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아는 세상이 전부는 아니랍니다.
내가 사는 현실과 네 현실의 차이가 있으니
우리 사이의 차이가 당연하다는 걸 잘 알지만
가끔은 당신의 무신경함이 좀 짜증이 난달까.
네가 살면 얼마나 살았고, 알면 얼마나 안다고 이런 글을 쓰다니 건방지도다!
- 하는 비난을 듣는다면 감수하겠다.
오래전, 한 선배님이 펼치신 이론이 퍽 인상 깊게 남아있다.
" 요즘 이삼십 대들은 우리 어릴 때보다는 훨씬 살기 좋지 않아? "
지금 생각해도 문제적 발언이다.
예순을 향하던 선배님의 요지는 그랬다.
2030 세대는 부모세대인 우리가 대학등록금부터 주택구입비까지 지원을 해주니
그리 아등바등 살 필요는 없지 않냐는 것.
그러니 너무 돈돈하지 말고 젊을 때 옷도 좀 좋은 걸 사 입고 해외여행도 많이 다녀보고 연애도 실컷 하라는, '젊은 후배들'을 위한 조언 조의 말씀.
악의가 없었다는 건 안다.
그런 말을 한 게 그 선배님 한 분뿐만이었던 것도 아니다.
저 선배님, 내가 대학 내내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충당했다는 걸 아시면 까무러치시겠구먼, 하며
대충 한 귀로 흘리려는데, 후배 H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저 아직 학자금 대출도 다 못 갚았는데요! "
"아니 자기야, 부모님이 대학등록금도 안 해두셨더니?"
아, 그때 H의 그 얼굴이란.
잘못한 것도 없이 수그라 들던 표정.
쏘아붙인 사람은 오히려 당당하고 성실히 대출을 갚던 초년생은 작아졌다.
모두에게 당연한 게 왜 너한테는 없냐는 듯한 그녀의 태도는
H를 민망하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중에야, 폭탄발언의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유복했고,
고향에서 이름난 사업가와 결혼해 평생 부유하게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 그러니 그런 삶의 방식이 그녀 자신에게는 당연한 것이겠지
그렇다고 저토록 무례한 태도를 가져도 되는 거야?
이후에도 한참 동안은
H의 얼굴을 생각할 때마다 나까지 불쑥 화가 치솟았다.
날 때부터 왜 당신은 많이 가지고 나는 적게 가졌는지 따지고 싶은 게 아니다.
그런 출발선에 관한 논의는 의미도 없고 힘도 없다는 걸 이미 잘 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래도 어른이라는 이름 한 줄 달고 살고 있다면
그 정도의 '신경'은 쓰고 서로를 대해야 하지 않냐는 거다.
생각해 보면
자기만의 '일반적 전제'를 당연시하는 사람들 때문에 숱한 상처를 받아왔다.
자녀의 교육비쯤은 '당연히' 마련해 두셨던 내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은
네 부모는 네게 개인과외를 붙일 형편도 안되냐며 나를 몰아세웠고
아르바이트 때문에 어학연수를 가지 못한 내가 안타까웠던 나의 교수님은
네가 푼돈 때문에 중요한 기회를 놓치고 있다며 나를 힐난했다.
그뿐이랴
엄마와 함께 백화점 VIP라던 내 동기 중 하나는
시시 때때로 내 가방을 평가하며 '없어 보인다'라고 조언했고
내 주변의 수많은 기혼자들은
얼른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해야지 왜 철 없이 구느냐며 충고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괜스레 초라해졌고
이상하게도 그들은 더 당당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나를 위하는 것 같은 태도는 나를 더 작아지게 만들었다.
내 잘못도 아니고 그들의 공도 아닌데
왜 그럴 때마다 내가 움츠러들었어야 했는지 모를 일이다.
최근에 만난 친구 Y의 인생은 소위 주류라는 것에서 벗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일평생 순탄했던 그녀는 마찬가지로 유능한 신랑과 결혼해 아이 둘을 두었다.
긴 세월 동안 그녀는 나를 일반적인 당연함으로 재단해 왔다.
사실 난 그녀를 꽤 좋아해서
그녀가 나를 '당연한 것들'로 재단하려 할 때마다 눈감아왔다.
내가 부족한 것이겠거니, 덜 가진 나의 자격지심이려니 했다가
좀 더 나이가 먹어서는 그저 그녀가 철이 없는 것이려니, 잘 몰라서 그런 것이려니 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말이다.
난 애 둘이나 키우느라 힘든데, 결혼하지 않은 넌 힘든 일 하나 없이 자유로워 보인다-
하는 말은 당최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모르겠는 거다.
결혼하지 않은 나를 온전치 못한 상태라며 충고할 땐 언제고
결혼하지 않은 내겐 힘든 일이 없어 보인다니.
그저, 자기가 겪은 것만 최고이거나 자기가 겪은 것만 힘든 사람이었던 거다.
이건 철이 없는 것도, 잘 모르는 것도 아니다.
당연한 일은 별로 없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네가 사는 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도 천지차이다.
나한텐 숨 쉬듯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
누군가한텐 끔찍이도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남의 세상, 내가 바꿔줄 수는 없을지라도
네 세상이 비정상이다, 네가 부족한 거다, 몰아세우지는 않아야 하지 않을까.
나한테나 당연한 거, 남한테 강요는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