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에 다시 살고 싶다

30. Re, turn

by 챌린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죽을죄를 지었다.”


이동혁이었다. 그렇게 찾아도 안 나타나던 녀석이 먼저 찾아와 대명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있었다. 페라리를 운전하며, 온몸에 명품을 입고 다니던 멋쟁이 사업가 이동혁은 온데간데없었고 초췌한 모습의 노숙자 아저씨만 남아 있었다.


“여기, 이거 받아.”


대명씨 손에 이동혁이 쥐어준 것은 돈이었다.

5만 원짜리 지폐 묶음이 가득 찬 여행용 가방.

세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20억이었다.


“야 이 미친놈아, 왜 이제야 나타난 거냐? 내가… 내가… 흐흐 흐흑.”


울부짖으며 이동혁의 멱살을 잡아 흔들어대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났다.

꿈이 너무 생생해서 대명씨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무슨 이런 개꿈을! 재수 없는 얼굴 따위 보고 싶지 않다고!’


꿈에서였지만 그 얼굴이 잊히지 않아서 기분이 영 나빴다.


‘다 잊고 산 줄 알았는데…’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잊었다고 생각했다. 통장에 억 단위 돈이 쉽게 오가던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적은 월급을 받아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 수 있고, 식구들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은 하고 있었기에 마음이 편해진 줄 알았다.


하지만 쉬이 잊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나 보다. 어쩌면 평생 잊혀지지 않을지도 몰랐다. 다시 그만큼의 자산을 모으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거고, 돈 때문에 아쉬운 일이 생기면 항상 생각이 날지도 몰랐다. 그 돈이, 그 얼굴이.


병원에서 의사는 상처는 아물 수 있어도 흉터는 남는다고 했다. 그 흉터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으니 보이면 보이는 대로, 가끔은 아파하면서 그대로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상처 때문에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상처가 났을 때의 아팠던 기억이 남아 아프게 느껴질 수도 있으니 그럴 때는 스트레스받지 말고 편안한 사람들과 편안한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라고 권했다.


대명씨는 꿈 때문에 하루종일 마음이 심란했다. 겨우겨우 오전 수업을 끝내고 몇 가지 업무를 처리했다.


-오늘 나 수업 다 끝났는데, 오랜만에 나랑 좀 놀아줄 수 있어?”


-오! 일찍 퇴근해도 되는 거야? 나도 지금 서울 나와 있어. 당신 학교 쪽으로 갈까?


-아니 내가 당신 태우러 서울로 갈게. 맛있는 거 먹고 바람도 쐬러 가자.


차를 타고 음악을 들으며 인아씨와 대명씨는 서울 시내 곳곳을 드라이브했다.


“한남대교 오랜만에 넘어가 보네.”


“노을 질 때쯤 지하철 타고 한강 위를 지날 때 그렇게 하늘이 예뻤는데.”


“반포대교 무지개분수도 밤에 보면 참 예뻤고.”


“우리 지금 남산 쪽 가는 거야? 이쪽으로 가면 남산 1호 터널이잖아.”


“남산도 한 바퀴 돌고, 삼청동도 가고, 팔각정? 거기까지 가보자. 어때?”


“너무 늦으면 어머니가 얘들 때문에 힘드실 테니까 후딱 갔다가 가자. 저녁은 내가 차려드려야지.”


“고마워.”


“뭐가?”


“그냥. 다.”


“싱겁기는! 그래도 좋다. 오랜만에 이렇게 서울 여기저기 다니니까!”


“서울 살 때 여기저기 다 다녀볼 걸 그랬어. 뭐가 그리 바쁘다고 얘들이랑 남산 타워 한 번을 못 가봤네.”


“지금도 충분히 갈 수 있는데 뭘. 서울은 아니지만 지하철 타고 서울 올 수 있는 거리에 살고 있잖아.”


“그러게. 내가 매번 말만 그렇네.”


대명씨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역시 의사는 괜히 전문가가 아니었다.


꿈을 꿨다고, 인아씨한테는 말하지 못했다. 말하다가 왈칵 울음이 쏟아질지도 몰랐다. 목이 메일 것 같았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었으니까.


그렇게 비슷한 하루, 비슷한 한 달, 비슷한 일상이 모여 또 시간이 지났다.


루트 잡화점의 규모가 커져서 2명의 직원을 채용했다. 그래도 직원들에게는 야근을 시키지 않았다. 야근 수당이 비싸서가 아니라 야근을 하면서까지 무리해서 사업을 키울 이유가 없어서였다. 지금도 충분히 수익이 났고, 업무 강도도 적당했다. 아이들에게 소홀하지 않으면서 일하는 게 목표였으니까. 그래도 일이 많은 날에는 인아씨 혼자 택배를 싸고 송장을 붙이고 재고까지 확인해야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밤 10시. 더 늦지 않게 마무리가 되어서 다행이었다. 씻고 맥주 한잔을 시원하게 마시고 싶었지만 잠이 쏟아졌다.


“수업 준비해? 나 피곤해서 먼저 잔다.”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우려던 찰나, 대명씨가 말을 걸어왔다.


“우리 서울로 다시 이사 갈래?”


“응?”


갑자기 잠이 확 깨버렸다.


“이거 데자뷔야?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전에? 내가 강남 이사 가자고 했던 일? 그건가?”


“어어!!! 맞아!!!! 우리 강남 이사 가자고 당신이 말 꺼냈던 날! 그날이랑 똑같은 거 같아!”


“하하 그때가 언제야, 어렸고 용감했고 엄청 겁 없던 시절이다!”


"그리 긴 세월이 지난 것도 아닌데...뭔가 새삼스럽긴 하다. 근데 왜? 갑자기 다시 서울?”


“지난번에 우리 서울 드라이브했을 때 있잖아. 처음 강남으로 이사하고, 건물 사려고 갔었던 한옥집을 우연히 봤어. 차로 스쳐가는 찰나여서 제대로 본 건 아니지만 여전히 고즈넉하고 여유가 흐르는 게 너무 좋더라고. 그 집 처음 사려고 했을 때의 기분, 막 두근두근 대고 내가 전부 다 가진 것 같은 행복한 기분 막 떠오르더라. 문득 다시 서울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냥 그렇게 넘겼는데, 계속 그런 생각이 들어. 다시 서울에 가면 어떨까. 내 집 한 채, 그리고 그 한옥 한 채 있으면 좋겠다 그런.”


“갈 수 있다면 좋긴 하겠지. 서울 살 때 나름 재미는 있었어.”


“사실 나 아직 가끔 꿈꾸거든. 그 일. 엄청 힘들고 미치겠고 예전처럼 그런 정도는 아닌데 가슴은 아프더라. 대면하고 마주치면서 극복해야 진짜 회복하는 거다 싶은 생각도 들고.”


“멋지네. 우리 남편! 근데 현실적으로, 돈은 있어? 강남으로 이사 갈?”


“하하, 그걸 물어볼 줄 알았지. 있어. 새 아파트는 어렵고 구축 정도는.”


“그동안 서울 집 값이 엄청 많이 올랐는데, 내 집 사서 이사 가는 거야? 아님 이번에도 월세??”


“알다시피… 강남 집 값이면 빌딩 한 채 살 수 있는 돈이야. 그 돈이면 다른데 투자해서…”


“앗! 대답도 어떻게 똑같이 데자뷔야??!!”


놀이터 쪽으로 빙 둘러 서 있는 나무들의 가지가 앙상하다. 재활용 쓰레기 배출장 옆 쓸쓸히 겨울을 견디는 아름드리나무. 동 입구 쪽에는 사선으로, 단지 한가운데는 두줄로 평행 주차된 차들. 처음 강남에 집을 보러 왔을 때 들렀던 그 구축 아파트 단지에 왔다.


봄이 되면 나무들이 싱그러운 연둣빛 이파리를 가득 품고, 뽀얀 꽃잎을 눈처럼 가득히 뿌려줄 거다.


여름이 되면 진한 초록의 에너지를 한껏 머금고, 쏟아지는 햇빛을 반사시키며 눈부신 자태를 뽐내겠지.


가을에는 이 오래된 아파트 단지의 집 값이 오를 거다. 노오란 은행잎, 붉은 단풍잎이 구름이 낮게 깔린 듯 아파트 전체를 금빛으로 가득 채워주고, 인도블록에도 알록달록 폭신폭신한 최고급 카펫을 깔아줄 테니까.


겨울은 쓸쓸하지만 다시 봄, 여름, 가을을 맞이하기 위해 견뎌내야 하는 시기다. 지치지 말라고 가끔은 하늘에서 반짝이는 하얀 꽃을 내려주기도 한다. 눈부셔서 쳐다보고 있으면 내 마음까지 빛나는 눈꽃을.


이번에는 내 집이다. 전체적으로 수리도 했다. 맞다. 이 돈으로 다른데 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래도 인아씨와 대명씨는 집을 샀다. 매년 내야 할 세금과 대출이자를 생각하면 과연 집을 사는 게 맞나, 여전히 걱정이다. 그래도 어찌어찌 겨우겨우 집을 샀다.


그렇게 다시, 강남에 왔다. 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역시 사람과 돈이 몰리는 곳에 살면서 투자도 하고 부자도 되려고 왔다. 다시 한번 해볼 생각이다. 한번 해 본 거 또 못하리라는 법 없다고 믿는다.


결과는...... 살아봐야 알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할 거다. 이번 페이지는 나중에 다시 자꾸 돌아보고 싶은, 뒤로 넘겨서, 자꾸 넘겨서 읽어보고 싶은, 두고두고 아이들, 가족들과 웃으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페이지를 써 나갈거다.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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