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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상 Jun 21. 2022

봄 유채와 여름 수국,
그 사이에서 찔레가 핀다

제주를 훔치다 6

  어제보다 5킬로미터 정도 짧은 내륙 길을 선택했다. 호젓하지만 인적이 드물고 산길이 많아 고객센터에 걸음을 신고한다.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한 시간에 한 번씩 전화를 해 준다는데 고요한 걸음에 방해될 것 같았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안전을 택한다. 

  산딸기가 지천이다. 빨갛게 군락 지어 있는 곳에서 한 줌씩 따먹다 보니 두려움은 붉음에 물들고 걸음은 자주 늦어진다. 그뿐인가 찔레꽃들도 무더기무더기 자꾸만 걸음을 멈추게 하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해찰을 부린다. 초봄의 유채와 동백, 유월의 수국 사이에서 찔레가 지천으로 핀다는 것을 이제야 이렇게 안다. 

산딸기와 찔레, 그 향기에 잡히다 


 산딸기, 찔레꽃의 취기가 채 가시기 전에 엉또폭포에 닿는다. 세계 4대 폭포 중 하나. 나이아가라, 이과수, 빅토리아 폭포와 함께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물이 안 내려서 세계 4대 폭포에 든다고. 재치 있는 설명에 미소를 지으며 폭포 속으로 들어간다. 이미 누군가 올린 글에서 물이 없다는 글을 보기도 했고. 그런데 웬걸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폭포를 이제까지 보지 못했다. 오월의 푸르름이 쏟아지고 있지 않은가. 폭포 위로 짙게 우거진 숲이 햇살과 함께. 이렇게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면 낙엽이 또 얼마나 멋진 폭포가 되어 쏟아질 것인가. 용인에서 왔다는 부부도 한참 자리를 뜨지 못하고 초록에 물들어 있다. 헤어질 수밖에 없는 연인과 약속하듯 깊은 가을에 다시 오마고, 그래서 그대, 낙엽 폭포를 보겠다고 손가락을 건다.   

초록폭포


  경사가 반복되고 고군산 오르내림이 포함되어 있어서 어제보다 힘들고 아프다. 살아가는 대부분의 걸음이 평지다 보니 작은 경사에도 숨이 차고 내리막 길은 아프다. 무릎과 발목 심지어 발바닥까지. 힘듦은 견딜 수 있고 목적지에 이르면 오히려 희열이 되지만 아픔은 한계를 넘으면 몸에 고장을 준다. 며칠째 쌓인 힘듦과 아픔,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다. 더구나 오른쪽 새끼발가락에 잡힌 물집이 걸음의 무게를 왼쪽으로 기울게 해 결국 왼쪽 발까지 물집이 잡히고야 말았다. 낯선 동네 어귀 평상에 앉아 양말을 벗고 발가락을 들여다본다. 그래 내 모든 날의 가장 바닥을 딛고 있는 발가락의 뒷면도 바라봐줌이 필요했던 게지.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이리 물집이 잡히기도, 터지기도, 표피가 벗겨지기도 한다는 것에 잠깐의 응시가 필요했던 거야. 살아가는 것이 조금 더 괜찮은 쪽에 기대다 보니 괜찮았던 것도 결국 안 괜찮아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부족하고 약한 쪽도 지혜롭게 써야 하는 위치이다.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호근리를 지나니 곧바로 가면 도착지가 있는 큰길이다. 그런데 리본은 반대 방향에 걸려 있다. 순간 속이 소란스러워진다. 그냥 가까운 길로 질러가야 하나. 가라는 곳으로 가야 하나... 힘듦과 아픔을 다독여 리본 쪽으로 길을 잡는다. 뜻밖에 하논 성당터와 하논 습지로 안내한다. 

  1900년 6월 12일에 산남지역 최초의 성당인 한논본당이 설립되었던,  서귀포 성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하논성당터(원래의 이름이 ‘한논’이었으나 지금은 ‘하논’으로 쓰고 있음). 신이 거기서 나를 기다려준 것만 같아 맑은 햇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는다. 세상의 모든 고요함이 고이고 내 안에 쌓여 있던 걱정들도 고요해지는 순간이었다. 성당터의 고요함을 뒤로하니 아쉬움이 든다. 조금 더 고여 있고자 했으나 남은 길은 여지가 없다. 아쉬움으로 후일의 고임을 다시 도모해야겠다. 

  제주에서 흔치 않은 습지로 알려진 하논 습지로 든다. 바로 옆, 귤 밭이 없었다면 고향집 들판을 지나는 듯 착각했을 터였다.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습지가 이제 막 모내기 준비를 마치고 촉촉이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깊숙한 곳에서 생경한 제주의 맨살들을 마주하고 보니 무뎌진 생에 끼어든 뜻밖의 이성처럼 흔들린다. 이파리 하나 없이 마른땅을 지키고 있는 민들레 두 송이도 거기 있었고.  아! 질러가지 않은 것, 짓이겨진 물집에 대한 보상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다. 속절없이 두근거린 날이었음을 고백한다.  

멀리 돌아야만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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