이다. 둘 사이에서 사람들은 걷는다. 축약과 축적 사이를 오가며, 오늘의 분량만큼만 기도를 올린다.
포탈라궁 서쪽으로 길이 기울어지면, 세계는 갑자기 몸을 낮춘다. 초르텐을 지나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느려지고,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만큼의 폭으로 길은 좁아진다. 성채를 감싼 해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녹빛의 물이 고요히 숨 쉬고, 그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는 짧다. 그러나 이 다리에서 시간은 늘어난다.
다리의 양쪽 난간 아래, 스님과 수행자들이 나란히 앉아 있다. 붉은 장삼은 바닥의 그늘과 섞이고, 경전은 무릎 위에 얹혀 있다. 독경은 낮다. 바람보다 낮고, 발걸음보다 낮다.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지만, 뜻은 선명하다. 이곳에서 경전은 읽히는 말이 아니라 유지되는 자세다. 사람들은 말없이 지폐를 건넨다. 손에서 손으로 옮겨 가는 것은 돈이 아니다. 안부이고 연결이다..
누구도 서두르지 않고, 누구도 길을 자르지 않는다. 다리는 좁지만 밀리지 않는다. 앞선 이를 재촉하지도, 뒤를 막아서지도 않는다. 마치 보이지 않는 규칙—우주의 호흡—이 발걸음을 정렬하는 듯하다. 합장은 이 다리에서 자연이 된다. 깊이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좋다. 잠시 눈을 내리깔고 숨을 고르면 충분하다.
물 위에 뒤집힌 궁은 신기루 같다. 그러나 그 신기루가 오히려 진짜 같다. 마음도 그렇게 비친다. 붙잡으려 하면 흐려지고 내려놓으면 또렷해진다. 해자 가장자리에 선 사람들이 잠시 멈춘다. 멈춘 자리에서 해자에 비친 자신의 마음을 본다. 걷다가 멈추는 이 정지가 수행이다,
표정들은 밝다. 웃음을 짓지 않아도 얼굴에 환함이 남아 있다. 이 다리를 건너는 표정에는 두려움이 없다. 안도가 있다. 마치 극락으로 향하는 사람들처럼—아니, 이미 극락의 문턱에 발을 디딘 줄 아는 사람들처럼.
다리를 건너면 길은 다시 열린다. 마니주의 둔탁한 금속음이 이어지고, 발걸음은 원으로 돌아간다. 서쪽의 그늘은 사람을 시험하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 얼마나 조용해질 수 있는가. 조용해질수록, 길은 스스로를 넓힌다. 포탈라궁 해자 다리는 그렇게 가르친다. 낮은 소리가 질서를 만들고, 좁은 길이 평화를 낳는다는 것을. 한 걸음 한 걸음, 말없이—그러나 분명하게—우리는 건너간다.
북쪽의 그늘에서 바람이 돌벽을 타고 내려온다. 햇살이 얇아지고 사람들은 잠시숨을 고른다. 인생의 그늘을 닮은 견딤의 연습이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숨이 이어지는 만큼 걷는 길. 마니주의 소리가 다시 이어진다. 멈추지 않는 소리, 규칙적이지 않아도 계속되는 소리. 그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동쪽 코라로 걸어가면 빛이 돌아온다. 포탈라궁의 선이 또렷해진다. 마니주가 다시 힘을 얻고, 사람들의 얼굴이 밝아진다. 끝이 보이는 자리이지만, 여기는 도착이 아니라 재출발이다.
내 몸 안에 우주가 있다.
포탈라궁 안에도 우주가 있다.
포탈라궁 한 바퀴의 길이 1.5km 정도다, 이 길이는 짧다. 그러나 얕지 않다.
한 바퀴면 하루를, 두 바퀴면 한 생의 요지를 배운다.
포탈라궁 코라는 원형의 교과서다.
남쪽에서 낮추고,
서쪽에서 비우고,
북쪽에서 견디고,
동쪽에서 다시 밝아진다.
포탈라궁을 한 바퀴 도는 것은 우주를 한 바퀴 도는 것이다.
나는 포탈라궁을 돌면서 우주를 도는 법을 배웠다.
숫자로는 1.5킬로미터 남짓이지만, 마음으로는 한 세계를 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도 묻지 않는다.
얼마나 돌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라싸에 머무는 동안 하루하루 수많은 포탈라궁 순례자들의 물결 속에 우리는 몸을 맡겼다. 앞사람의 걸음에 속도를 맞추고, 뒤사람의 숨결에 마음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원을 그렸다. 말은 필요 없었다. 걷는 것이 문장이었고, 숨이 곧 기도였다.
아내는 한 손으로 내 팔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 마니차를 돌렸다. 마니차의 둔탁한 금속 소리가 아내의 심장 박동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규칙적이지 않아도, 멈추지 않는 소리. 살아 있으니 계속되는 소리.
해자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잠시 멈춰 섰다. 물 위에 비친 포탈라궁은 분명히 거기 있었지만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신기루 같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내 마음 같았다. 높고 단단한 외벽, 그 아래 고요히 고인 물, 그리고 그 속에 비친 뒤집힌 궁. 나는 문득 알았다. 저 물은 방어가 아니라 비움이라는 것을. 적을 막기 위한 물이 아니라 자기를 가라앉히는 물이라는 것을.
아내는 물을 오래 바라보았다. 아마도 자신의 몸을, 자신의 지난 시간을 그 물에 겹쳐 보았을 것이다. 병으로 무너진 날들, 다시 숨을 붙잡고 일어난 날들, 그리고 지금—이 고원의 햇살 아래 다시 원을 그리고 있는 자신을.
우리는 다시 걸었다.
코라는 늘 제자리로 돌아오지만 돌아올 때의 나는 언제나 조금 달라져 있었다. 한 바퀴는 두려움을 내려놓는 연습, 두 바퀴는 고통을 안고 걷는 연습, 세 바퀴째에 이르면 바람처럼 생각이 옅어졌다. 원 안에서는 모두가 같은 속도였다. 삶이 허락한 만큼의 속도. 아내가 낮게 말했다.
“여보, 여기서는 느린 것도, 아픈 것도 죄가 아니네.”
나는 웃었다. 웃음이 기도보다 먼저 나왔다. 아마도 그것이 이 순례가 우리에게 준 가장 큰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그날도 우리는 포탈라궁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해자에 비친 궁처럼, 우리의 마음도 한동안 물 위에 잠겨 있었다. 흔들리되 무너지지 않고, 비추이되 소유하지 않는 상태로.
코라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아내의 걸음은 여전히 느렸지만 눈빛은 가벼웠다. 나는 그 눈빛을 보며 속으로 합장했다. 오르지 않아도 만나는 길이 있고, 낮아질수록 가까워지는 궁이 있다는 것을 이 고원에서 우리는 함께 배웠다.
나무 포탈라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