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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Dec 29. 2018

10. 절망의 화가 뭉크와
북구의 로댕 비겔란

▶오슬로

절망의 화가 뭉크를 찾아서


아침 6시, 우리는 거의 파김치가 되어 버스에서 내렸다. 어스름한 여명의 시간에 도착한 오슬로는 시간이 정지된 듯 매우 한산하고 조용했다. 밤새 버스에서 시달린 우리는 너무 피곤하여 택시를 타고 유스호스텔로 가기로 했다. 택시 운전수는 매우 친절하게 응대하며 호스텔에 우리를 내려주었는데, 눈 깜박할 사이에 요금은 108 크로네(1만 7천 원 정도)가 나왔다. 비싸다 비싸! 앞으론 북유럽에서는 절대로 택시를 타지 말아야지. 

    

오슬로 반드레르히엠 하랄드쉐임( Vandrerhjem Haraldsheim) 호스텔은 푸른 잔디가 시원스럽게 깔려있는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호스텔 문을 열고 들어서니 50대로 보이는 호스텔 여종업원이 씽긋 웃으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런데 더블 룸을 1박에 500 크로네나 받았다. 그리고 시트 요금으로 100 크로네를 별도로 받았다. 하루 밤에 600 크로네(약 12만 원)는 배낭여행자에게는 만만치 않는 숙박비였다. 호스텔 요금이 이렇게 비싸니 호텔은 얼마나 비쌀까? 오슬로 카드 1일 이용권 두 장에 200 크로네까지 합치니 큰돈을 지불해야 했다. 오슬로 카드는 오슬로 시내의 모든 대중교통수단과 박물관 입장을 24시간 이용할 수 있는 가격이 포함되어 있다. 편리하기도 하고 따로따로 지불하는 것보다 값이 싸다.  

    

“시트 값이 100 크로네라니 너무 비싸네요. 시트는 서비스가 안 되는 모양이죠?”

“그러게 말이요. 허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니 별 수 없어요. 여긴 물가가 비싸기로 소문만 북유럽이 아니오.”    

 

북유럽의 물가는 듣던 대로 살인적이다. 비싼 물가에 혀를 끌끌 차는 아내를 달래며 2층으로 올라갔다. 짐을 푼 아내는 라면이 먹고 싶다며 배낭에서 애지중지 아끼며 비닐봉지로 싸 둔 컵 라면 알맹이 두 개를 꺼냈다. 부엌으로 가서 라면을 끓여 후르륵후르륵 라면 국물까지 다 마시고 나자 비싼 방값으로 쓰린 속이 누그러졌다. 행복한 라면 먹기를 끝낸 우리는 침대에 벌렁 누워 느긋하게 휴식을 취했다. 배를 채우면 마음도 느긋해진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나니 아내는 운이 솟아난 모양이다. 귀한 시간을 호스텔에서만 지낼 수 없다며 빨리 오슬로 시내로 나가자고 재촉을 했다. 


“하하하, 여보, 그런 힘이 솟아나지요?”

“잘 알면서 그래요. 여행만 나오면 나에게서 피곤이 달아나버린다는 거. 호호호.”

“좋아요. 그럼 슬슬 오슬로 사냥에 나서볼까요?”     


▲여행 중에는 피곤을 모르는 아내

그랬다! 아내는 여행만 떠나오면 없던 기운이 어디선가 막 솟아 나왔다. 우리는 호스텔에서 다운타운으로 가는 15번 트램을 타기 위해 푸른 잔디밭을 걸어 내려왔다. 잔디밭을 걷는 기분이 상쾌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15번 트램은 곧 도착했다. 오슬로 카드가 위력이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북유럽을 여행할 때는 오슬로 카드, 스톡홀름 카드, 헬싱키 카드가 사용하기에 매우 편리하다. 결과적으로 값도 저렴하게 들어간다. 버스, 지하철, 전철, 도시 내의 페리 호는 물론, 박물관까지 무료입장을 할 수 있는 데다가 각종 할인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오슬로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뭉크미술관이었다. 뭉크의 그림 '절규'를 보기 위해서였다. ‘뭉크(Munch)'는 승려를 뜻한다. 사랑의 고통을 일직 경험한 그는 평생을 승려처럼 독신으로 살았다. 뭉크의 할아버지는 성직자였다. 뭉크는 의사였던 아버지와 어지럼병을 일으키는 박테리아에 감염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뭉크는 태어날 때에 곧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서둘러 세례를 받게 할 정도 병약했다. 그래서인지 뭉크는 자신을 ‘요람’에서부터 미리 ‘죽음’을 안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하곤 했다. 


그의 나이 여섯 살 때 그의 어머니는 죽었다. 아버지는 광신자가 되어 버렸고, 누이마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뭉크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대한 극도의 공포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의사가 되기를 바라던 아버지의 뜻을 뿌리치고 뭉크는 화가의 길을 택했다. 유년시절 어두운 기억은 일생동안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유년시절의 어두운 기억을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투영시켰다. 


▲뭉크의 '절규'(오슬로 뭉크미술관)

아내가 10년이 넘도록 난치병과 싸워오는 동안 우리는 병원의 응급실과 중환자실, 그리고 수술 대기실에서 얼마나 많은 ‘절규’를 했던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절규를 들어왔던가! 죽어가는 환자의 손을 붙잡고, 혹은 수술실의 벽에 기대어 보호자들은 절규하며 눈물을 흘렸다. 뭉크는 인간의 원초적인 생각 속에 내재해 있는 생명력과 절망 후에 예견되는 ‘희망’을 표현하고자 했다.     


    “나는 두 명의 친구와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때 나는 한 줌의 우울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멈춰 섰고, 너무나 피곤해서 난간에 기대었다. 흑청색의 피오르드와 도시 너머에는 불로 된 피와 혀가 걸려있었다. 내 친구들은 계속 걸었으나 나는 불안에 떨며 멈춰 섰다. 그리고 자연을 통해 울리는 커다랗고 끝이 없는 비명소리를 들었다.” -에드바르트 뭉크-  

   

‘절규’를 그리고 난 후 뭉크의 소감이다. 뭉크의 ‘절규’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공포와 지옥을 연상케 했다. 촉기를 잃은 퀭한 눈동자, 뿌연 암모니아 속에 갇혀 있는 모습처럼 모호한 형체, 이글이글 타는 화탕 지옥에서 막 건져 올린 것 같은 흐물흐물한 윤곽, 북구의 하늘을 휘감아 도는 오로라의 환상처럼 너울거리는 캔버스의 배경들은 절망의 극치를 나타나고 있었다.    


뭉크 미술관을 돌아보고 있는 아내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뭉크는 절망의 화가다. 그래, 이곳을 빨리 벗어나자. 나는 아내의 손을 붙들고 뭉크 미술관을 나왔다. 국립미술관 앞에는 오슬로 대학이 궁전처럼 서 있었다. 오슬로 대학의 아울라에는 뭉크가 그린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태양’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은 절망적인 뭉크의 다른 그림들과는 매우 대조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림의 한가운데서부터 붉은 태양 기운이 양쪽 벽의 다른 그림들 속으로 띠처럼 길게 퍼져나가며 비추어주고 있었다. 뭉크 미술을 감상한 후 우리는 노르웨이의 또 다른 천재 예술가 비겔란의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는 프롱네르 공원으로 향했다.    

  

'북구의 로댕' 비겔란의 모놀리트 


우리는 국립극장 앞에서 비겔란 조각공원으로 가는 트램을 탔다. 프롱네르 공원 정문에서 내린 우리는 파란 잔디밭이 시원스럽게 펼쳐진 정원으로 들어갔다. 잔디밭 양 옆에는 이제 막 단풍이 들려고 하는 키 큰 나무들이 도열해 있었다.    

  

북반구의 짧은 해가 벌써 숨을 거두려고 하는 공원은 점차 석양 노을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한 줄기 바람이 마치 뭉크의 ‘절규’처럼 얼굴을 핥고 지나갔다. 구름이 점점 태양을 가리며 주위를 어둠 속으로 몰아갔다. 잔디밭은 서리가 내리는데도 한 여름의 초원처럼 푸르렀다. 그 푸른 잔디밭을 지나니 거울 같이 맑은 인공호수가 주변 풍경을 고요히 담고 있었다. 그 인공호수 위로 ‘비겔란의 다리’가 있고, 비겔란의 조각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다리 위에 세워진 조각들은 어른과 아이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어울리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비겔란 조각공원 분수대와 비겔란 다리 조각


다리를 지나니 광장 가운데 분수대가 나오고, 분수대의 중앙에는 여섯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벌거벗은 채 불끈거리는 근육을 자랑하며 원형으로 된 돌 접시를 떠 떠받치고 있었다. 분수대에는 미로 같은 모자이크 무늬가 거미줄처럼 새겨져 있었다. 분수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조각처럼 느껴졌다.    

  

분수대를 뒤로 하고 위쪽으로 올라가니 거대한 조각기 둥이 검은 하늘 위로 우뚝 나타났다. 비겔란의 영혼이 깃든 모놀리트다(Monolith)! 거대한 모놀리트 밑에 선 아내는 우선 그 돌기둥을 보고 놀라고,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아름다운 단풍 숲을 바라보며 다시 놀랐다. 이 모놀리트는 비겔란이 14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최대의 걸작 품이다. 무게 260톤, 높이 17.3m의 거대한 화강암 기둥에는 121명의 남녀노소가 서로 정상을 향해 기어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다소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보면 마치 수많은 애벌레들이 정상을 향해 아귀다툼을 하며 기어오르는 모습과도 흡사하다. 밀치고, 끌어올리는 모습, 절규하며 슬픈 표정을 짓고 얼굴, 화가 난 표정도 보인다. 비겔란은 이 화강암 기둥 하나에 인간의 욕망과 투쟁, 슬픔과 고독을 새겨 넣고자 했다. 돌기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인생살이의 고달픔을 한눈에 보는 느낌을 받는다.   

   

모놀리트 주위에는 사방 열두 줄로 조각된 군상들이 계단을 따라 둘러져 있었다. 슬픔, 고독, 사랑, 희망, 고통과 번뇌… 갖가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누드 조각들은 말을 걸면 대화를 할 것처럼 보이고, 만지면 체온이 느껴질 것만 같았다.      


▲비겔란의 '모놀리트'(오슬로 비겔란 조각공원)


“마치 돌 속에서 체온을 느낄 것만 같아요!”

“그러게 말이요. 한 예술가의 집념이 돌 속에 영혼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군요.”     


우리는 맨살처럼 느껴지는 조각상에 기대어 사진을 찍었다. 공원의 맨 끝자락에는 일곱 명의 사람들이 몸을 앞과 뒤로 연결하며 둥글게 원을 만들고 있다. 윤회의 굴레를 표현한 것일까? 인생의 끝없는 윤회! 비겔란은 입구의 난간에 탄생을 뜻하는 조각들에서부터 시작하여 험한 세파를 헤쳐 나가는 인간의 다양한 군상, 그리고 죽음 다음에 오는 윤회 사상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희로애락과 생로병사를 이 넓은 공원에 담아내고자 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비겔란 조각공원


“여보, 저기 아르헨티나 할머니들이 보여요!”

“어? 정말 둘리 자매네!”   

  

어둠 속에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두 여인은 분명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만났던 둘리 자매였다. 스타킹처럼 꽉 조여진 바지를 입은 멋쟁이 둘리 할머니와 머리가 하얀 동생 할머니가 우리를 보더니 반가운 듯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그들과 어떤 인연의 끈을 가졌을까? 이곳에서 다시 둘리 자매를 다시 만나다니… 지구 반대편인 북반구에서 이렇게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있으니 말이다. 흔들며 숲 속으로 사라져 가 는 둘리 자매! 둘리 자매도 조각의 군상들도 공원의 화려한 단풍나무들도 점점 어둠 속에 묻혀가고 있었다. 윤회의 굴레 속에서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 세상이 아닐까? 


호스텔로 돌아와 베르겐 몬타나 호스텔에서 만났던 브라질 부부 바니를 운명적으로 다시 만났다. 그는 오늘 하루 종일 드라이브를 하여 지금 낙 도착했다고 했다. 그는 나의 손을 붙잡고 "돈 포겟트 슈라스코!" 하며 씩 웃었다. 브라질에 가거든 잊지말고 꼭 슈라스코를 먹어보란다. 어디선가 만났던 여행자들은 또 다시 어디선가 종종 만나게 된다.



♣인간은 윤회의 굴레 속에서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나는 오슬로의 호스텔에서 덴마크에서 만났던 아르헨티나 둘리 자매와 베르겐에서 만났던 브라질의 바니부부를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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