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오후, 교실 맨 뒤쪽 자기 자리에 앉아있던 K랑 몇 마디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아이들도 어른들과 비슷해서, 각자 그 나름의 분위기와 평균적인 기분상태를 가지고 있다.
나는 종종 이걸 '걸음'과 비교해서, '걔는 어디에서 걸어 다니는 편이야' 하고 생각하곤 한다.
나름대로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개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인데,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거나 독특한 행동도 대부분은 웃어버릴 수 있다.
항상 즐겁고, 유쾌한 편인 아이는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편이야.
대부분의 경우 조용하고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에겐, 진흙탕 속을 걸어 다니는 중이지- 하면서.
그러다가 어느 날, 누군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하이 텐션인 날에는, 넌 오늘 구름을 뚫고 다니는구나! 하기도 한다.
내 마음속의 K는 폭신한 케이크 위에서 사뿐사뿐 산책하는 녀석이었다. K는 차분하고 자기만의 세계를 잘 유지하면서도, 시시콜콜 농담도 잘하고, 웃기도 잘하는 달달함이 있었다. 그런 애가, 그날은 딱 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등교하던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 같았다. 얼굴에 쓰여 있으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니랑 싸웠어요."
"왜?"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하는 말 끝에 속상한 게 잔뜩 걸려있다. K의 한 살 터울인 언니 B는 똑 부러지는 모범생이었다. K와 언니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만큼 K가 언니를 의지한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뭐하다가 싸웠어? K는 언니 좋아하잖아."
"저는 언니 좋아하는데, 언니는 저 싫어해요."
"에이, 아닐걸?"
"아니에요, 언니는 진짜로 저 싫어해요."
진짜로 싫어해요. 하는 표정이 사뭇 진지해서 웃음이 조금 났다. 너네 언니가 너를 싫어할 리 있니, 하는 생각과 함께, 맏이들이 다들 동생을 귀찮아하는 면이 있지,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어린 시절 나도 '동생 데려가', '동생 챙겨줘' 하는 엄마의 말을 참 싫어했으니까. B는 아마 그런 마음으로 너 싫어, 하고 말했을 텐데, 우리 반 K가 언니의 그 말을 마음에 품고 상처 받은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 편들어주고 싶었다.
"그럼 너도 언니 싫어해버려. 에잇, 싫어해버리자."
짓궂게 씨익- 웃으며 건넨 말에 K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제 푸는데 집중하나 보다, 생각하고 무심코 나도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았다. 서류 작업이나 해야지, 하던 참이었다.
"그러려고 하는데요, 그게 자꾸 안 돼요. 어쩔 수 없이 언니가 자꾸 좋아져 버려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내 마음속에 중심을 잡고 있던 크고 작은 추들이 와르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저 말을 하는 K의 진심이 너무나도 절절히 느껴져 마음이 아프면서도,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을 수가 없었다. 어머, 어떡한담...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저토록 절절한 마음이라니. 저걸 저렇게도 솔직히 말할 수 있다니. 그 순간의 K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비록 K에게는 언니에 대한 속상함을 표현하는 순간이었는지 몰라도, 나에게는 K의 언니가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저토록 투명하고 순수한 애정을 받는 저 애의 언니는, 모르긴 몰라도 참으로 축복받았구나. 참 사랑스럽고 알콩달콩한 자매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이 너무 감격스럽고, 너무 예쁘고, 그런데 너무 마음이 아파서, 결국 K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K는 제가 제 마음을 꺼내보였다는 것이 마치 없던 일인 듯, 그것은 일상적인 일인 듯 아무렇지 않게 문제를 풀더니, 가방을 챙겨 방과 후 교실에 가버렸다.
아이들을 대하다 보면, 아이들의 표현에 놀랄 때가 참 많다.
아이들의 표현은 어른들보다 훨씬 더 투박하고, 단순하다. 직선적이고, 숨겨진 것도 없다.
그래서인지 훨씬 더 크게 다가온다.
말들이 날아와서 나에게 닿을 때, 그 속에 품은 마음을 내려놓고 가는 거라면,
어른들의 말은 그 마음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아이들의 말은 선명하고 커다랗게 제 마음을 내게 터뜨려놓는다. 소나기를 맞은 것처럼 흠뻑, 나를 적셔놓는다. 가끔은 아예 표지판처럼 번쩍번쩍, 제 마음을 광고하기도 한다.
그래서 더 크고, 더 무겁고, 더 가깝게 다가온다. K의 말도 그랬다.
그래서 K를 보면 늘 그때 그 말이 생각난다.
K는 어땠는지 몰라도, 나에게는 누군가의 진심에 퐁당 빠져든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갑자기 K가 부러워진다. 제 마음이 어떻다, 하고 솔직하게 툭- 터뜨릴 수 있는 용기와 힘이 부럽다.
다른 말에 진심을 숨겨놓지 않는 솔직함이. 내가 너를 좋아한다, 순순히 인정하는 순수함이.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까, 짐작하지 않는 무심함이. 너는 어떤 대답을 할까, 상상하지 않는 단순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