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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상 Jun 28. 2022

길의 또아리를 돌다

제주를 훔치다 7

  바다를 뒤로하고 산길을 오른다. 난이도 ‘상’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게 시작부터 숨이 차오른다. 무거운 걸음을 위로하듯 금세 중산간의 평지가 나오고 만발한 감자꽃, 제주감자를 품고 있다. 감자가 알알이 튼실해지기 위해서는 저 고운 꽃과 푸르른 줄기가 머금고 있는 햇살, 바람, 물기가 알감자에 닿아야 한다. 꽃도 줄기도 사위어 형태가 사라졌을 때, 그때야 비로소 알감자를 수확할 때다. 모든 위치가 그런 것, 때마침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아직 아들 녀석은 전화 한 통 없고 나는 전화할 부모가 없다. 요새 아이들 말로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저 쿨한 척할 수밖에 없어도 100일, 200일, 일부러 기념일을 만들어 제 놈 여자 친구와 만난 날을 챙기는 녀석이 조금 서운한 것도 사실이다. 나도 어쩔 수 없이 꼰대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어쩐 일인지 오를 때 보았던 산방산이 아무리 걸어도 사라지지 않고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할 뿐이다. 의도된 덫, 길의 또아리를 빙빙 돌고 있다. 둥근 둘레길에 동그란 향기들도 같이 걷는다. 향기에도 소리가 있다면 이렇겠지. 손톱만 한 꽃들, 손가락만 한 꽃들, 손바닥만 한 꽃들, 그 모든 꽃들이 어우러져 내는 합향. 한 종류의 꽃으로는 도대체 낼 수 없는, 어느 조향사가 빚을 수 있을까. 

  군산에 오른다. 제주 사람들이 짓는 하우스들이 바다보다 넓게 보인다. 어떤 이들은 제주에서 살아가고 있고, 어떤 이들은 육지의 삶을 살기 위해 제주에 온다. 또 어떤 이들은 내려놓기 위해, 포기하기 위해 올 것이다. 나는 왜 이곳에 왔을까. 명당이었으나 묘를 쓰면 징벌이 내린다 하여 금묘령이 떨어졌었다는 군산을 돌다가 우연히 무덤을 만날 때면 가벼운 목례로 지나는 길을 답례한다.    

저기, 4분의 2박자의 노동이 있고


  남은 길은 먼데 성난 발가락 물집으로 온몸이 욱신거린다. 할 수 있다면 남은 길을 돌돌 말아 길을 끝내고 싶었는데 군산을 내려오니 가까운 하우스에서 들려오는 옛 노래가 발 끝에 닿는다. 하우스 안의 무더운 노동을 노랫가락에 버무리고 있나 보다. 내 발걸음도 사분의 이박자로 경쾌해진다. 오랜만에 흥겹다. 

  흥겨움이 스미는 것도 생애주기에 따라 다르다. 별것도 아닌 일에 웃음이 쏟아지는 시기, 눈물 나게 재미난 일에도 웃지 못하는, 혹은 웃지 않는 시기. 나는 어느 시기에 서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잘 웃지 않는 시기로 진입한 지 오래인 것 같다. 행복의 한자는 다행 행에 복 복을 쓴다. 幸福, 다행한 복이다. 특별한 것이 행복이 아니라 불행한 일만 아니면 모두 행복이라는 것. ‘행’ 자가 들어가 있는 내 이름의 한자를 물을 때면 ‘행복할 행’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저 다행 정도인 삶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서였을까. 특별하게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했던 것. 잘 웃지 않는 것. 물집으로 욱신거리는 이 걸음도 다만 물집뿐이라 행복일 수 있는 것을. 문득 뒤를 돌아보니 뜻밖의 하루다. 

하루하루가 뜻밖이라면


  도착점인 화순은모래해변은 출발점에서 불과 2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돌지 않았다면 보지도 듣지도 못했을 것들을 얻었으니 되었다. 추사가 유배를 견딘 산책길, 내 속내도 보여준 안덕 계곡의 속 여울, 그 곁에서 세월을 유유히 흐르는 마을들. 

  그 마을 안, 알려지지 않은 혹은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은 소박한 식당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인지. 무거운 걸음을 잠시 쉬며 일인 밥상도 따듯하게 차려주시는 그분들의 정스런 삶을 마주하는 것도 내 걸음을 풍요롭게 했다. 걸음을 마쳤을 때 비로소 내 삶에도 보드라운 정이 볼 살처럼 통통하게 오를 것만 같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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