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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상 Jun 14. 2022

'우연' 한 씬 추가요

제주를 훔치다 5

  바다와 팔짱을 끼고 걷는다. 걸었던 중에 가장 긴 거리로 19.4킬로미터이다. 버스정류장에서 시작점까지 1.1킬로미터를 걸었으니 20킬로미터가 넘는 구간이다. 여전히 바다는 경고를 파스처럼 붙이고 있다. 그런데 오늘 경고는 비슷한 내용인데 머리글은 ‘알리는 말씀’이다. 단체장들의 성향인가? 아니면 담당 공무원들의 특징인가? 그저 유행인가?

  고속도로에 펼쳐놓은 현수막들에는 ‘졸음운전, 종착지는 이 세상이 아닙니다.’ ‘졸면 죽음’과 같은 드센 문구들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교통사고를 줄이겠다는 불타는 집념으로 내걸었을 테지만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폭력성이 먼저 느껴지곤 한다. 문구 폭력에 여과 없이 노출되어 있다고나 할까. 이러한 문구들을 자주 마주치다 보면 감각이 무뎌진다. 그러다가 어떤 말이, 어떤 글이, 어떤 행위가 폭력인지 인지할 수 없게 될까 봐 두렵다. 

     '졸음운전, 도로 위의 시한폭탄', 도 있다. 어떤가?


  섬이다 보니 알림, 주의, 경고 등 위험을 알리는 문구들을 바다에 붙여놓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들의 쓰임을 달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관련된 일에는 경고를, 낚시를 하거나 물놀이 등 스스로 조심해야 하는 경우는 주의를, 채취나 사유지 진입, 쓰레기 투척 금지 등에는 알림을. 

  거침없는 경고를 몇 번씩 받다 보니 처음엔 무슨 경고를 이렇게나 많이... 했다가 어느 순간 경고의 강한 의미를 무심코 지나쳐 버린다. 경고를 보고 진짜로 조심해야 할 일도 이리 지나치게 된다면! 작은 일에도 고민을 담아내길 바라는 것은 너무 큰 기대인가.     

도긴개긴, 그러나...


  길이가 있는 만큼 굽이를 돌아도 저 멀리 돌아야 할 굽이가 남아있다. 언제 가나 싶지만 눈이 제일 게으르다고 하셨던 어른들의 말씀이 옳다. 걷다 보면 어느새 그 굽이에 닿아 있으니 말이다. 오늘은 리본이 안내하는 길을 잘라먹기도 하고 바닷가로 바짝 돌아가라는 리본을 못 본 척 질러가기도 한다. 한때 김 네비라는 별명을 가진 나였으므로 한 번쯤 꾀를 부려보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20킬로미터는 조금 안 될 수도 있겠다.          

  내 인생에 우연 한 씬이 오늘 제주 바다에서 추가됐다. 해안가에서 사이클 복장으로 사진을 찍고 있던 사람이 나를 보더니 인사를 하는 거였다. 나는 움찔 답을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머뭇거렸다. 생각해보라 얼굴까지 온통 다 가린 사람이 아는 체를 한다면, 그것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지에서, 동서남북 어딘지도 모를 그저 곡선인 해안가에서.. 순간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가리개를 풀어 내렸다. 아! 그녀였다. 영미 씨.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끌어안고 신기해하고 반가워했다. 그녀와 일한 시간은 겨우 넉 달 정도였다. 나이 차이도 많지 않아서 직원이라기보다는 여자로서 엄마로서 같은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  따듯하고 품이 넓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과 떠는 수다를 어떻게 마다할 수 있겠는가. 바다를 깔고 앉아 지난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우리가 함께 일했던 그 이후 몇 군데를 더 다녔고, 작은 카페도 운영했단다. 카페 운영이 어려워 접고 마지막 직장이다 생각하고 이력서를 냈는데 덜컥 합격했다고. 다음 주부터 일하게 되어서 무작정 자전거를 제주행 배에 싣고 떠나왔다고. 갱년기로 힘들었다는 이야기도. 그녀의 모든 이야기들이 바닷말이 되어 밀려갔다.

 더 늦어지기 전에 남은 길을 걸어야 한다며 자꾸만 되돌아와 철썩이는 파도의 등쌀에 다시 혼자가 되어 길을 걷기 시작한다. 각자 떠나온 곳과 걸어온 길, 남아있는 혼자만의 여정을 응원하며. 더욱 씩씩해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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