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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돌 Feb 25. 2022

수줍은 고백

동결배아 이식

난자 채취 후 바로 이식을 하면 신선배아 이식, 남아있는 배아를 얼렸다가 적절한 시기에 이식하면 동결배아 이식이다. 채취 후 자궁과 기타 컨디션에 따라 이식을 미뤄 동결배아를 이식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는 바로 신선 이식을 하고, 남은 배아를 냉동시켜 이식 기회를 높인다. 동결배아가 0개였던 첫 번째와 달리 두 번째 채취에서는 나도 동결배아가 있었다. 채취 없이 이식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얻은 셈이다.


지난여름 소파술로 두 번째 시험관을 마무리하던 날, 난임 병원 의사는 '동결배아가 있으니 마음의 준비가 되면 오세요. 가능하면 빨리요.' 라며 은근히 나를 재촉했다. 굴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선생님의 말씀에 간신히 예의를 차려 알겠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그 직후 임신과 상관없는 곳에 몰두할 일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훌쩍 흐른 시간. 결국 계절이 바뀌고 세 번째 생리가 시작되어서야 다시 병원을 찾았다.




공백이 무색하게 다시 찾은 병원은 여전했다. 공간도 시스템도 직원들마저도 익숙했다. 접수를 하고,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고, 의사를 만나 스케줄을 정하고, 간호사에게서 설명을 듣고, 수납하는 일까지. 4년 넘게 다니다 보니 습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번엔 이미 동결되어 있는 배아를 이식하는 일이라 특히 더 수월했다. 과배란도 주사도 없었다. 지금까지의 시술 중 가장 간단했다. 그래서인지 더 기계처럼 병원을 오갔다.


별다른 이벤트 없이 시작 3주 만에 이식 날짜가 잡혔다. 자궁은 준비됐으니 이식만 잘하면 된다는 의사의 말에 기계처럼 웃으며 잘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인공수정을 포함하면 6번째 이식이다. 이식 날 아침, 베테랑답게 준비물을 챙기고 6번째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남편에게 아픈 것 없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진심이었다. 나 역시 진짜 걱정이 없었다. 동결된 배아를 이식하는 건 정해진 수순이니 이번 이식이 끝나면 앞으로 어떻게 할지 다시 고민해 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따뜻한 봄이 임신하기에는 더 낫지 않을까, 시험관 삼세번은 해봐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일단 이식을 하고, 생각은 그다음에.


예상했던 대로 이식은 힘들지 않았다. 전과 다르게 일명 콩주사(인트라리피드) 링거를 맞느라 조금 더 오래 누워있었던 것 빼고는. 시술 직후 간호사가 건네 준 사진에는 몽글몽글 귀여운 배아 세 개가 뾰로롱 떠 있었다. 추운 곳에서 지내다 이제 자궁으로 왔으니 따뜻해졌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너네나 나나 고생이 많구나. 대기실로 가니 남편이 내 외투를 들고 벌떡 일어났다. 남편도 고생이 많다. 이게 우리 팔자인 걸까.




그렇게 기대 없이 시술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급 허기가 몰려왔다. 냉동실에 쌓여있는 추어탕과 갈비탕은 왠지 꺼내기가 싫었다. 뭐 먹을 거 없나.. 하며 찬장을 뒤지다가 지난 주말 남편이 사다 둔 짜파게티를 발견했다. 한 10초쯤 망설이다 손을 뻗어 짜파게티를 꺼내 봉지를 뜯었다. 아 몰랑. 먹고 싶은 거 먹을래. 정말 오랜만에 끓여본 짜파게티.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내 손은 능숙하게 검정 가루를 잘 익은 면에 비비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올리브유를 쭉 짜면서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실실 쪼개며 나 몰라라 짜파게티를 먹은 날로부터 3달이 지났다.

그리고 지금 나는 14주 차 짤짤이 엄마다.

(잘~ 자라라고 짤짤이다. 짜파게티 먹은 날 생겨서 짤짤이는 아니다.)


이식 후 기다림의 열흘, 피검사 후 조마조마하던 3주가 지나고, 기형아 검사까지 마치고 나니 14주가 됐다. 그간의 시간은 어디에도 알릴 수 없어 혼자 삭여왔다. 이제는 알릴 수 있을 것 같아 글을 쓰고 있지만, 지금도 조금은 얼떨떨하다. 결혼 10년 차, 난임 병원 5년 차에 얻은 아이. 정치고 경제고 사회고 혼란하기 짝이 없는 이 시국에 대한민국 소시민 부모에게 찾아온 짤짤이. 기대 없이 진행한 시술에서 만나게 됐다. 인정하기 싫지만 '마음을 비우니' 찾아왔다. 다만, 그 '마음 비우기'는 수도 없는 마음의 고난과 물리적 노력 끝에 조그맣게 피어난 결과였다.


임신 고백이 이렇게 수줍을 줄 몰랐다. 토덧에 시달리던 3개월, 쉽지 않을 남은 6개월. 진짜 고난의 시작이라는 육아의 시간. 새로 생겨난 걱정 때문인지, 그동안 다짐하듯 썼던 글들이 부끄러워서 인지. 임신을 밝혔을 때 나보다 더 기뻐하며 축하해 주는 주변 사람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뭔가 거창하고 서프라이즈 한 임신 고백을 상상했는데, 역시 성격상 안된다. 그냥... 수줍게 고백한다.

저... 진짜 임신했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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