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찰라 Feb 13. 2019

26. 베를린 장벽과 체크 포인트 찰리를 가다

무너진 베를린 장벽과 '남과 북을 가로막고 있는 철책선을 생각하며

베를린에서 꼭 놓치지 말고 가보아야 할 곳은 베를린 장벽이다. 아침 일찍 숙소를 출발하여 100번 버스를 타고 베를린 장벽의 잔해가 남아 있는 이스트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로 갔다.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는 슈프레 강이 보이는 베를린 장벽 일부인 1.3km에 조성된 야외 장벽 미술 갤러리다. 이곳에는 1990년 세계 각국에서 모인 미술작가들이 베를린 장벽에 그린 105점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세계에서 가장 길고 오래된 야외 공개 갤러리인 셈이다.    

  

슈프레 강에는 짙은 안개가 서려 있었다. 우리는 슈프레 강을 따라 안갯속을 뚫고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로 걸어갔다. 슈프레 강의 안개는 마치 우리나라 최전방에 위치한 임진강에 서려 있는 짙은 안개를 연상케 했다. 임진강변에 살고 있는 나는 초겨울이 오면 임진강변에 짙게 깔린 안개를 바라보며 아침을 맞이하곤 한다. 북한 땅에서 발원한 임진강은 우리나라의 가장 중심부를 흘러 한강으로 합류되어 서해바다로 흘러간다. 


베를린 중심부를 흐르는 슈프레 강에 짙은 안개가 서려 있다.


슈프레 강은 역시 베를린 중심부를 가르며 흐르고 있다. 임진강에 남과 북을 가르는 철책선이 가로막고 있다면, 베를린에는 슈프레 강에 동과 서를 가르는 철의 장막인 베를린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남과 북을 가르는 155마일에 이르는 휴전선은 철책선으로 가로막혀 한국전쟁 이후 70여 년간 남과 북을 가르고 있다. 베를린 장벽은 1961년 동독이 쌓기 시작하여 베를린을 동서로 43km, 서베를린 외곽을 에워싸는 156km 이르는 장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베를린 장벽과 우리나라의 휴전선 철책은 냉전 시대 상징물처럼 여겨져 왔다.


허지만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 9일, 기습적으로 붕괴되었다. 반세기 동안 동서로 갈라졌던 베를린은 철의 장막과 냉전으로 상처 받은 도시임에 틀림없다. 제2차 세계대전 패망 국이 된 독일은 연합국의 관리에 들어갔다. 전후 서독은 미국의 막대한 자본 투입과 아데나워 수상의 지도하에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룬 반면, 소련의 지배를 받은 동독은 지원은커녕 오히려 천억 달러의 전쟁보상금을 지불하고 맨손으로 국가를 재건해야 했다. 


당시 독일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나라였다. 살기가 어려워진 동독의 근로자들은 빈곤과 자유를 찾아 서독으로의 탈출이 잦아졌다. 동독은 이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1961년부터 그 유명한 냉전의 벽인 베를린 장벽을 쌓아 국경을 봉쇄하기에 이르렀다. 상황은 다소 다르지만 6·25 한국전쟁 이후 38선을 기점으로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라와 같은 현상이다.


1985년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은 이후, 동독 공산당원들은 소련의 지지를 점차 잃어가게 되었고, 급기야는 1989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베를린 장벽은 일거에 무너지고 말았다. 28년 동안 동서로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은 단 하루 만에 싱겁게 무너져 내렸다. 여기에는 극적인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1989년 11월 9일 저녁 7시, 동독 공산당 정치국원이자 선전 담당 비서인 '귄터 샤보브스키'의 긴급 기자회견을 방송을 통해 듣고 있던 동독 국민들은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동독 국민들은 모든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이 소식을 들은 동서독의 사람들은 귀를 의심했다. 이게 정말인가. '모든 국경을 넘어'라면 서독으로의 여행도 포함된다는 말이 아닌가? 더구나 '지금 이 순간부터'라니…. 


시민들은 '체크 포인트 찰리'를 비롯해서 베를린으로 통하는 검문소로 밀물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장벽을 열어라!" 시민들은 외쳤다. 초소 경비병들은 우왕좌왕했다. 상부로부터 아무 지시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을 열 것인가, 발포할 것인가. 흥분과 긴장이 팽팽히 교차했다.


같은 시각, 서독도 흥분의 도가니였다. 본의 연방하원에서는 여야 의원들이 회의 도중 동독의 국경 개방 소식이 전해지자 회의를 중단하고 독일 국가를 합창했다. 서 베를린 시민들도 장벽으로 달려갔다. 베를린 장벽 검문소에서 경비병들과 대치하고 있던 동베를린 시민들은 힘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1989년 11월 9일 수천 명의 동서독 주민들이 베를린 장벽을 넘어가고 있다.(사진 :AFB뉴스)                               


자칫 유혈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경비대는 여전히 상부로부터 명백한 대응 조치를 지시받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이날 샤보브스키가 국경 개방의 시점을 '지금 당장(immediately)'이라고 발표한 것은 '실수'였다고 한다. 공산당 정치국은 이때까지 국경 개방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세를 되돌리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장벽을 돌파하려는 시민들에게 발포한다면 그것은 곧 엄청난 살상을 가져오는 파국임이 너무나 명백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밤 10시쯤 마침내 동베를린 시민들은 검문소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서쪽에서는 샴페인 폭죽이 이들을 맞았다. 이날 밤 처음에는 수백 명이, 이어서 수천 명이, 그 후 며칠 후에는 수백만 명이 서독으로 넘어갔고, 곧이어 베를린 장벽은 도미노 현상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환호와 눈물, 격렬한 포옹…. '베를린 장벽 붕괴'의 세기적 뉴스가 전 세계로 타전됐다. 그리고 베를린 장벽은 지구 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역사는 그렇게 예기치 않게 흘러간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연이란 없다. 동독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미 자유와 빈곤으로부터 탈출하여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는 마음이 그만큼 강열했다는 증거다.


부서진 장벽에는 자유를 찾아 절규하며 목숨을 걸고 장벽을 넘어가는 그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대부분 자유를 갈망하는 간절한 내용을 담은 그림들이었다. 자유란 무엇인가? 장벽에 그려진 그림들을 바라보며 새삼 자유라는 단어를 입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베를린 장벽의 낙서

베를린 장벽의 잔해는 약 1.3km 정도가 변화된 시간을 기록하고, 더 나은 희망, 전 세계 모근 사람들을 위한 더 자유로운 미래를 표현한 그림들로 가득 채워진 채 기념비적으로 남아있다. 우린 아무도 없는 장벽을 따라 한 동안 말없이 걸어갔다. 저마다 가슴 저미는 사연들로 장벽에 빼곡히 들어찬 그림들은 가슴 뭉클한 무엇인가를 느끼게 했다. 


“저 벽에 낙서들 좀 봐요? 사연이 구구절절하군요.”

“낙서도 저마다 다른 사연을 다 담고 있는 것 같아요.”

“저기, 우리나라의 통일을 담은 낙서도 있어요!”


독일에 무너진 베를린 장벽이 있지만, 우리나라엔 아직도 넘어갈 수 없는, 지구 상에 단 하나뿐인 휴전선 철책이 있다. 거의 동시대에 건설된 세기의 장벽. 그러나 베를린 장벽은 무너져 사라지고 없지만 남북을 가르는 철책은 그대로 남아있다. 생각해보면 동족상잔의 기가 막힌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베를린 장벽에는 벌써 이곳을 거쳐 간 한국인 여행자들의 낙서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공식적으로 베를린 장벽에 낙서는 금지되어 있다. 허지만 통일의 염원을 담은 우리나라 여행객들의 낙서를 베를린 장벽에서 보고 있자니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남과 북은 하나"

"지구 상에 하나뿐인 휴전선을 허물자"

"‘통일이여, 어서 오라!"


베를린 장벽의 낙서를 바라보며


저마다 통일을 기원하는 내용을 구구 절절히 담고 있었다.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분단국가. 우리나라도 평화 통일이 하루빨리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통일이 하루빨리 이루어져 목포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을 거쳐 모스크바까지, 그리고 신의주를 거쳐 실크로드, 유라시아까지 여행을 자유롭게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낙서를 하를 하는 것은 분명히 잘 못이지만 장벽에 간절한 소원을 담아  쓴 글씨를 보니 왠지 가슴이 저미고 뭉클했다. 


이 거대한 야외 미술관은 문화재로 등록이 되어 있어서 보호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갈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낙서를 해서 그림보다는 어지러운 낙서가 더 구경거리가 되어가고 있다. 독일 당국은 냉전의 벽을 허물고 자유를 상징하는 베를린 장벽에 낙서를 하지 못하도록 금지를 시킬 수도 없는 형편이라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형편이지만 거의 방치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 155마일 휴전선도 하루빨리 무너져 그곳 철의 장막에 자유를 갈구하는 전 세계인들이 낙서를 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를린 장벽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낙서로 점철된 베를린 장벽을 지나 동서독 국경의 검문소 역할을 했던 ‘체크 포인트 찰리’로 갔다. 체크포인트 찰리에 서있는 기분이 묘했다. 체크포인트 찰리와 판문점. 한쪽은 냉전의 벽이 무너졌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냉전의 기류가 흐르고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체크 포인트 찰리 검문소는 신기하게도 비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동쪽 방면은 벽과, 망루 등 가로막혀 있었지만. 서쪽 방면 연합군은  동쪽을 가로막는 그 어떤 건물도 설립하지 않았다. 연합군은 내부 베를린 지구 경계선을 나라 간의 국경이라고 인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체크 포인트 찰리는 종종 스파이 영화에 등장을 하기도 한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뒤 베를린 서쪽과 동쪽을 왕래하는 외국인들은 체크포인트 찰리를 지나야 만 했다. 이 검문소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동베를린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검문소를 몰래 통과해 동베를린을 빠져나왔고, 때로는 동독 국경수비대에 들켜서 붙잡히거나 총에 맞아 숨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동서독 왕래를 할 수 있는 검문소 체크포인트 찰리에 서 있는 느낌은 묘했다.


체크포인트 찰리 검문소 근처에는 “체크 포인트 찰리 박물관”이 냉전시대의 상황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베를린 장벽이 낳은 갖가지 비극과 동독 국경수비대의 만행을 자료로 모아 전시한 곳이다. 동베를린 사람들의 탈출을 돕겠다는 사람들이 이 박물관에 모여 계획을 짜기도 했으며,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쁨을 나누며 서독에서 새롭게 살아갈 방법을 찾기도 했던 곳이다. 


체크 포인트 찰리 박물관은 라이너 힐데브란트라는 한 개인에 의해 설립되었다. 2004년 그가 90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 후, 지금은 그의 미망인 알렉산드리아 힐데브란트가 관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힐데브란트는 2차 대전 중에 나치에 저항하다 붙잡혀서 수용소에 일 년 반 동안 갇혀 있었다고 한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나치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겠다는 마음을 더 굳게 먹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그는 동독 독재정권과 싸우기 위해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한 끝에 이 박물관을 세울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동독정권의 만행이 저질러지는 곳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체크포인트 찰리 근처에 방 두 칸을 빌려서 박물관 일을 시작하였다. 한 인간이 냉전시대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용감하고도 귀중한 자료들이 생생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몇 시간 동안 베를린 장벽과 체크포인트 찰리를 배회하다 보니 마음이 너무나 삭막하고 건조해졌다. 우리는 지하철 S반을 타고 소니 센터에서 내렸다. 소니 센터에는  초현대식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일본 소니사의 투자로 건설된 소니 센터 일곱 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광장을 덮고 있는 돔은 일본의 후지산을 연상케 한다. 


“우와! 이건 세상에서 가장 큰 장미가 아닐까요?

“그 장미 앞에서 잠시 포즈를 취해주실까요?”



거리에는 대형 장미꽃 모형을 한 구조물이 도로 중간중간에 세워져 있었다. 거리의 장미는 높이 솟아있는 현대식 건물의 건조함을 부드럽게 해주고 있었다. 광장에는 복합빌딩, 고급 쇼핑몰, 영화관, 카지노, 아파트와 사무실 등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특히 유리로 만든 소니 유럽본부는 쳐다보기가 어지러울 정도로 으리으리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박물관의 섬으로 다시 갔다. 전망대에 올라가 베를린 시내를 내려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광장에는 넵튠 분수가 파란 가을 하늘 위로 시원하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분수 주변에는 아름다운 조각상들이 분수와 어울려 멋진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높이 365m의 TV전망대에 올라가니 베를린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통일 후 새로 태어나는 베를린의 거리는 마치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아무리 철옹성 같은 철의 장벽도 언젠가는 무너진다. 베를린 장벽이 그 좋은 사례다. 


TV전망대에서 바라본 베를린 시가지


우리나라의 휴전선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휴전선은 내가 태어난 시기에 생겨났다. 나와 거의 비슷한 나이를 가진 휴전선은 아주 긴 세월 같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 긴 세월은 아니다. 반세기란 세월을 살아오면서 내 모습은 많이 변했다. 흰머리도 나고 얼굴에 주름살도 생기고, 생각도 변했다. 앞으로 아내와 내가 반세기를 더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내일 죽을 수도 있고 반세기 이후에 죽을 수도 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늘 지금처럼 영원히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따지고 보면 휴전선도 마찬가지다. 내일 무너질 수도 있고 반세기 이후에 무너질 수도 있다. 사람의 생각이 바뀌면 사람에 의해 가로막힌 휴전선도 바뀌어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동독 공산당 정치국원의 잘못된 단 한 줄의 발표 때문에 순식간에 무너지듯이 우리의 휴전선도 남한과 북한의 동포들이 절실하게 갈구하는 어느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북한의 국민들은 모든 휴전선을 넘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런 발표문이 우리나라에도 곧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해보며 전망대를 내려왔다. TV 탑에서 내려와 잠시  알렉산더 광장을 거닐었다. 알렉산더 광장은 동베를린 최대의 번화가다. 알렉산더 광장은 수많은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다. 어깨에 메고 다니는 핫도그 장사의 우산이 화려하게 광장을 수놓고 있었다. 그 우산 맡으로 소란스러운 서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허름한 옷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거리의 핫도그 장사로부터 핫도그 하나를 사들고 입에 넣더니 금방 다 먹어 치웠다. 


거리의 핫도그 장사로부터 핫도그를 사 먹는 노동자


나는 가난한 노동자로 보이는 사내의 모습에서 알프레드 되블린 이 쓴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주인공 프란츠 비버코프를 떠올렸다. 애인을 살해한 혐의로 수감되었다가 4 년 만에 베를린으로 돌아온 프란츠 비버코프는 단순 무식하고 다혈질인 날품팔이 노동자다.  비버코프는 석방된 삶을 처음에는 형벌로 받아들인다. 그는 바르게 살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시대적인 배경은 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행상을 하면서 겨우 베를린에 정착을 하지만 동료의 배신을 겪고, 알렉산더 광장의 술집을 전전하며 타락한 인간이 된다. 그는 결국 범죄자들의 세계에 말려들고 절도행각에 가담하여 한쪽 팔을 앓고 불구자 신세가 되고 만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경제대공황 시대를 배경으로 한 되블린의 대표작 알렉산더 광장은 거대하고 위험하며 유혹적인 바벨탑 같은 공간으로 등장한 대도시에서 겪는 다양하고 혼란스러운 인간의 초라한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다. 타락한 대도시에 매몰된 인간은 무력하기 그지없지만, 되블린은 무지하고 독단적인 자신을 반성하고 진실을 가려내는 인간을 그려내고자 했다. 


화려하게만 보이는 알렉산더 광장


지금의 알렉산더 광장은 소설 속의 음습한 모습이 아니다. 거리는 점점 화려해지고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허지만 나는 거리의 핫도그 장사로부터 핫도그 하나를 사들고 금방 씹어 삼키며 주린 배를 채우던 노숙자 차림의 사내를 잊을 수가 없다. 아직도 알렉산더 광장에는 되블린이 그려낸 소설 속의 주인공 비버코프 같은 수많은 노동자들이 방황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늘 밤은 베를린을 떠나는 날이다. 아내와 나는 알렉산더 광장에 더 머물고 싶었지만 지하철을 타고 숙소인 베꼽 민박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베를린을 곱빼기로 즐기고 갑니다.”

“다행이군요. 앞으로도 건강하시고 행복한 여행길 되길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베꼽 민박집을 잊지 않을 게요.”


우리는 친절한 베꼽 민박집의 젊은 아주머니와 이별을 하고 드레스덴을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오스탄호프 역(Osthahnhof)으로 향했다.            


★동서를 가로막고 있었던 베를린 장벽이 일순간에 무너지듯, 남과 북을 가로막고 있는 우리나라의 휴전선도 언젠가는 순식간에 무너질 것으로 기대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25. 베를린을 곱빼기로 즐겨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