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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Feb 12. 2019

25. 베를린을 곱빼기로
즐겨볼까?

베를린에서는 100번 버스를 타라!

▲베를린 100번 버스


끝내 도착하지 않은 여행가방

  

런던 히드로우 공항에서 갈아탄 브리티시 에어라인 비행기는 밤 11시에 베를린 쉐네펠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트랩에서 내려 입국절차를 끝내고 수화물 벨트에 서서 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짐은 모두 찾아갔는데 우리 배낭은 기어코 나오지 않았다. 줄무늬가 그려진 가방이 마지막으로 벨트를 한 바퀴 돌아갔다. 그것은 짐이 모두 다 나왔다는 신호였다. 짐을 기다리는 사람은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컨베이어 벨트도 돌아가는 것을 멈추었다. 우리들 배낭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나올 짐이 없습니다." 

“우리 배낭이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요?”

“저기 수하물 클레임 창구로 가 보시오.”

수하물 클레임 창구에는 40대의 여자가 홀로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 짐이 나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거지요?”

“어디서 온 몇 시 비행기지요? 티켓과 수하물 표를 좀 보여 주시겠어요?”

“여기요. 런던 히드로우 공항에서 온 브리티시 에어라인입니다.”


수화물표를 보며 컴퓨터를 한참 체크를 해 보더니 그녀는 매우 난처한 기색으로 우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저런! 짐이 아직 런던에 있어요. 갈아탈 때 미쳐 짐을 옮겨 싣지 못하였군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아마 내일 비행기로 올 것 같은데요. 숙소 주소를 적어주시면 수하물이 오는 즉시 배달을 하여 드리겠습니다.”

"아내의 약과 인슐린이 그 배낭 속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 약 중에서 인슐린이 급합니다. 좀 더 빠른 방법은 없나요?"

“늦은 밤이라 런던에서 오는 비행기가 더 이상 없어서 내일 오후에나 도착을 하겠는데요.”

"이건 명백히 항공사 측에서 잘 못한 일 아닌가요?"

"네, 허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분통이 터졌다. 심각한 문제는 아내의 약이 몽땅 큰 배낭에 들어 있었다. 특히 인슐린이 문제였다. 아내는 인슐린이 한 방울도 분비되지 않는 제1형 당뇨를 앓고 있어 하루에 네 번씩이나 인슐린 주사를 맞고 있다. 


허지만 별 뾰쪽한 수가 없었다. 수하물 창구에 클레임을 청구하고 우리는 오늘 밤 머물 ‘베꼽 민박집’을 찾아 나섰다. 베꼽 민박은 우연히 인터넷을 뒤지다가 발견한 한국인이 경영하는 민박집인데  ‘배꼽’이란 이름이 재미있어 보여 우리는 이 집으로 가기로 결정했었다. 러시아에서는 나타샤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었는데 베를린은 베꼽이라는 이름이 퍽 재미있어 보이고 베를린에 어울릴 것 같았다. 공항의 공중전화 박스에서 베꼽 민박집에 전화를 했더니 젊은 여자가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초(Zoo)역에서 전철 우반(U-Bahn)을 타고 오스트반호프역에서 내려서 약도를 보고 찾아오시면 됩니다.”


우리는 그녀가 일러준 대로 오스트반호프역에서 내려 민박집을 찾느라고 한참을 헤매야 했다. 늦은 밤이라 거리엔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가게도 모두 문을 닫았고, 공중전화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미 자정이 넘어서고 있었다. “이러다가 거리의 천사가 되는 거 아닐까?”그때 마침 어떤 젊은 남자가 어두운 골목에서 홀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나는 무조건 그를 붙들고 주소와 약도를 보여주며 길을 물었다. 얼굴이 하얗게 생긴 전형적인 게르만 혈통으로 보이는 청년은 내가 내민 약도와 주소를 들여다보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이 주의 집을 찾고 있는데요?”

“하하, 바로 이 앞에 있는 아파트예요.”

청년이 가리키는 아파트를 바라보며 아내와 나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좋은 밤 보내세요."

청년은 미소를 지으며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져 갔다. 베를린으로 오는 길은 이래저래 우리를 힘들게 했다. 모스크바에서부터 비행기 날개가 얼어 두 시간이나 늦게 이륙을 하더니 이젠 배낭까지 도착하지 않아 애를 먹이고 있으니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찾은 ‘베꼽 민박집’ 문을 두들기니 젊은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많이 늦었군요."

"배낭이 도착하지 않아서 클레임을 청구하느라 늦었어요."

"저런!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내일 오후에나 도착을 한다는군요."

"아마 내일 틀림없이 도착할 겁니다. 걱정 말고 우선 차나 한 잔 하시지요.” 

“밤 12시가 넘었는데 너무 늦게 도착하여 미안합니다.”

“여행이 다 그렇지요. 어쨌든 베를린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런데 저희 집은 어떻게 아셨지요?"

“인터넷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베꼽’이란 이름이 재미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베꼽이 무슨 뜻이지요?”

“베를린을 곱빼기로 즐기자는 의미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지었어요. 이름이 재미있지요? 호호.”

“아하, 그런 뜻을 가지고 있었군요. 난 또 사람 ‘배꼽’을 ‘베꼽’으로 잘 못 표기한 줄 알았지요. 허허.” 


늦은 밤이지만 친절하게 민박집주인이 피곤하게 얽힌 마음을 누그러지게 하여 주었다. 차를 한잔 마시며 한 숨을 돌리고 있는데, 아내는 울상이었다. 만약 짐이 늦게 도착을 하면 병원에 가서 인슐린 처방을 받아야 한다. 여행은 트러블의 연속이라고 하더니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트러블이 일어날까? 어쨌든 오늘은 푹 자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베를린에서는 100번 버스를 타라!  

 

다음날 아침이 되어도 인슐린이 보관된 큰 배낭은 도착하지 않았다. 베꼽 민박에서 첫날 아침을 맞이하는 베를린의 아침 날씨는 하얗게 입김이 서릴 정도로 차가웠다. 인슐린을 맞지 못한 아내는 빵 한 조각과 커피 한잔으로 아침을 때웠다.   


"여보, 며칠분의 인슐린을 휴대용 배낭에 보관하지 않았던가요?"

"그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인슐린 펜슬을 교환할 때가 되었는데 깜박 잊고 체크를 하지 못했어요."

“저런, 허지만 너무 걱정 말아요. 만약 짐이 많이 늦어지면 병원에 가서 처방을 받아 인슐린을 구하면 되니까.”

“설마 오늘 내로 오지 않겠어요. 좀 견디어 보지요.”


나는 아내를 달래며 안심을 시켰다. 아내는 먹는 것을 적게 먹고 대신 운동을 더 하겠다고 했다. 하루에 네 번이나 맞아야 하는 인슐린은 아내의 생명 줄이나 마찬가지다. 아내는 밥을 먹듯 평생 인슐린을 맞아야 한다. 허지만, 인슐린이라도 맞아가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을 아내는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아내여, 힘을 내다오!      


베를린의 가을 하늘은 푸르고 청명했다. 우중충하고 칙칙한 러시아에 머물다가 오랜만에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니 마음이 상쾌해졌다. 허지만 아내의 인슐린과 약이 들어 있는 배낭이 도착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곧 우울해졌다. 모스크바에서는 큰 배낭을 맡기는 수하물 보관소를 찾느라 시간을 많이 허비해서 우울했는데, 베를린에서는 짐이 도착하지 않아 마음이 조급해지고 우울해졌다. 그렇다고 모스크바 여행도 망했는데, 베를린 여행까지 망쳐서는 안 될 일.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 짐을 기다리며 민박집에만 틀어 박혀 있으면 더 우울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바람도 쏘일 겸 버스를 타고 베를린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다.    

  

“베를린에서는 100번과 200번 버스를 타면 만사 오케이랍니다. 1일 권 티켓을 사서 타고 내리며 베를린의 명소를 자유롭게 구경을 하시면 됩니다. 버스를 타고 베를린을 곱빼기로 즐겨보시지요. 짐이 오면 제가 잘 챙겨 놓을 게요.”

“그래야 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베를린 100번 버스 노선도


베꼽 민박집 아주머니의 말대로 우리는 숙소를 나와 U-Bahn을 타고 초역으로 향했다. 초역에는 100번과 200번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2층 버스를 타고 베를린 시내를 관람하기에 더없이 좋은 대중교통이다. 베를린은 주요 볼거리는 초역과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거리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는 초역에서 내려 일단 100번 버스를 타기로 했다. 100번 버스는 베를린의 명소를 지나가는 관광객에게 매우 인기 있는 버스다. 


카이저 빌헬름 교회


100번 버스의 2층에 앉아 있으니 베를린 시가지가 한눈에 보였다. 카이저 빌헬름 교회가 부서진 채 가을 하늘 밑에 우뚝 서 있었다.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의 집중포화로 무참히 파괴된 모습은 전쟁의 참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버스는 금빛 천사가 찬란하게 광채를 빛내고 있는 전승기념탑을 지나갔다. 이 탑은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기억케 하는 한 장면이다. 인류 역사상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지닌 의의는 크다. 한때 첨예하게 대립된 이념 속에 사람들은 불안에 떨며 육지의 섬 속에 갇혀 서로 상처를 받아야 했다.


전승기념탑


우리는 잠시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내렸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서 있는 나는 그날의 함성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1989년 11월 9일, 장벽이 무너지던 날, 텔레비전엔 동과 서를 가로막던 브란덴부르크 문에 사람들이 미어터질 듯 이어지며 통일의 기쁨을 절규하고 있었다. 


철의 장벽 대신 인간의 장벽이 들어 선 듯한 그때의 장면이 생생히 떠오르고 있었다. 베를린을 동서로 가르는 기준점이 되었던 브란덴부르크 문엔 장벽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아무리 튼튼한 장벽도 사람의 마음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을 중심으로 아직도 마음의 벽이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서독 쪽은 윤기가 흐르는데 동독 쪽은 아직도 황량하고 여기저기 건설의 잔해가 널브러져 있다. 경제적인 차이, 문화의 차이, 삶의 질의 차이가 아직도 동과 서를 가르고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문


아테네 신전의 문을 모델로 만들었다는 프러시아 시대의 개선문이었던 브란덴부르크 문 위엔 승리의 4두 마차가 앞으로 진군을 하고 있건만 골이 깊어진 인간의 마음과 경제적인 부의 차이, 문화, 습관… 이런 것들이 아직은 세월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독일인들은 우리에 비하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구 상에 단 하나 남아있는 남과 북의 장벽! 그리고 같은 민족끼리, 아니 생이별을 한 친족끼리도 서로 만나지 못하고 슬픈 세월을 보내야 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생각하면 괜히 마음이 더욱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 같다.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가까운 운터 덴 린덴(Under den Linden:보리수나무 아래라는 뜻)의 정원엔 때마침 평화를 기원하는 곰돌이들의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출품한 곰돌이 인형이 국가의 특색을 새기어 가을 하늘을 향해 지구촌의 평화를 기원하는 행사라고 한다. 



“여기서 숨바꼭질을 한 번 해볼까?”

“그거 좋지요.”

“당신, 꼭 어린아이 같아요.”

“그런 당신은요?”

“3·8선을 이렇게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늘을 향해 평화를 부르짖는 곰돌이 사이를 아내와 나는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 철없이 끼어 다녔다. 이렇게 곰돌이 사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듯 철책선이 없는 통일된 대한민국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100번 버스 2층에 올라 베를린 시내를 한 바퀴 스케치한 우리는 프러시아 제국 당시 최고의 번화가였던 박물관의 섬에서 내렸다. 이곳에는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운집해 있다. 박물관의 섬은 16세기 슈프레 섬에 궁전을 위한 정원인 루스크가르텐(Lustgarten, 기쁨의 정원)이 들어서면서부터 개발되었다. 슈프레 강 가운데 작은 섬에는 구 박물관(Altes Museum)을 비롯하여 국립박물관, 보데 미술관, 페르가몬 박물관이 모두 모여 있어 ‘박물관 섬’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굳이 박물관 내부를 둘러보지 않더라도 섬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곳이다.    


슈프레 섬에 운집된 박물관의 섬

  

이 중에서 페르가몬 유적을 전시한 페르가몬 박물관(Pergamon Museum)은 꼭 빠뜨리지 말고 들려볼 만하다. 메소포타미아 유물과 더불어 독일이 소아시아의 유물을 발굴하여 세운 페르가몬 박물관은 바빌론의 이슈타르 문, 아테네 신전, 페르가몬 제단 등 고대 건축물은 헬레니즘 문화의 정수를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나는 터키를 여행하며 기원전 150년 전에 번성했던 페르가몬 제국을 돌아본 바가 있다. 당시 페르가몬 제국은 터키지역을 관할할 정도로 번성했던 제국이다.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나와 우리는 구 박물관 광장에서 시원하게 내뿜는 분수를 바라보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푸른 하늘로 하얀 포말을 그리며 솟아오르는 분수대 옆에서 싸간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고 우린 훔볼트 대학으로 갔다. 




훔볼트 대학은 마르크스, 헤겔, 아인슈타인 등을 배출한 2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대학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과 마르크스는 기억해도 훔볼트 대학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마침 대학 정문에서는 책을 바겐세일을 하고 있었다. 풋풋한 젊음이 느껴지는 대학의 캠퍼스는 언제나 싱그럽다. 


오늘 하루 우리는 민박집주인이 일러준 대로 1 데이 티켓으로 100번 버스를 타고 베를린을 곱빼기로 즐겼다. 저녁이 되어 베꼽 민박에 돌아오니 마침 짐이 와 있었다. 아내는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듯 돌아온 배낭을 보고 너무나 반가워했다. 돌아온 배낭에 인슐린과 약, 주사기를 확인하며 아내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돌아온 배낭이 그렇게 좋아요?”

“그렇고 말고요. 만약 하루라도 더 늦게 도착했다고 생각해봐요. 얼마나 끔찍해요. 이젠 안심하고 여행을 할 수 계속할 수 있잖아요.”


아내는 주시기와 약을 챙겨 넣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시한부 인생을 살아왔던 아내는 순간순간을 행복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여보, 배낭여행이 힘들지 않소?”

“무슨 소리예요. 나에게는 이 배낭여행도 늘 과분하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숨을 쉴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여행을 다닐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어요.”

“당신 정말 행복하오?”

“참, 새삼스럽게. 네, 저는 행복합니다.”


사실 건강한 사람도 배낭여행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내는 아무리 힘든 배낭여행이라 할지라도 가장 좋아하는 여행을 다닐 수 있는 것 자체를 즐기고 행복하게 생각한다. 비록 물질적으로 풍부하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아내와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나는 더불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난감처럼 귀여운 작은 자동차


독일인들은 작은 것에 만족을 하는 것 같다. 거리의 차들이 작난감처럼 귀여운 차들이 많다. 독일의 작은 차들을 보니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란 책이 생각났다. 슈마허는 경제 성장이 물질적인 풍요를 약속한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환경 파괴와 인간성 파괴라는 결과를 낳는다면, 성장지상주의는 맹목적인 수용의 대상이 아니라 성찰과 반성의 대상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러한 경제 구조를 진정으로 인간을 위하는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방안으로 '작은 것'을 강조한다.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 규모를 유지할 때 비로소 쾌적한 자연환경과 인간의 행복이 공존하는 경제 구조가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돈이나, 권력, 명예에 매여 살다 보면 그것은 늘 부족한 삶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항상 조금 더, 조금만 더 필요하다고 생각을 가게 되면 항상 그것에 매여 살게 된다. 늘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순간순간 행복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불안하고 불행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돌아온 배낭 하나가 아내와 나를 너무나 행복하게 해 주었다. 인슐린을 제대로 맞지 못했지만 오늘 하루 아무 일 없이 베를린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배낭까지 돌아왔으니 그 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다. 우리는 돌아온 배낭에 감사드리며 베꼽 민박의 좁은 방에서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조금 더, 조금만 더 필요하다고 생각을 가게 되면 항상 그것에 매여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오늘 돌아온 배낭이 우리를 더없이 행복하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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