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그래도 또 한 걸음
“엇, 여보. 당신 맞아? 집에 안 들어오고 뭐 해?”
“어? 아 나 이거……”
안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솔솔 풍기는 이 냄새.
대명씨 손에 들려 있는 건 분명히 치킨이었다.
아이들 재우고 재활용 쓰레기 분리배출을 하려고 밖에 나와 있던 인아씨가 치킨 두 봉지를 들고 어슬렁 거리고 있는 대명씨를 발견한 것이었다.
“웬일로 이 늦은 밤에 치킨을 사 와?”
왠지 모르게 당황하고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의 대명씨.
“아, 이거 나 옆 동에 좀 가져다주고 금방 올게! 잠시만 있어!”
“뭐 옆 동에는 왜?”
인아씨를 뒤로하고 헐레벌떡 옆 동에 다녀온 대명씨는 배민라이더 배달을 한 거라고 설명했다. 야근하고 퇴근길에 근처 치킨집에서 우리 아파트로 콜이 온 걸 보고 가는 길이라서 그냥 배달해 줬다고. 그러면 늦은 밤에는 건당 4천 원을 받는다고 했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궂은날에는 더 많이 받는단다.
“아니 근데, 잠시만!
아니 아니, 그러니까 왜 그런 걸 하고 있어?”
열심히 회사에서 일하고 학교에서 만족하며 공부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당황하기는 인아씨도 마찬가지였다.
“실은 나 병원 다니고 있어.”
“병원? 무슨 병원?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전에 쓰러졌던 것 때문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일 년이 훨씬 지났어도 종종 생각났다.
날려버린 돈에, 뒷수습을 위해 팔아버린 부동산들이 아까워서, 한 순간에 바뀌어 버린 생활이, 이런 자신의 처지가 억울해서, 또 가족들 보기에 미안해서 대명씨는 아직도 한 번씩 먹먹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입술이 바짝 말랐고, 입맛이 없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갑갑해서 아무리 심호흡을 해봐도 숨이 잘 안 쉬어졌다. 이게 우울증인가, 공황장애인가 싶었다.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받았다. 죽고 싶었지만 죽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었다. 다시 잘 살고 싶었다.
“나 이거 살기 위해서 시작했어. 이렇게라도, 뭐라도 하지 않으면 나 너무 숨이 막혔거든. 편안한 순간이 오면 죄책감이 들어. 몸이 힘들어야 나 때문에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된 거에 대해서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스스로 겨우 위로할 수 있더라고. 그냥 뭐라도 해야 되더라고.”
스마트 스토어가 잘 안돼도, 리셀 제품을 구매하러 갔다가 쫓겨나도 인아씨는 괜찮았다. 대명씨와 둘이서 이만 하면 잘 극복해 나가고 있고, 가족 모두 건강하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직 젊다. 이것도 다 경험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으니까.
당연히 가끔은 속상할 때도 있고, 불안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잘하고 있다고 자꾸만 되뇌었다. 애써 괜찮다 생각했고, 지나간 나쁜 일은 굳이 떠올리지 않았다. 잊으려고 노력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이제는 덤덤하게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대명씨가 그렇게 힘든 줄은...... 몰랐다.
원래 마음이 여린 사람이니까 당연히 아팠을 거라고, 하지만 또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니까 잘 이겨냈을 거라고 짐작만 했을 뿐. 이야기 꺼내는 것이 힘들어서 그동안 자기한테 말도 못 하고 혼자 아팠을 대명씨가 너무 안쓰러웠다. 그 상처가 인아씨는 상상하지 못할 만큼 깊어서 혼자서 병원을 다니고 상담받았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왜 미처 몰랐을까.
“왜 혼자서 아팠어?! 나한테는 이야기해도 되는데!”
“내가 잘못한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당신한테 말 꺼내는 것도 너무 미안했어. 나로 인해 생긴 이 모든 일에 불평 한 번 한 적 없는 당신이니까. 그게 더 속상했어.”
“혼자보다 원래 둘이 더 나은 법이라고 했어. 이제는 혼자 끙끙대지 말고 같이 하자. 뭐든지 같이 하면 힘들어도 잘 헤쳐나갈 수 있잖아!”
인아씨가 울음을 참으며, 애써 밝은 톤으로 말했다.
대명씨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벤치에 앉아 한참을 울었다.
“우리말이야…”
“응? 왜?”
“다 큰 어른 둘이서 야밤에 밖에서 질질 짜고 있네. 누가 보면 웃겠어.”
한참을 울고 난 대명씨가 조금은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풋! 그러게! 이렇게 당신이랑 눈물 질질 짜고, 엉엉 울고 나니까 기분 엄청 좋다!”
티 내지 못하고 속으로 삭인 감정들이 씻겨져 내려간 기분에 인아씨 역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제 들어가자. 얘들 혹시라도 깨면, 어머님 아버님도 깨시니까.”
“응! 오늘은 오랜만에 푹 잘 자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아. 고마워.”
남대문 시장에 가는 날이다.
아이들과 함께 분주한 아침을 후다닥 마무리한 인아씨는 커다란 에코백을 메고 집을 나섰다. 물건 판매보다 더 재미있게 하고 있는 일, 바로 쇼핑과 서울 구경이었다.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는 직접 물건도 보고, 유행도 확인하려고 남대문, 동대문, 고속버스 터미널에 가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신사, 성수, 홍대, 한남동 같은 힙한 곳에도 가서 어떤 브랜드가 인기 있나, 사람들은 어디에 많이 몰리나 알아봐야지 공부하는 마음이었으나 일을 핑계로 가는 쇼핑인지 여행인지가 너무 즐거운 인아씨였다.
판매하고 싶은 물건의 샘플도 몇 가지 구매해서 돌아오는데, 일을 한다는 핑계 덕분에 마음 편히 돈을 지출할 수 있는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녀오는 날이면 가장 먼저 블로그에 스토어에서 판매할 물건을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물건 소싱하러 갔던 장소에 대한 정보, 품목별 쇼핑 꿀팁, 그리고 근처 맛집에 대한 간단한 리뷰까지 같이 정리해서 남기면 하루 제대로 출장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보고할 상사는 따로 없었지만 그렇게 루트잡화점 블로그에 차곡차곡 일에 대한 기록을 쌓아가고 있었다.
-블로그 보고 물건 사러 왔어요! 이렇게 직접 다니면서 비교하고, 국내 생산 제품 위주로 판매해 주시니 믿고 살 수 있어요! 그리고 덕분에 남대문 구경한 기분이에요! 저도 야채호떡 먹어보고 싶네요.
- 주차꿀팁 짱! 진짜 감사해요. 일본에서 친구들 놀러 오는데 이번 글 보고 도움 많이 받았어요. 사장님 동선 따라 쇼핑시켜줬더니 저보고 가이드해도 되겠다고 칭찬 들었어요. 감사인사대신으로 운영하시는 루트잡화점에서 물건 샀는데 질도 좋고 진짜 괜찮네요! 감사합니다!
스토어의 메인 노출은 여전히 어려웠는데 인아씨가 남기는 블로그 글을 타고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댓글과 좋아요 수가 많아지고, 물건 판매로도 이어지니 점점 더 정성 들여 글을 쓰게 되었다.
‘블로그 글 쓰기 재미있네. 사람들이 반응해 주니까 더 신나는 것 같아. 이렇게 판매로 많이 연결되면 좋겠다. 대댓글도 남겨줘야지… 음 근데 이건 뭐야? 광고인가? 협업문의?’
블로그에 자기네 제품을 홍보해 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 저도 판매자입니다. 타 업체 물건을 홍보하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거절합니다.
- 블로그 글 보고 저희 제품 홍보를 잘해주실 수 있는 분 같아서 연락드렸어요. 저희 물건 써보시고 마음에 안 들면 글 안 쓰셔도 됩니다. 하지만 마음에 드신다면 루트잡화점에서 같이 판매해 보시는 것도 제의 드려요. 저희 제품이랑 잘 어울릴 것 같거든요요. 마진율 협의 가능합니다.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공식 스토어처럼 잘 만들어진 모습은 아니었지만 주부, 엄마, 여성들을 타깃으로 살림에 필요한 여러 가지 소품과 생활용품, 시즌별 선물 상품 위주로 구성한 아기자기한 잡화점 콘셉트. 작은 구멍가게나 다름없는 나에게도 이런 제안이 들어오다니! 인아씨는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예쁘고 좋은 제품인 것 같은데 아직 홍보가 잘 안 되었구나. 리뷰도 다 괜찮네. 제품을 받아서 한번 써볼까? 아니야, 무료로 받으면 제대로 평가를 못하니까 내 돈 주고 한번 사보고 이야기해야겠다.’
인아씨는 이런 제의가 신기하면서도 일이 확장되고, 매출과 이익이 커질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박사! 드디어 졸업이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교수님 은퇴하시기 전에 제가 박사 따려고 정말 노력했습니다.
좋은 제자의 모습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대학원 때 교수님이 대명씨의 졸업을 축하해 주러 오셨다.
“대단해. 그 늦은 나이에 박사를 따면서 최우수 논문상도 받고 말이야. 자랑스러운 제자로 인정하네.”
“하하, 후배들도 그렇고, 교수님들도 모두 늦깎이 학생 도와주시느라 애쓰셨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결국에 해낸 건 자네지. 김박사! 이제 박사학위까지 땄으니 앞으로의 계획은 뭔가?”
“네? 이제 다시 회사 가서 열심히 일해야죠.”
“그래? 나는 자네가 학교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당연히 좋지요. 그런데 학교에서는 제가 할 일이 이제 없으니까요.”
“혹시 교수자리 관심 있으면 자, 여기 한번 지원해 봐. 우리 학교는 아니고 좀 지방이긴 한데 말이야, 자네 이번 박사 논문이 너무 좋았어. SCI에도 실렸으니, 논문에 자네 실무 경력이면 충분히 될 것 같은데.”
“네? 교수요? 제가요? 에이~ 무슨 말씀을요! 저보다 훌륭한 분들이 훨씬 많을 텐데요. 그리고 회사에서 지원해 준 박사과정이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서 몇 년 일해야 합니다. 안 그럼 학비랑 일 안 하고 받은 월급 뱉어내야 해요.”
“그게 그렇게 되나? 하하하”
회사도 좋았지만 박사 과정을 하면서 학교가 참 좋았다.
왜 생각해보지 않았겠는가.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삶. 젊음의 에너지를 느끼며 교정을 거닐며 리프레쉬하는 기분으로 사는 삶. 젊은 친구들과 같이 공부하고 내 분야에서 깊이 있는 연구를 하며 평생을 학자로 사는 삶.
돈을 추구하느라 놓치고 살았던 소중한 것들,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그냥 정말 하고 싶은 대로만 마음 편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현실적으로 안 될 일이었다. 박사과정을 지원해 주는 대신 회사에 돌아가는 조건이었다. 좋은 기회를 얻었고, 덕분에 딴생각 안 하고 바쁘게 지낼 수 있었던 것도 한편으로는 참 좋았다.
박사 하면서 월급도 꼬박꼬박 받았는데, 뱉어낼 돈이 어디 있나? 게다가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다. 교수 월급으로는 생활이 빠듯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인아씨도 스마트스토어를 운영하면서 돈을 벌려고 그렇게나 애쓰고 있는데 자기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둔다고 한다면? 내가 좋은 거 하고 싶어서 가족을 힘들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의 말이 자꾸만 뇌리에 맴돌았다.
‘교수가 된다… 교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